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shit happen (1)
‘나도 구경 좀 해 보자.’
시즌 일정을 마친 이인영은 필라델피아 스틸러스의 홈구장 베이커 볼 파크를 찾았다.
야구 인기도 대단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는 미식축구, 9월 중순부터 시즌이 시작되면 도시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썩인다.
이곳까지 왔는데 미국의 축제이자 상징을 안 보고 간다는 건 손해, 1년을 달군 슈퍼스타의 등장에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Look, this is a XXXXXXXX great yellow funk!! How did you get here?!!"
= 봐!! 여기 끝내주는 노랭이 친구가 있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한 팬의 외침에 이인영은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동양인에게 노랭이라고 말하는 건 욕이지만 이 도시에선 같은 인종끼리 깜둥이, 노랭이 하는 건 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에 대한 친분을 과시하는 행위, 이인영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했고 자리에 앉은 채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No 7!! Wide Receiver Frank Thomas!!"
“와아아~!!”
시간이 되자 호명을 받은 주전 선수들이 하나 둘 필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메이저리그 구장과는 비교가 안 되는 팬들의 열기, 올 시즌 나름 유명세를 떨쳤지만 이인영은 이곳에선 한 명의 팬에 불과했다.
관중 입장으로 경기를 보는 건 색다른 경험, 다른 팬들처럼 환호성을 치고 박수를 치며 이 순간을 즐겼다.
“이 봐 들었어?”
“뭐가?”
“지금 관중석에 그 친구가 와 있다는데.”
그 시각, 필라델피아 스틸러스 구단 관계자는 관중석에 이인영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올 시즌 필라델피아 팬들에게 1년 동안 즐거움을 준 선수, 어떻게 서비스를 베풀까 하다가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여러분 미리 축하해 주십시오!! 올 시즌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할!! 그 끝내주는 녀석이 이곳에 왔습니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전광판에 이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혀 예상도 못한 이벤트, 필라델피아 스틸러스 선수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나는 안 보이는데? 도대체 어디야?”
필라델피아 스틸러스의 쿼터 백, 에릭 존스도 초대 손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관중석에 드러난 얼굴 뿐, 한참을 헤매다 겨우 눈이 마주쳤다.
“나도 그 친구처럼 팬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사실 이인영은 에릭 존스의 트위터를 보고 이곳을 방문했다.
필라델피아 스틸러스 팬들도 극성으로 유명하다. 팀이 잘 안 나갈 때는 우리 팀 선수라도 용서 없고, 심지어 실수를 한 선수에게 네 가족이 다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한 사건도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존스는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고 팬들과 멀어진 적도 있다. 사인 거부는 기본이고 지난 2024년, 뉴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선 자신에게 깜둥이라는 욕설을 한 백인 팬에게 공을 집어던졌다가 출장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팀을 대표하는 쿼터백으로서 언제까지 팬들과 적대할 순 없는 노릇, 올 시즌 필라델피아 팬들에게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은 그 친구라면 뭔가 조언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이인영이 트위터에 남긴 조언은 간단했다.
[필라델피아 팬들은 쓰레기야. 그러니까 너도 쓰레기가 되라고, 같은 부류가 된다면 욕을 들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될 거야]
대놓고 필라델피아 팬을 쓰레기로 폄하한 슈퍼루키, 하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욕을 달지 않았다.
팬들은 쓰레기가 맞고 이인영은 거기에 잘 어울렸을 뿐, 다만 에릭 존스는 워낙 민감한 성격이라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깜둥이 주제에 쿼터백이 웬 말이야?!!”
“주제를 알라고!!”
에릭 존스는 NFL 역사상 역대 18번째로 흑인 쿼터백이 됐다.
쿼터백은 팀의 전술에 따라 공을 배급하는 야전사령관, 그만큼 필드를 보는 시야와 판단력이 중요하다.
여기에 백인특유의 우월주의가 적용되면서 쿼터백은 백인이 봐야 한다는 인식이 2000년대 초반까지 자리를 잡은 것도 사실, 지금은 흑은 쿼터백이 당연한 시대가 됐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은 에릭 존스가 조금만 못해도 깜둥이라며 비난을 퍼붓는다.
에릭 존스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
하지만 이곳에서 벌써 8년을 보냈고, 2024 시즌에는 슈퍼 볼 우승도 경험했다. 팬들에 대한 애정은 없지만 팀에 대한 애정은 있는, 필라델피아 팬들은 원래 쓰레기니까 너도 쓰레기가 되라는 조언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잡아!! 넘어 뜨리라고!! 살인 태클을 날려!!”
10대 13으로 뒤지는 필라델피아의 공격,
이인영은 미식축구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지만 아무 소리나 질러댔다.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게 관중의 특권 아닌가.
나는 돈을 내고 쓰레기 짓을 하러 왔을 뿐, 경기가 점점 과열되면서 수위도 점 점 높아졌다.
“와아아~!!!”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졌다.
시카고 카우보이즈의 리시버 조 브라운이 필라델피아의 오펜시브 태클에 걸려 부상을 당한 것, 의료진이 즉시 투입될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고 양 팀 선수들은 서로 몸을 맞부딪치며 신경전을 벌였다.
“Shit happen!!"
= X같은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거야!!
이때 이인영은 목소리를 높이며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미식축구는 원래 저렇게 과격하게 하는 거 아닌가. 태클 하나에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카우보이즈 선수들, 슈퍼 루키 근처에 있던 관중들도 ‘shit happen!!'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뛰라고 검둥이!!”
