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65화 (165/309)

165화. 제대로 붙었다 (13)

“한국 야구의 수준을 다시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덧 8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메이저리그 시즌, MLB 채널 진행을 맡고 있는 두안 넬슨은 방송 중 개인적인 소감을 밝혔다.

올 시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얼굴을 꼽았다.

파로 필라델피아의 이인영, 이 친구는 분명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을 하는 입장 아닌가. 하지만 지금 흐름을 보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이 선수에게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두안 넬슨은 이인영의 한국 시절 성적과 지금 성적을 비교 했다.

“보세요. 이 선수는 한국에서 6년 동안 타율 0.383, 출루율 0.468, 장타율 0.712를 기록했습니다.”

“무시무시하네요. 그렇다면 올 시즌 메이저리그 성적은 어떻죠?”

“타율 0.368, 출루율 0.430, 장타율 0.581입니다. 장타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내셔널리그 전체 4위죠. 거기다 OPS가 1이 넘는 7명 중 한 명입니다.”

일본에서 4~ 50홈런을 치던 선수도 메이저리그에 오면 똑딱이나 중장거리포로 바뀌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NPB보다 한 단계 아래로 평가되는 KBO 홈런왕이 이런 활약을 해도 되는 걸까.

두엔 넬슨은 MLB의 수준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KBO의 수준이 올라간 건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이 선수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데뷔 시즌에 수위 타자와 최다안타 그리고 신인왕, 리그 MVP를 동시에 석권한 선수는 1973년, 보스턴의 론 프리젤 이후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선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잠깐만요. 지금 리그 MVP 수상이라고 하셨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이 선수의 성적을 보세요. 타율 0.368, 홈런 20개, 67타점, 출루율 0.430, 장타율 0.581, 이대로 간다면 MVP를 수상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요?”

두안 넬슨은 이 자리에서 이인영을 극찬했다.

낮은 타율과 한 방에 의존하는 타자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이 정도 고타율과 장타력, 출루율을 겸비한 선수가 또 있을까.

하지만 칭찬한 거리는 아직도 많았다.

“우리는 보통 중견수에게 높은 점수를 주죠. 타구를 처리할 기회가 우익수나 중견수보다 많으니까요. 하지만 우익수는 어느 포지션보다 송구에러의 부담이 높습니다.”

중견수가 송구를 할 때는 내야수와 투수, 포수가 모두 백업을 들어가기 때문에 송구 에러가 나올 확률이 드물다.

하지만 우익수는 아니다. 2루나 3루 또는 홈으로 다이렉트 송구를 하기 때문에 어깨도 강해야 하지만 송구가 정확해야 한다.

송구가 빗나가면 바로 추가 진루, 그렇다면 올 시즌 이인영은 우익수 자리에서 얼마나 좋은 수비능력을 보여줬을까.

이인영은 올 시즌 7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동안 송구 에러는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표본이 적다? 세부 지표를 들여다보면 가치는 확실히 드러났다.

“이것 보세요. 올 시즌 추가진루 억제율을 기록한 표입니다.”

“오~ 1위군요?”

“그렇습니다. 추가진루 억제율은 야수의 송구능력 때문에 주자가 추가 진루를 포기한 확률을 의미하죠. 이 선수는 무려 48%의 억제율을 기록했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메이저리그 정상급의 진루억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어깨만 강한 게 아니라 수비 범위도 수준급, 이 정도면 만능이라고 봐도 좋은 거 아닌가.

MVP를 못 받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 두안 넬슨은 올 시즌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넘어온 이 젊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 * *

“이거 봤어?”

“뭐?”

“너 욕하는 기사.”

샬롯으로 향하는 필라델피아 선수단의 전용기 안, 이인영은 올 시즌 자신의 귀와 입이 되어줄 통역관 제임스 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올 시즌 활약만으로 이 선수의 가치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 두안 넬슨처럼 슈퍼 루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기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괜찮아. 기자들이 다 그렇지 뭐.”

“정말 그래? 나라면 괜히 신경 쓰일 텐데.”

이 양반은 도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피식 웃던 초신성은 솔직한 소감을 드러냈다.

“형, 내가 메이저리그 진출할 때 뭐가 제일 두려웠는지 알아?”

“뭔데?”

“혹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두려웠어.”

솔직히 이인영도 자신의 성공을 낙관하진 않았다.

나를 믿어도 부족한데 오히려 의심을 하고 있었다니, 내가 그곳에서도 3할을 칠 수 있을까? 30홈런은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치는 얼마나 될까.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어떤가. 3할 6푼이 넘는 타율에 32홈런 페이스를 달리고 있다.

내가 진짜 싸워야 했던 상대는 메이저리그의 수준급 선수들이 아니라, 나 자신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떨쳐냈다.

여기서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니 자신 있게 플레이를 할 뿐, 더글러스 공항에 도착한 선수단은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여기에도 있어?’

이인영은 숙소 앞에 진을 친 팬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곳은 원래 갱들이 득실대는 촌 동네였지만 2009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졌고 지금은 고층빌딩이 늘어선 도시로 발전했다.

2년 전만 해도 야구팀은 뉴욕의 산하 더블 A 샬럿 나이츠 밖에 없었지만, 인디애나 램페이저스(Rampager)가 이곳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NBA, NFL, MLB, 스포츠 팀도 나름 구색을 갖췄다.

그래도 아직 야구가 자리를 잡으려면 갈 길이 먼 도시, 팬들이 내미는 사인 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여기 야구 인기 많나요?”

“아니요. 내일 관중석 보면 절반은 비어있을 거예요.”

사인을 하던 이인영은 팬의 솔직한 답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야구 인기도 없는 곳에서 내게 사인 볼을 권하다니, 영광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생각보다 훨씬 예의 바르시네요?”

