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제대로 붙었다 (12)
[이인영, NL 우익수 부문 올스타 1위 확정]
[한국인 선수로 2001년 이후 첫 출장]
6월 말에 접어든 시즌, 한국 여론은 올스타 투표 결과에 열광했다.
한국인 선수로는 15년 만의 올스타전 출전, 그것도 팬 투표는 역대 처음이다. 메이저리그에 뛰어도 주전급에 쓸 만한 선수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한국인 기자들은 물론 현지 기자들도 올스타전 출장을 두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인영 선수, 필라델피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올스타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리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네요.”
팀에 올스타 급 선수가 나 밖에 없다는 건 좀 슬픈 일, 이때 한 기자가 방향을 슬쩍 틀었다.
“지미 멘더슨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당신이 세인트루이스의 선수가 되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이죠.”
지미 멘더슨은 성운 라이온즈에서 잠시 뛰었던 제임스 맥그로브의 친구다.
맥그로브가 멘더슨과의 친분을 앞세우기에 네가 유명해져야지 친구의 명성을 앞세워 뭘 어쩌겠다는 거냐는 말을 한 기억도 있는데, 어쨌든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다.
그런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슈퍼 루키는 평소처럼 톡톡 튀는 반응을 내놨다.
“웃기고 있네. X 까라고 하십시오.”
살벌한 욕설에 기자들은 흠칫했다.
그냥 같은 팀 선수가 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흥분한 건가.
이인영은 나름대로 입장을 내놨다.
“멘더슨은 세인트루이스의 터줏대감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그곳에서 뛰었고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죠. 제가 그곳에 간다면 2인자 노릇 밖에 더 하겠습니까? 멘더슨에게 전해주세요. 넌 날 품을만한 선수가 못된다고 말이죠. 어디서 건방지게 절 2인자로 깔고 가겠다는 겁니까?”
그제야 기자들은 폭소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2인자 노릇을 하느니 필라델피아의 1인자로 살겠다는 거 아닌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 그럼 당신을 품을 만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있느냐고 물었다.
“단언하건데 절 품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일인자가 좋습니다. 제가 다른 선수를 품을지언정, 다른 선수의 밑으로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내셔널리그 올스타 1위에 오른 선수의 자신감인가. 어쨌든 실력은 확실한 선수, 그렇게 이인영은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자, 오늘 시카고 세이버스는 브라이언 모텔로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6경기 등판, 1승 5패, 평균자책점 3.24, 97이닝 동안 볼넷 26개, 탈삼진은 101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은 말 그대로 최악입니다. 최근 9경기 연속 퀄리트 스타트를 기록하고도 승리가 없어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뭐 어쨌든 저희는 이인영 선수의 필라델피아를 응원할 뿐이죠.”
시카고 팬들은 고독한 에이스에게 응원과 환호를 보냈다.
타자들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모텔로에게 연봉을 내놔야 한다.
최근 9경기에서 지원받은 득점은 겨우 12점, 시즌 초반에 당한 부상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팀의 현실이 모텔로를 힘들게 했다.
시카고 팬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최근엔 그냥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은 계속됐다.
‘투구 폼은 꽤 역동적이네.’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모텔로의 투구를 지켜봤다.
낮은 쓰리쿼터에 높은 레그 킥 그리고 긴 스트라이드를 활용하는 역동적인 투구 폼,
특유의 투구 폼 덕분에 빠른 볼에 역회전이 걸리면서 우타자 몸 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경우가 종 종 있다.
우타자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수준급, 하지만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체인지업을 잘 쓰면서 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좌타자 극복은 통산 64승을 거둔 투수에게도 극복해야 할 숙제, 일단 우타 조시 빌라는 가볍게 2루 땅볼로 처리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70 - 홈런 17개 - 59타점, 메이저리그 타율 전체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는 스윙을 조금 간결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빠른 볼을 던질 거란 말이죠.”
박한우 위원은 나름대로 모텔로 공략법을 제시했다.
긴 스윙으로 배트 컨트롤을 하면서 타율을 높이는 스윙을 하고 있는 양아들, 평균 95마일이나 되는 모텔로의 빠른 볼에 대응하려면 조금 간결하게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예상대로 초구는 빠른 볼, 짧게 돌아 나왔지만 파울이 됐다.
‘마음에 들었어.’
이인영은 모텔로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임자를 만났다고 해야 하나, 짧게 치는 스윙에서 다시 긴 스윙으로 장비를 바꿨다.
‘안 나와?’
체인지업을 던진 모텔로는 살짝 긴장했다.
우타자를 상대할 때도 잘 던지지만, 체인지업은 좌타자 대응 최종병기, 처음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지난 2024 시즌 때는 선수들이 뽑인 체인지업 4위에 뽑힐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공이 안 먹힌다는 건 조금 의외, 3구 빠른 볼은 스트라이크 존 높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은 볼이었지만 괜찮은 공이죠.”
“모텔로 선수는 승부를 피하는 유형은 아닙니다.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 받는 2024 시즌 때 228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은 49개 밖에 주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그해 홈런을 36개나 허용을 했습니다. 그만큼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는 뜻인데, 이런 스타일 때문인지 이닝 당 출루율은 1.01이었는데도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했습니다.”
“올해도 비슷합니다. 이닝 당 출루율은 1.10, 평균자책점은 3.25니까요. 다만 승운이 너무 없습니다.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요.”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이 타구는 우측으로 낮고 빠른 궤적을 그립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시즌 18호 홈런입니다!!”
