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Shit happen (3)
[미국, 신종 독감 감염자 350만 명 넘어]
[사망자 통계도 의미 없는 수준]
2027시즌 시범경기를 앞두고 미국 일대는 패닉에 빠졌다.
매년 2만여 명이 독감으로 사망하는 미국,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 폐렴을 동반한 바이러스성 독감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 지난 10말 월부터 시작된 소란이지만 미국 주정부는 단순한 감기로 오판했다가 일을 크게 키우고 말았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상점이 강도에게 털리는 전쟁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야구인가.
시범경기는 취소됐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시즌 개막을 5월로 미룰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봉삭감 불가피할 듯]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각 구단은 개막이 미뤄지면 연봉을 삭감한다는 지침을 발표, 미국 4대 스포츠 중 노조가 가정 활성화 된 MLB에서 이건 선수협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2월입니다. 연봉 삭감을 논하는 건 시기에 맞지 않습니다.”
선수협 회장 조니 데이비스는 각 구단의 행보에 격렬히 반대했다.
시즌이 4월에 개막될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연봉삭감을 발표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 하지만 구단도 선수들이 너무 자기들 이익만 추구한다며 반발했다.
“연봉을 깎는 건 상관없지만 그게 구단 주머니로 들어가는 건 반대다.”
이때 이인영이 목소리를 냈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총 연봉 액은 대략 43억 달러, 그 중 10%를 깎는다면 무려 4억 3천만 달러다. 이 정도면 역병에 시달리는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기여가 되겠지.
팬들 없이 어떻게 야구가 돌아갈 수 있겠나. 연봉을 깎는 건 찬성하지만 그건 지역 사회에 기부될 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선수들이 희생하는 만큼 구단도 희생해야 한다. 연봉을 깎겠다면 그만큼 지역사회에 투자해라.”
구단 관계자들 입을 다물게 하는 소신 발언, 여기에 다른 종목의 스타 선수들도 기부를 자처하고 나섰다.
“나도 연봉 10% 깎겠다.”
필라델피아 스틸러스의 쿼터백 에릭 존스도 기부를 자처했다.
작년 시즌 연봉은 대략 2300만 달러, 이 중 230만 달러를 자진 삭감했다. 때맞춰 날아든 친구의 지원 사격, 탄력을 받은 이인영은 스타 선수들의 기부를 촉구했다.
“팬들 다 죽으면 스포츠고 지랄이고 없다. 4대 스포츠의 2027시즌이 공란으로 남길 원하는가? 일단 팬들부터 살리자. 연봉문제는 그 다음에 논 할 일이다.”
선수협과 구단의 갈등을 봉합하는 발언,
이때부터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부행렬에 동참, 한 달 만에 기부총액은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각 구단은 주정부에 협력해 지역사회 안정에 총력을 다했다.
[무능한 시장보다 젊은 선수 한 명이 낫다.]
이때부터 이인영은 팬들에게 Mayer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각 주정부가 몇 달을 걸려도 해결을 못했던 문제, 그런데 유명 스포츠 스타의 발언으로 묶여 있던 끈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나.
하지만 이인영은 주정부도 나름 애를 쓰고 있다며 겸손한 발언을 했다.
“선수들이 10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주정부의 협조 없이 제대로 된 방역이 될까요? 문제가 일어났을 때 상대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건 쉬운 일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비난보다는 응원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주정부에 대한 비난도 시들해졌다.
작년 시즌 누구보다 악독한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가 단숨에 영웅으로 떠오른 사건, 여론은 어느 쪽이 당신의 진짜 모습이냐고 물었지만 이인영은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시즌이 개막할 때까지 몸을 만들고 연습을 할 뿐,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유명인사가 됐는데 지금 기분이 어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개인 트레이너의 농담에 슈퍼스타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2년 차 시즌을 대비해 열심히 몸을 만들고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는데 이게 뭔가. 역병이 앗아간 내 소중한 2027시즌, 가능하다면 배트로 바이러스를 패버리고 싶었다.
