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맞느니 때린다 (2)
[순위경쟁, 끝까지 간다]
이제 정말 막바지에 접어든 시즌, 다른 팀들이 가을 야구를 위해 마지막 스퍼트를 끌어올리는 사이 필라델피아는 16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9월 25일 워싱턴과의 3연전 첫 경기에서 4대 1로 승리하며 시즌 전적 80승 77패를 기록했지만 와일드카드 2위를 달리고 있는 밀워키가 피츠버그를 잡아내면서 남은 경기를 모두 잡아내도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더 아쉬운 건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고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는 거다.
시즌 중반에 당한 7연패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와이즈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멍청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올해는 성공적인 시즌이었습니다.”
“뭐가 성공적이라는 거죠?”
“우리는 작년에 144경기 만에 포스트 시즌 탈락을 확정지었습니다. 올해는 157경기 만에 포스트 시즌에서 탈락했으니, 나름 성공적인 시즌 아니었나요?”
기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감독이라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인가. 하지만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완전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챈스 플루머 - 3년 5천만 달러 계약]
[웬델 핸드릭스 - 2년 2400만 달러 계약]
[데이비드 파킨 - 5년 1억 1천만 달러 계약]
2년 전, 필라델피아는 설욕을 위해 FA 투자에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챈스 플루머는 무릎 인대 부상으로 7경기 출장에 그치며 6월 이후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웬델 핸드릭스는 약물 검사에 걸려 50경기 출장정지 처분, 선발진의 한 축을 책임져줘야 할 데이비드 파킨도 어깨 부상으로 무너졌다.
울어봤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결국 필라델피아는 139경기 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 탈락이라는 굴욕을 맛봤다.
그러다 작년 시즌은 144경기 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 탈락, 올해는 157경기까지 순위경쟁 싸움을 벌였다.
점점 포스트 시즌에 가까워지고 있는 분위기, 거기다 5할 승률도 넘겼으니 그리 비관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감독님이 탈락의 충격 때문에 잠시 헛소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인영은 감독의 발언에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에 어느 팀이 포스트시즌 탈락을 그런 식으로 자위하나, 필라델피아는 16년 연속 실패를 반복했을 뿐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필라델피아는 지금까지 10369승 11585패를 기록했습니다. 승리보다 패배가 1216패가 더 많죠. 팀 역사가 유구해서 그렇다고요? X 같은 소리죠. 다른 10000패 팀을 찾아보세요.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나요?”
역사 자체가 패배의 연속
심지어 승패의 격차는 2019년부터 계속 벌어지고 있다. 2019년 때는 승패 격차가 - 1178이었는데 7년 만에 -1216으로 더 벌어진 것, 언제까지 이런 굴욕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건가.
이인영은 내가 여기에 온 이상 그딴 굴욕은 다신 반복할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제가 유니폼을 벗는 그날까지 승률과 패배를 동률로 맞춰놓겠습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겠다면 하는 겁니다.”
기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매 시즌 100승을 거둔다고 해도 -1216을 극복하려면 3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선수는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내일 경기를 잡는 것부터 집중했다.
* * *
“자, 워싱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벤 슬로우리, 올 시즌 타율 0.245, 홈런 12개, 46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팀 통산 승률 5할까지 갈 길이 멉니다. 남은 5경기 무조건 잡아내야겠죠.”
9월 26일, 필라델피아는 홈구장 TNT 파크에서 시리즈 2차전을 맞이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은 실패했지만 슈퍼 루키가 팀 승률 5할이라는 거시적인 목표를 세우면서, 필라델피아 팬들도 사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남은 5경기 잡고 85승 77패로 시즌 마무리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필라델피아가 5할 승률 이상으로 시즌을 마무리 한 건 2022년이 마지막, 선발로 나선 휴 스트러프도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삼진을 당한 슬로우리는 더그아웃으로 가지 않고 주심에게 몇 마디를 던졌다.
타격 준비 과정에서 투구가 됐다는 것, 휴 스트러프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따졌다.
“네가 꾸물거리는 거야 멍청아!!”
사무국은 경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투수의 인터벌에 간섭하는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시간을 끄는 타자의 행동이다.
장갑 고쳐 끼고, 헬멧 벗었다가 다시 쓰고, 타석에서 벗어났다가 들어오고, 타자가 이런 행동을 하면 루틴이고 투수가 공을 길게 가지고 있으면 주의를 받아야 하는 건가.
문제를 인지한 사무국은 12초 룰을 3년 전부터 11초 룰로 바꿨다.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타격은 무작정 공을 치는 게 아니다.”
물론 타자들은 격한 불만을 쏟아냈다.
실제로 경기 시간이 단축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4분 정도 늘어났다는 분석도 있는데, 11초 룰이 적용되면서 투수의 인터벌도 짧아졌다.
양쪽 모두에게 불만이 있는 룰, 시즌 초부터 말이 많더니 올 시즌도 이 문제 때문에 벤치 클리어링이 몇 번 일어났다.
“그만하라고, 저 친구도 공을 빨리 던져야 하니까 그런 거잖아.”
주심은 슬로우리를 다독여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두 선수는 3회 초 맞대결에서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고,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 몸에 맞았군요. 지금도 뭔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저도 남자지만 수컷들은 사소한 거 가지고 잘 싸웁니다. 원래 그런 생물이에요. 이해해야 합니다.”
슬로우리는 1루로 향하면서 스트러프를 비웃었다.