“지금도 빠른 볼인데 약간 몰렸죠!! 호쾌한 스윙이었습니다!!”
“방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어떻습니까?!! 이인영 선수가 홈런을 쳤는데요!!”
훈훈한 한국 중계석과 달리 브라이언 모텔로는 글러브에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타선을 생각하면 한 점도 내줘선 안 됐는데 오늘 경기도 패배할 분위기,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지 않은가.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너희 타선도 그렇지만 우리 타선도 답이 없구나.’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이인영의 홈런 외엔 득점 길을 내지 못했다.
팀 내 3할 타자는 나뿐, 그나마 홈런은 어느 정도 쳐주고 있지만 뚝뚝 끊어지는 공격 흐름 때문에 경기 당 득점은 NL 전체 11위다.
홈런도 못 치는 시카고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지만 정말 눈물 나는 양 팀의 공격력, 어쨌든 모텔로가 좋은 공을 던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첫 타석은 홈런을 때렸지만 3회 초 두 번째 타석은 체인지업에 타이밍을 빼앗기면서 2루 땅볼, 이인영과 모텔로는 6회 초 공격에서 3번 째 맞대결을 벌였다.
“초구, 볼입니다. 역시 빠지는 볼에는 거의 반응을 하지 않고 있어요.”
“이인영 선수가 지금까지 287타석을 소화했는데요. 내야 뜬 공이 8개 밖에 안 됩니다. 2.78%밖에 안 되는 비율이거든요. 참고로 리그 평균 내야 뜬공 비율이 10.7%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얼마나 양질의 타구를 날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수치죠.”
“이러니까 투수들이 머리에 쥐가 나는 거죠. 리그 최고 수준의 컨택 능력에 장타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히 빠른 볼을 잘 칩니다.”
“올 시즌 빠른 볼 타율이 0.424에요. 변화구 타율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고 변화구 타율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죠. 3할 3푼 9리나 되니까요.”
시카고 배터리는 빠른 볼을 스트라이크 존에 넣길 주저했다.
올 시즌 이인영은 빠른 볼을 가장 잘 치는 선수, 저렇게 긴 스윙을 하는데 어떻게 빠른 볼에 대응을 하는 걸까.
밀어 쳐도 쭉 뻗어 나가는 타구, 그래도 모텔로는 도망은 치지 않았다.
따악~!!
“젠장!!”
회심의 빠른 볼이었는데 또 공략,
모텔로는 안타를 예감했지만 다행히 좌익수 크리스 스나이더가 펜스에 몸을 부딪치는 호수비로 막아냈다.
막았지만 찝찝한 타구, 이날 모텔로는 7이닝 동안 피안타 3개, 볼넷 1개, 탈삼진 9개를 잡아내는 완벽투를 선보였다.
하지만 불펜진의 방화, 뒤늦게 터진 필라델피아 타선 때문에 시즌 6패를 적립, 끝을 모르는 연패 행진은 계속됐다.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어쨌든 세부 지표만 따지면 올스타에 출전할 자격이 있는 선수,
모텔로는 최종투표를 거쳐 NL 올스타 팀에 합류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전반기에 1승만 거둔 선발투수가 올스타 게임에 합류하는 건 이번이 처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다행히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서 2승을 거뒀고, 모텔로는 올스타전이 열리는 미네소타로 향했다.
“이게 누구야, 1승 투수잖아?”
그건 이인영도 마찬가지, 눈치 없는 슈퍼 루키는 배려 없는 농담으로 명품 투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얼마 전에 2승 했거든?”
“1승이나 2승이나 그게 그거지. 안 그래?”
열은 받는데 할 말은 없는 상황, 동병상련이라고 했는가.
약 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두 선수는 픽 업 트럭에 오르기 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너 얼마 전 인터뷰에서 남의 밑으로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며?”
“그렇지. 그런데 왜?”
“내가 충고하는데 필라델피아 같은 팀에 머물러 봤자 희망 없어. 남의 밑에 들어가더라도 승리하는 팀의 일원이 되는 게 낫지.”
“그럼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던가.”
모텔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한테 지금 필라델피아로 오라고 하는 건가. 그런 쓰레기 팀에서 무슨 대업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네 밑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거니와 필라델피아로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단언했다.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어?”
“뭐라고?”
“어차피 프로는 돈 아냐? 필라델피아가 돈 많이 주면 오는 거 아니냐?”
모텔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저리그 5년차에 접어든 내가 루키 아래로 들어가라는 건가. 만약이지만 내가 정말 필라델피아로 간다고 쳐도, 너는 내 아래에서 놀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됐고, 난 누구 밑에서 놀 사람이 아니야.”
“그럼 우리가 같은 유니폼을 입을 일은 없겠네?”
“그렇겠지. 앞으로 자주 보자고, 적과 적으로 말이야. 마지막에 누가 웃는지 두고 보자고.”
“얼마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텔로는 살짝 긴장했다.
겨우 3타석 상대해 봤지만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선수라는 건 분명, 마침 픽 업 트럭이 도착했고 이인영을 태운 차가 먼저 앞서갔다.
“여러분!! 뒤에서 2승 투수가 올 겁니다!! 불운한 선수에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여기서도 계속되는 도발,
뒤 따라오던 모텔로는 발끈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에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