힘은 넘쳐나는데 쓸데없으니 어쩌겠나. 오전 훈련은 끝났지만 밤에도 야외 구장에서 배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분은 지금 다크 히어로의 배팅을 보고 계십니다.”
트레이너는 이 장면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시즌이 개막됐다면 벌써 팬들에게 선보였을 파워배팅, 작년 시즌은 컨택에 집중했지만 이인영은 올 시즌부터 파워배팅을 예고했다.
한 눈에 봐도 작년보다 좋아진 몸에 쭉쭉 뻗어나가는 비거리, 필라델피아 지역 팬들은 빌어먹을 바이러스가 위대한 선수의 시즌을 망치고 있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그 뜻이 하늘에 닿았는지 독감은 4월 중순부터 꺾이기 시작했고, 메이저리그 구단은 5월 2일을 개막전으로 잡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 이른 상황, 사무국은 당분간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르고 독감이 완전 진압되면 그때부터 입장을 허용하겠다는 지침을 밝혔다.
“이제는 괜찮다고!!”
“어서 들여보내 줘!!”
드디어 돌아온 그라운드, 이인영은 출근 첫날부터 팬들의 아우성과 마주했다.
조금 가라앉았다고 가드를 내린 사람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걸 왜 모르는가. 선수 전용 주차장을 거쳐 클럽하우스에 입성했다.
“여 ~ 유명인사”
먼저 와 있던 휴 스트러프가 인사를 건넸다.
작년 시즌 반년을 함께 보냈으니 별로 반가울 것도 없는 얼굴, 하지만 시즌이 반년이나 늦춰진 탓일까. 반갑지 않은 얼굴도 나름 봐줄만 했다.
“그런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뭐가?”
“난 연봉 250만 달러 기부했다고, 그런데 왜 80만 달러만 기부한 네가 인기를 독차지 하는 거야?”
스트러프는 첫 만남부터 거한 인사를 날렸다.
내가 기부를 3배나 더 많이 했는데, 왜 이 자식이 필라델피아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건가.
불공평하다며 불만을 표했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불만이면 계약서 교환할까? 내가 연봉 2500만 달러를 받고 네가 800만 달러를 받는 거야.”
작년 시즌, 이인영은 말 그대로 대히트를 쳤다.
연봉은 800만 달러짜리지만 활약상은 3000만 달러 이상, 반면 휴 스트러프는 연봉에 걸맞지 않은 활약을 했다.
12승을 거뒀지만 200이닝 돌파에 실패, 뭣보다 평균자책점은 4.22로 데뷔 이래 최악을 기록했다.
이제는 에이스라고 불러주기에도 민망한 수준, 스트러프는 대악당의 혀놀림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독설은 여전하구나?”
“당연하지, 나하고 계약서 바꾸기 싫으면 올 시즌 알아서 잘 해.”
독설을 날린 이인영은 거의 5개월 만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팬들이 없으니 뭔가 허전한 느낌, 반만 채워진 그림을 보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렇게 경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겼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7시즌, 필라델피아와 세인트루이스의 개막전이 드디어 시작됐습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이인호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메이저리그 개막이 한 달 넘게 미뤄졌지만 결국 개막이 됐는데요. 이게 이인영 선수의 활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언제나 잘 해왔던 선수입니다. 대략 20경기 정도 손해를 보게 됐지만 그래도 40홈런은 넘기지 않을까 ··· 예측을 해봅니다.”
“이인영 선수가 작년에 158경기를 뛰면서 32홈런을 쳤는데, 오히려 홈런이 늘어날 거라 예상하시는 겁니까?”
“당연합니다. 40홈런 이하는 제 기대에 어긋나는 활약입니다.”
“하하 ~ 그렇습니까? 이인호 위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캐스터의 발언에 이인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친아버지인 나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뒷북을 치면 어쩌라는 건가. 그렇다고 50홈런은 칠거라고 말하는 건 무리수, 현실적인 수치를 잡았다.