다시 재개된 경기, 동료들이 길을 터주자 에릭 존스는 직접 공을 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허를 찔린 카우보이즈 선수들은 존스를 막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들었지만 주력에서 당할 자가 없는 존스를 따라잡지 못했다.
무려 97야드를 전진해 터치 다운, 1990년, 필라델피아의 쿼터 백 앨런 크레인이 세운 92야드 전진 기록을 36년 만에 갈아 치워버렸다.
에릭 존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33야드에서 차는 플레이스킥마저 성공, 한 번에 7점을 수확하면서 필라델피아는 17대 13으로 앞서나갔다.
“에릭 존스가 다시 달립니다!! 30야드!! 35야드!! 40야드!! 터치다운!! 혼자서 두 번 터치다운을 기록합니다!! 스코어는 이제 26대 13!! 오늘 혼자서 150야드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오늘이 역대 최고의 플레이 아닌가요?!! 이제 이 선수를 B급으로 취급하는 건 그만둬야겠습니다!!”
에릭 존스는 경기 막판에 다시 터치다운을 성공시켰다.
A급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했는데, 오늘 경기만 따지고 보면 리그 1순위 쿼터백, 에릭 존스는 평소 얼씬 거리지도 않던 관중석에 뛰어들어 환호를 유도했다.
8년 만에 겨우 가까이 다다갈 수 있게 된 팬들, 그렇게 생애 최고의 하루를 보낸 에릭 존스는 아나운서의 인터뷰에 응했다.
“에릭, 오늘 활약은 정말 눈이 부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스틸러스의 쿼터백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죠?!!”
“저는 8년 전부터 이 팀의 쿼터백이었습니다. 슈퍼볼 우승도 한 번 했죠. 제가 아니면 누가 쿼터백을 하겠습니까?”
평소와 달리 자신감에 한껏 들 뜬 목소리, 하지만 팬들은 야유를 보냈다.
4년 전에 우승한 걸 아직도 우려먹은 건가. 하지만 에릭 존스는 쓰레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라는 한 루키의 조언을 떠올렸다.
“에릭, 오늘도 팬들은 당신에게 야유를 퍼붓는 군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 때처럼 관중석에 볼을 던져버리고 싶나요?”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쓰레기들은 쓰레기일 뿐인 걸요. 저런 헛소리에 집중하면 경기를 더 못하게 됩니다. 건방진 것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죠.”
약이 오른 팬들은 더욱 큰 야유를 보냈다.
우릴 무시하지 말라는 제스처, 하지만 그 한 가운데 선 이인영은 박수를 치며 존스의 성장을 축하해줬다.
이후 두 선수는 라커룸에서 정식으로 악수를 나눴고 에릭 존스는 응원을 해 준 친구에게 경의를 표했다.
“난 솔직히 네가 이렇게 와 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나도 그래, 평생 이런 데는 안 올 줄 알았거든, 좋은 경험이었어.”
이인영도 에릭 존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뭐 같은 도시에서 뭐 같은 팬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하나. 두 선수는 금방 의기투합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기죽지 마. 인생을 살다 보면 X같은 일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런 것도 꿋꿋이 이겨내는 게 스타의 숙명 아니겠어?”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우린 뭔가 통하는 게 있어.”
에릭 존스는 친구의 앞날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했다.
그리고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이인영의 내셔널리그 MVP 수상도 미리 축하해줬다.
“이러다 수상 못하면 나만 민망해지는 거 아냐?”
“걱정하지마. 그런 X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네가 아니면 어떤 자식이 받겠어?”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어쨌든 올 시즌 우승 하라고.”
두 선수는 유니폼과 사인 볼을 교환했다.
조만간 함께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자는 약속도 했고,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가 지나갔다.
* * *
[2026 시즌 NL MVP, 밀워키의 찰리 해리슨이 수상]
시간은 흘러 11월 15일, MVP 투표 결과가 공개됐다.
찰리 해리슨은 1위 표 15장, 세인트루이스의 지미 멘더슨이 8장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이인영은 1위 표를 1장 받았을 뿐, 2위 표만 12장을 받아 전체 투펴 3위에 머물렀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라델피아 지역 신문은 투표 결과에 이의를 표했다.
올 시즌 46홈런 122타점을 올린 찰리 해리슨이 유력한 MVP 후보였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인영이 멘더슨보다 못한 투표를 받은 건 명백한 차별이라고 비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인영은 올 시즌 fWAR에서 무려 8.1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전체 2위 기록, NL MVP를 수상한 해리슨의 4.9보다 무려 2.2나 수치를 기록했다.
투표 2위에 오른 지미 멘더슨의 fWAR는 4.1, 그런데 왜 이 선수가 1위표를 1장 밖에 못 받은 건가.
익명을 요구한 어느 기자는 황당한 고백을 했다.
“너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안 찍었다.”
눈에 띄어도 정도가 있지 1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들었다 놨다한 사건의 장본인, 표를 얻으려고 발악하는 것처럼 보여 일부러 안 찍었다는 주장을 내놨다.
사방에서 쏟아진 비난, 필라델피아 팬들은 뭐 이런 정신 나간 자식이 있냐며 반발했지만 이인영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아직 그라운드에서 보여줄 게 많은 선수입니다. 그 정도 활약으로 MVP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뭔가 아쉬울 텐데요?”
“뭐… 인생을 살다보면 X같은 일은 언제나 일어나니까요. 그러려니 해야겠지요.”
방송 진행을 맡은 샘 라이슨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MVP는 놓쳤지만 신인왕, 골드 글러브, 실버 슬러거까지 차지한 슈퍼 루키, 올해도 대단했는데 앞으로도 더 보여줄 게 많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