“그래요?”

“네, TV에서 봤을 때는 뭐랄까 자신감이 넘치고 강한 인상이었거든요.”

“밉상이라는 말을 너무 좋게 표현하시네요.”

별 것도 아닌데 피식 웃는 남자, 사인 볼을 받은 팬은 내일 좋은 경기 기대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야, 넌 그런 짓 안 어울려.”

“닥쳐.”

팬들에겐 친절하지만 동료들에겐 얄짤 없는 루키, 욕을 얻어먹은 조시 빌라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한테는 왜 그렇게 까칠한 거냐?”

“바보가 이런 대우 받는 건 당연하지.”

“내가 바보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지난 7월 26일, 조시 빌라는 2루 커버를 들어오면서 송구를 빠트렸다.

기록은 우익수 송구 에러가 됐는데 솔직히 그 정도는 잡아줬어야 했다. 그 송구만 막았어도 추가 진루와 실점은 되지 않았을 텐데, 지나간 일이지만 속은 쓰렸다.

“그건 네가 송구를 잘못한 거야. 왜 나한테 책임을 떠넘겨?”

“알았어. 네 수비 범위가 그 정도로 좁을 줄 예상 못한 내가 바보지. 앞으로 너한테는 절대 송구 안 할 거야.”

조시 빌라는 마음대로 하라며 뒤끝 더러운 루키를 따라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시 빌라도 속이 쓰린 건 사실, 말은 저렇게 해도 상황이 되면 또 송구를 할 자식이다.

실책을 줄여야 팀도 반등하겠지, 다음 날 경기도 송진이 잔뜩 뭍은 헬멧을 쓰고 타석에 섰다.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조시 빌라, 올 시즌 타율 0.241, 홈런 13개, 31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홈런 페이스는 전성기 시절로 돌아왔는데 역시 타율이 문제네요. 아무리 못해도 2할 7푼 이상은 쳐줬던 선수인데 말이죠.”

“제가 볼 때는 기술적인 문제보다 심리적인 압박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조시 빌라는 홈런 스윙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2루타를 노리고 스윙을 하는데, 땅볼 타구가 장타가 될 확률은 대략 5%에 불과하다.

득점 생산력이 삼진 < 땅볼 < 플라이 볼 < 드라이브 타구라는 걸 고려하면 조시 빌라는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좌중간을 노린다.

물론 그걸 그냥 지켜볼 야수들은 없다.

3루 쪽으로 조금 더 깊숙한 수비를 하는 유격수, 좌중간을 노리는 타자는 더욱 깊은 타구를 날려야 한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거기다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투수들의 구위, 조시 빌라는 요즘 자신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만큼 결과가 따라 주질 않으니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이런 날이 계속되면 내 손으로 은퇴를 하는 게 아닌지, 솔직히 불안했다.

‘그렇다고 땅볼 안타를 치는 게 내가 할 일인가?’

하지만 변화를 택하지는 않았다.

야구 선수는 개인 기록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든 팀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해야 한다.

시즌 전체를 봤을 때, 내가 유격수 쪽 깊은 땅볼을 때리는 게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거기다 조시 빌라는 발도 빠른 편이 아니라 1루를 밟아도 팀이 득점을 하려면 후속타자의 장타가 필요했다.

‘그냥 2루타 치자’

결국 내린 답은 이거였다.

타율이 바닥을 긴다? 출루율이 떨어져?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건가?

시프트의 목적 자체가 장타를 억제하기 위한 거다.

시프트를 깨겠다고 유격수 깊은 땅볼을 날린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 뿐, 올 시즌 22홈런 페이스를 달리고 있는 내가 타율 때문에 땅볼을 쳐야 하나.

100삼진을 당하든 병살타를 치든 내가 할 일을 할 뿐, 조시 빌라는 빠른 볼을 잡아당겼다.

[딱~!]

“아…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군요. 조시 빌라의 첫 타석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제가 딱히 KBO 리그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빠른 공을 몸 쪽으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KBO에 거의 없거든요. 바깥쪽으로 던지는 공도 워낙 무브먼트가 좋고 빠르기 때문에 밀어치기가 쉽지 않죠.”

“이런 투수들을 상대로 3할 6푼 이상을 치고 있는 이인영 선수가 대단한 거죠. 반짝이다 뭐다 이런 의견이 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이라도 이런 타율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조시 빌라의 타격을 지켜본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타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안타? 홈런? 볼넷?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타구를 파울 라인 안쪽으로 보내는 것, 솔직히 한국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더 어렵다.

주자가 3루에 있으면 유격수 깊은 쪽으로 땅볼을 치면 된다고?

그런데 그게 안 된다. 방망이에 맞추는 건 둘 째 치고 삼진을 안 당하는 게 어려운 일, 그래도 해야 했다.

‘평소대로 하자. 평소대로’

이인영은 별 생각 없이 자세를 잡았다.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는 게 내 스타일 아니었나. 한국을 떠날 때도 일단 부딪쳐 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맞붙은 세계 최고의 무대,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따악~!!]

“타격!!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안타!! 이 안타로 17경기 연속 안타 행진도 이어갑니다!!”

“정말 저는 대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주전 자리만 차지해도 대단한 건데, 메이저리그에서 수위타자를 달리고 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뭐든 부딪쳐 보는 성격이었습니다. 태권도 학원은 보낼 생각도 없었는데, 본인이 가겠다고 졸라서 보낸 적도 있고요.”

“하하~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네,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해본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제가 1년 만에 야구로 갈아타게 했지만요.”

“지금은 갈아타면 큰일 납니다. 마지막까지 버텨야죠.”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슈퍼루키는 메이저리그에 착실히 적응해 나갔다.

이제 막 시작된 도전, 겁 없는 신인의 전진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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