“저는 25홈런이나 28홈런 사이에 머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타일이 홈런 스윙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면 나름 제 역할을 해 줬다고 볼 수 있겠죠.”
“두 위원님의 예측이 엇갈리는군요. 그 해답은 이인영 선수의 오늘 활약에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겠죠. 시청자 여러분들도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1회 초, 원정 팀 세인트루이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하늘을 수놓은 비행기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도 사라진 반쪽자리 개막전,
대기 타석에 선 지미 멘더슨은 텅 빈 외야를 멍하니 바라봤다.
벌써 12년 차에 접어든 커리어, 당연히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팬들이 사라져 버렸다. 베테랑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배경, 홈런을 쳐도 환호해 줄 팬이 없다는 게 이렇게 공허할 줄이야.
팬들이 없으면 스포츠고 지랄이고 없다는 어느 2년 차 선수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자,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지미 멘더슨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322 - 홈런 29개 - 91타점, MVP 투표 2위에 오르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제 35살이죠. 특히 작년 시즌 후반기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올 시즌도 MVP 급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멘더슨은 2구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타구는 우익수 글러브에 들어갔다.
작년 후반기부터 확실히 떨어진 장타력, 근육량은 MVP를 수상한 2024시즌과 비교해 별 다를 게 없다.
문제는 유연성, 멘더슨은 본래 80kg의 호리호리한 몸매의 선수였다. 한계를 느끼고 체중을 92kg까지 불려 장타력을 겸비한 선수가 됐지만, 원래 힘이 떨어지는 선수라 몸을 회전시키는 탄력으로 파워를 끌어냈다.
그것도 이제는 옛말,
나이가 들다 보니 근육량을 유지해도 유연성이 받쳐주질 못하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당신도 나이 앞에선 어쩔 수 없군.’
이인영은 씁쓸한 얼굴로 공을 내야로 전달했다.
작년 시즌, 멘더슨은 전반기까지 타율 0.374, 20홈런을 넘기면서 이인영보다 한 수 앞선 실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게 끝, 목표로 삼았던 선수가 내리막길을 걷자 슈퍼 루키의 목표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밀워키에 살찐 선수가 한 명 있지만 타격 외엔 볼 게 없는 반쪽짜리, 멘더슨의 몰락은 메이저리그 도전기의 재미를 반감시켜 버렸다.
‘이대로 무너지진 말라고, 앞에 달리고 있는 놈이 있어야 나도 자극을 받으니까.’
멘더슨에 이어 후속타자까지 범타 처리 되면서 세인트루이스의 1회 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의 조용한 반격이 시작됐다.
따악 ~ !!
작년 시즌 막판에 놀라운 스퍼트를 보여준 조시 빌라는 첫 타석부터 외야로 타구를 날렸다.
좌중간을 시원하게 가르는 장타, 노 아웃 주자 2루가 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선취 득점 기회를 잡았다.
“자!! 필라델피아 팬들이 인정한 명예시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366, 홈런 32개, 104타점!! 한국 야구 역사에 자랑이 될 시즌을 보냈습니다!!”
“시장 취임식 치고 너무 초라하네요. 관객도 없으니 흥이 나질 않습니다.”
초구는 바깥쪽 빠른 볼,
작년 시즌 리그 정상급의 타율과 쓸 만한 장타력을 보여준 선수에게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정면승부를 걸지 못했다.
“이거 대접이 왜 이래?!!”
“이 봐!! 상대를 보라고!! 볼넷으로 거르면 넌 죄를 짓는 거야!!”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마운드 위의 제이미 카터를 압박했다.
지금 이 장면은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생중계되고 있다. 오프 시즌을 달궜던 다크 히어로를 볼넷으로 거르면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서 도망치면 넌 팬들에게 죄를 짓는 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팬들이 없어서 다 들리는 상대 팀 선수들의 야유, 약간 욱한 제이미 카터는 도발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