날 맞추려고 한 것 같은데, 네 91마일짜리 느린 공을 맞아봤자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 발끈한 스트러프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지 않은 불길, 양 팀 선수들이 스트러프와 슬로우리를 떼어놓으면서 그냥저냥 수습이 됐다.
‘뭐가 이렇게 싱거워?’
외야에서 문제의 현장으로 달려가던 이인영은 뒷걸음질을 쳤다.
화끈하게 붙었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텐데, 굳이 힘을 빼며 저곳까지 달려갈 가치를 못 느꼈다.
기가 빠진 건 팬들도 마찬가지, 다들 슬로우리에게 야유를 퍼붓긴 했지만 목소리엔 혼이 실리지 않았다.
“더 크게 외쳐 봐!! 맥주 파는 아저씨 목소리가 더 크겠다!!”
제 자리로 돌아간 이인영은 관중을 자극했다
외야에 서 있다 보면 관중석을 누비는 가판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관중들의 목소리는 그것보다 못한 수준, 슈퍼 루키의 도발에 필라델피아 극성팬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1년 만에 이곳의 룰을 완전히 이해한 건방진 신예, 하지만 팬들은 그게 싫지 않았다.
따악~!!
“와아아아~!!”
그렇게 경기는 흘러 5회 말 3대 1로 앞선 필라델피아의 공격, 선두 타자 휴 스트러프가 안타를 때려내며 출루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55(90타수 23안타), 어지간한 하위 타선보다 나은 배팅 실력에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자, 이제 조시 빌라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 하지만 3회 말에서 1루 주자를 2루로 보내는 팀 배팅으로 득점에 기여했습니다.”
“어제 시즌 22홈런으로 결승 타점을 올렸거든요. 이인영 선수 앞에 득점권 기회를 차려주는 것도 좋겠지만, 본인이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높이 솟아올랐다.
홈런을 예감한 조시 빌라는 배트를 던졌고, 홈런이 확정되는 순간 TNT 파크는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오늘도 이기면 시즌 승률 5할 확정, 다른 팀들에겐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에겐 대사건이었다.
‘또 빌어먹을 배트 플립’
홈런을 허용한 후안 사무엘은 인상을 구겼다.
어제도 하더니 오늘도 반복된 세리머니, 사무국에서도 배트 플립을 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이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후안 사무엘도 그 중 한 명,
다음 타석에서 빈볼로 갚아주고 싶었지만 투수코치가 올라오면서 마운드를 내려가야 했다.
‘어째 분위기가 … ’
한편, 3루 코칭 박스에 앉아 있던 필라델피아 릭 버드 코치는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마운드에 오른 제레미 마타는 빈볼 논란으로 말이 많은 선수다.
본인이 빈볼 투구를 자처할 만큼 싸움 실력에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2년 전에도 상대 선수의 무릎에 99마일 빠른 볼을 던져 병원 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조시 빌라의 배트 플립도 있고 어째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일단 지켜봤다.
‘날 맞추고 싶냐?’
초구는 몸 쪽 깊숙한 95마일 빠른 볼, 하지만 이인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다음 공에 집중했다.
“오우~ 다시 몸 쪽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 뭔가 냄새가 나거든요? 아 … 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네요.”
마타의 투구를 지켜보던 필라델피아 릭 버드 코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봐도 빈볼을 노리는 투구, 여기에 워싱턴 1루 코치가 뭐가 문제냐고 고함을 치면서 다시 한 번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필라델피아 팬들도 한 목소리로 야유를 퍼붓는 상황, 주심은 양 팀 코치를 모두 퇴장조치하고 마타에게도 경고를 줬다.
그리고 경기재개, 서로 노려보던 두 선수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잡았다.
‘어디 맞기만 해 봐라.’
조시 빌라는 벤치에서 살기등등한 눈빛을 드러냈다.
따지고 보면 내 배트 플립이 원인,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벤클이 벌어지면 나도 적극 개입할 생각, 뭣보다 이인영이 제레미 마타를 1대 1로 상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딱~!
이번에도 몸 쪽 깊숙한 공,
평소라면 절대 칠 공이 아니지만 슈퍼 루키는 타격을 했다. 벤클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나.
그것도 현명한 방법, 필라델피아의 피터 와이즈 감독은 이대로 일이 끝나는 줄 알았다.
‘훗~ 싱겁기는’
1루수가 타구를 잡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제레미 마타는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맞추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대로 아웃카운트가 올라간다면 내 승리겠지, 하지만 방심한 사이 목덜미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슈퍼 루키가 달려오는 반동을 이용해 마타의 목에 팔꿈치 어택을 날려버린 것, 제대로 당한 마타는 바닥에 처 박혔고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그래!! 피의 축제를 벌여보자!! 다 덤벼!!”
마타를 보내버린 이인영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워싱턴 선수들과 무쌍난무를 벌였다.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힘으로 밀어냈고, 뒤이어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난투극이 시작됐다.
“이리 와 이 XX야!! 너 오늘 죽었어!!”
돌격대장을 자처한 이인영은 워싱턴의 2루수 슬로우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내야 밖으로 끌어냈다.
오늘 슬로우리와 부딪쳤던 스트러프도 여기에 합류하려 했지만, 구타를 당하는 슬로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드는 워싱턴 선수들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와아아아~!!”
“죽여라!! 죽여!!”
광분한 몇 몇 팬들까지 그라운드에 난입, 구단 경비원들도 그라운드로 출동하면서 피의 축제는 더욱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