172화. shit happen (4)
[따아악~!!]
“어?!! 이 타구는 좌측!! 높은 곳으로!! 계속 뻗어 담장을 넘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올 시즌 첫 홈런!! 개막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쏘아 올립니다!! 스코어 2대 0!! 필라델피아에 선취점을 안깁니다!!”
“지금 이인영 선수의 자세를 보세요!! 그냥 헛~ 딱!! 이거든요!! 가볍게 쳐도 넘어갑니다!!”
박한우 위원의 해설에 이인호 위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구체적인 타격 이론을 앞세우는 사람이 헛~ 딱은 또 뭔가, 사실 이건 자세가 그만큼 간결하다는 뜻이었다.
작년 시즌 막판에 홈런 페이스가 떨어지자 이인영은 오프 스탠스에서 앞발을 멀리 뻗는 폼으로 허리 회전을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지금 타격은 작년과는 약간 달랐다.
앞발을 뻗는 건 작년과 똑같지만 오른 발이 착지할 때 살짝 열려있는 폼, 사실 이런 타격 폼은 별로 좋지 않게 평가받는다.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에 엉덩이가 빠지면서 헛스윙이 될 수도 있고, 뭣보다 앞발이 열린 만큼 체중이 투수 쪽으로 쏠리면서 파워를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 돈 띵 쏘’
하지만 이인영은 과감하게 편견을 깨버렸다.
최대한 간결하고 빠른 스윙으로 걷어내야 하는 게 몸 쪽 공인데, 앞발을 닫아놓고 어떻게 몸통을 회전시키나.
박한우 위원은 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뒤늦은 분석에 나섰다.
“지금 보세요, 오른 발의 위치가 3루를 향하고 있죠? 지금 이 자세에서도 어깨와 허리가 고정돼 있어요.”
“지금도 기다리고 있네요. 이쯤이면 배트가 나가야 되는데 출발이 너무 늦었던 게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게 이인영 선수의 장점이죠. 지금 이 상황이라면 어떤 선수들은 배트가 이미 출발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무리하게 끌어 치는 타격이 됐겠죠. 그냥 기계에요 기계, 이 타이밍에 나가면 어떻게 타구가 날아갈지 머리와 몸에 다 입력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헛~ 하고 치면 딱~!! 하고 날아가는 거죠.”
“하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요. 그게 도대체 뭡니까?”
“이해가 안 된다면 그냥 보고 즐기시면 됩니다.”
아직도 팬들은 배트 스피드가 타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정말 중요한 건 배트 스피드가 아니라 언제 배트가 출발하느냐는 것, 스트라이드와 배팅 스피드는 얼마나 연관이 있는 걸까.
오픈 스트라이드를 쓰는 선수는 스트라이드에서 스윙을 하기까지 대략 0.57초(오차 범위 0.144초)가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클로즈 스트라이드를 쓰는 선수도 대략 0.57초(오차범위 0.144초), 클로즈 스트라이드를 쓰는 선수는 대략 0.579초(오차 범위 0.158초)가 걸렸다.
즉, 스트라이드를 하면서 앞발을 닫든 열든 배트 스피드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정말 프로 선수는 배트 스피드를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사실 스윙이 빨리 돈 게 아니라 출발을 일찍 한 것 뿐, 타자가 서두른다고 배트스피드가 올라가진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공을 칠 수 있는 타이밍이 언제인지 잡아내는 것, 실제로 어느 선수는 배팅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장작을 패는 훈련으로 스윙 속도를 향상시켰다.
그래서 그 선수가 성공을 했느냐?
아니다. 오히려 망해버렸다.
배트 스피드가 아무리 빨라도 정확한 히팅이 되는 타이밍을 잡질 못한 것, 그에 비해 배팅 스피드가 느리다고 외면을 받은 어느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100마일 직구를 빵빵 걷어내고 있다.
정말 중요한 건 배트 스피드가 아니라 배트가 출발하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 이인영은 지금 그 기술을 눈앞에서 보여줬다.
모두가 저 타이밍엔 절대 공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본인은 이미 계산을 끝내고 스윙을 내지른 것, 박한우 위원을 말대로 기계에 버금가는 타격 감각을 보여줬다.
“아~ 이거 왜 이래?”
하지만 홈을 밟은 슈퍼스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필라델피아는 기후가 따뜻하고 온건하지만, 연평균 강우량이 일 년 내내 고르게 분포 돼 있다.
날씨가 좋아도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는 환경, 특히 5월이 되면 아열대성 저기압이 서쪽으로부터 습기를 몰고 오기 때문에 후덥지근하고 비도 자주 내린다.
지금이 바로 딱 그런 환경, 2회 초가 되자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첫 타석에 개시한 홈런이 날아갈 지경, 주심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살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홈 팀이 우천 취소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이것 때문에 각 구단은 첨단 레이더 장치까지 보유하고 있는데, 이인영의 홈런이 걸린 경기라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때, 그치겠어?”
“글쎄,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빗줄기, 구단관계자들은 회의를 거쳐 비구름이 걷힐 확률은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선수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단 경기가 취소될 확률이 높다는 뜻은 전했다.
“전쟁 났어도 경기는 했잖아요. 그런데 이 정도 비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라고요?”
이인영은 격하게 반발했다.
오늘 취소되면 내일 더블헤더를 해야 되는데 그것도 짜증나는 일, 몇 시간 더 기다려보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경기 중단 2시간 만에 약간 잦아든 빗줄기, 홈런이 걸려 있는 경기라 슈퍼스타는 동료들에게 빠른 공격을 요구했다.
“내 홈런이 달려있다고,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얼른 쳐”
“왜 협박을 하고 그래?”
“시간 끈다고 못 칠 공을 칠 수 있을 것 같냐? 얌전히 내 기록의 희생양이 되라고”
동료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자식 홈런 하나 때문에 우리가 타율을 희생해야 하나? 하지만 앞서고 있는 필라델피아 입장에선 6회까지 경기를 끌고 가야 하는 상황, 선수들은 적극적인 타격으로 게임을 풀어냈다.
따악~!!
“그렇지!! 잘 하고 있어!!”
그런데 생각보다 공격이 너무 잘되면서 2회 말 현재 스코어는 3대 0, 비도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다시 중단된 경기, 1시간을 기다렸지만 결국 우천 취소로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필라델피아 역사상 개막전이 우천 취소 된 건 1931년 이후 처음, 어떻게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나.
반 년 동안 개막전을 기다렸던 이인영은 허탈함을 애써 다스리며 내일을 기약했다.
“이인영 선수, 오늘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셨는데 너무 아쉽게 됐네요.”
“하아~ 네… 체력은 100%인데 멘탈이 1%까지 떨어졌네요.”
한국 기자들 앞에서 슈퍼스타는 씁쓸한 심정을 드러냈다.
비에 홈런을 뺏긴 건 프로 경력 8년 만에 처음, 원래 필라델피아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지만 이렇게 단 시간에 많은 양이 쏟아진 건 드문 일이다.
별로 뛴 것도 없으니 체력은 멀쩡했지만 극도의 분노가 허무함으로 바뀌면서 어깨가 축 처졌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인영 선수가 전에 그러셨잖아요.”
“뭐가요?”
“나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난다고요, 중요한 건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닐까요?”
“그걸 여기서 이렇게 써먹으시네요.”
슈퍼스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승자박이라더니 내가 딱 그 꼴,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 경기에서 멀티 홈런으로 만회하겠다고 공언했다.
‘누구 마음대로?’
이 소식을 접한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발끈했다.
개막전 첫 타석에서 홈런 쳤다고 우릴 만만하게 보는 건가. 더블헤더 1차전 선발로 나서게 된 개리 하딩은 빈볼로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봐 그러지 말라고, 그런 비겁한 행동은 내가 용서 못 해.”
하지만 지미 멘더슨은 하딩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았다.
분하면 삼진을 잡을 것이지 빈볼을 던져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지난 3년 동안 사구를 58개나 맞은 베테랑은 특히 빈볼에 민감했다.
작년 시즌에도 빈볼에는 배트 투척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내 팀 선수가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두고 볼 건가.
하지만 이 발언은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의 심리적 반발로 이어졌다.
‘도대체 누구 편이야?’
‘정정당당한 거 좋아하시네.’
같은 팀인데 하딩의 편을 들어주면 안 되나?
그리고 승부에서 약간의 기 싸움은 필요한 법, 멘더슨의 통제를 벗어난 선수들은 예정대로 빈볼을 계획했다.
사건이 터지면 뛰쳐나갈 선수들도 미리 모집, 그렇게 더블헤더 1차전의 날이 밝았다.
1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마운드에 오른 개리 하딩은 선두 타자 조시 빌라를 땅볼 처리했다.
타석에는 이제 이인영, 그런데 초구부터 심상치 않은 공이 들어왔다.
‘이것 봐라?’
명백히 빈볼을 노린 공, 이인영은 투수와 팽팽한 눈싸움을 벌였다.
“이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경기를 하다보면 벌어지는 일이니까.”
이때, 포수마스크를 쓴 로더릭 파머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이제 보니 다들 한 통속, 고개를 끄덕인 이인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잡았다.
[따악~!!]
“타격!! 아아~!! 이게 뭔가요?!! 개리 패딩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총알 같은 타구가 그대로 투수를 직격!!… 아… 정적이 흐르는 그라운드입니다.”
“이건 정말 심각해 보이는데요. 어서 의료진이 투입돼야 할 것 같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 팀이 급하게 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개리 해딩, 반면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Yeah, what ever you say there, shit happen"
= 그래,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X 같은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지.
세인트루이스의 1루수 조나단은 이 말을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이 타구에 맞고 의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냉혹한 말을 할 수 있나.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이 빈볼을 획책한 건 사실, 상상을 초월하는 악독함에 조나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 저 자식 노리고 친 거 같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지… ”
사태가 수습된 후, 조나단은 동료들과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저 자식이 투수를 노리고 타구를 날렸다는 것, 이인영 바로 옆에 있었던 조나단의 증언이라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거 무서워서 공 던지겠어?’
개리 해딩의 최후를 눈앞에서 본 투수들은 감히 몸 쪽 공을 던지지 못했다.
다들 미친 놈은 피해가자는 분위기, 하지만 이인영은 타격 범위에 들어오는 공을 놓치지 않았다.
[따아악~!!]
“밀어낸 타구가!! 좌측!! 높은 곳으로~~!! 담장을 넘어갑니다!! 어제와 똑같은 방향!! 기어이 시즌 1호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스코어 3대 0!! 필라델피아가 추가점을 올립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표정 변화가 없네요. 지켜보는 저희도 이런데… 상대하는 선수들은 어떻겠습니까?”
이인호 위원은 이런 저런 말을 하는 박한우 위원 옆에서 침묵을 지켰다.
내가 낳은 녀석이지만 지금은 섬뜩함을 느낄 정도, 유유히 그라운드를 도는 아들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