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제대로 붙었다 (11)
“어때, 자신 있어?”
“글쎄.”
이곳은 애틀랜타 시호크스의 클럽하우스, 선발투수로 나설 스캇 에인호프는 파트터 조 콜먼과 심각한 대화를 나눴다.
어제 벤 콕스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봤지 않나.
아시아에서 건너온 타자가 이 정도 타격을 보여주다니, 첫 두 달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던 선수들도 한껏 경계심을 드러냈다.
에인호프는 빠른 볼 평균 구속이 92마일 정도로 평범하다.
다만 우타자 몸 쪽으로 꺾이는 투심과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를 던지며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능력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다.
거기다 애틀랜타의 내야 수비진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에인호프의 투구 스타일과 비교적 잘 맞아 떨어진다.
문제는 타자를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
올 시즌은 작년에 비해 9이닝 당 피홈런이 0.95에서 0.7개로 줄어들었지만 탈삼진율은 7.9에서 7.1으로 떨어졌다.
장타력은 억제했지만 구위 문제는 여전하다는 것, 평균자책점도 3.10을 기록했던 작년에 비해 3.44로 높아졌다.
투수왕국 애틀랜타를 지탱하는 제구의 마술사지만 떨어지는 구위 때문에 기복이 약간 있다는 게 문제, 어떻게 해야 그 슈퍼 루키를 막아낼 수 있을까.
에인호프는 커브 비율을 높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어, 한국에는 나처럼 커브를 던지는 선수가 없을 걸?”
에인호프는 똑같은 그립에서 두 가지 커브를 던진다.
보통 커브는 중지와 검지를 공의 실밥과 약간 어긋나게 잡지만, 에인호프는 중지로만 공을 잡고 구부린 검지를 이용해 커브를 제어한다.
어떨 때는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어떤 때는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가는데, KBO에는 이 정도 컨트롤을 구사하는 선수가 없다.
당연한 게, 한국 투수들은 손목을 이용해 커브를 던진다.
그립과 팔각도로 변화구 궤적을 만들어 내는 메이저리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 이런 차이 때문인지 한국 선수들의 커브 발사 각도는 MLB 투수들에 비해 2도 정도 높다고 알려져 있다.
커브의 릴리스 각도가 3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헛스윙률은 4%대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1도만 낮춰도 헛스윙률은 10%까지 올라간다.
거기다 MLB는 커브를 던질 때 패스트볼과 최대한 비슷한 메커니즘을 유지하기 때문에 구별하기도 쉽지 않은 편, 최근 MLB 투수들은 슬라이더를 선호하기 때문에 커브를 제대로 던지는 투수가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커브를 완벽히 구사할 줄 아는 에인호프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투수, 한국에서 건너온 슈퍼 루키는 내 커브를 칠 수 있을까.
만약 쳐 낸다면 오늘 나는 일찍 문 닫고 들어가야겠지, 에인호프는 커브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역시 별 차이가 없어.’
한편, 이인영도 비디오 분석실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KBO에서는 빠른 볼과 커브를 던질 때 차이가 명확한 선수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에인호프는 그게 아니다. 투구 폼도 일정하고 뭣보다 커브의 구속과 제구를 조절할 수 있는 선수, 이런 선수가 강속구까지 갖췄다면 메이저리그를 평정하지 않았을까.
다만 높은 피안타율은 단점, 작년 시즌에도 199이닝을 소화하며 187안타를 허용했다. 낮은 볼넷 허용으로 커버하고 있지만 어쨌든 컨택은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 분석을 마치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여기 팬들은 원래 조용해요?”
“뭐가요?”
“아니, 너무 조용한 거 같아서요.”
1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근처에 있는 팬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경기에서 슈퍼 루키는 애틀랜타 팬의 심기를 제대로 자극했다.
홈런 후 타구 감상에 배트 투척 그리고 벤치 클리어링, 벤 콕스의 팬티를 벗겨버렸다는 무례한 인터뷰도 했는데 이곳 팬들은 어제도 오늘도 너무 조용하다.
필라델피아와는 정반대의 성향, 잠시 생각을 정리한 팬은 나름대로 답을 내놨다.
“저희는 매너가 있는 팬이요. 누구와는 다르게.”
“필라델피아 인간들은 시끄럽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렇죠. 응원과 깽판은 엄연히 다른 거니까요.”
이인영은 피식 웃었다.
건방지고 무례한 당신과 달리 우리는 품위를 지키겠다 이건가. 그럴수록 더 자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마지막까지 그렇게 얌전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며 도발했다.
그 사이 조시 빌라는 우익수 플라이 아웃, 무례하고 건방진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67 - 홈런 14개 - 54타점, 타격 지표 전 부문에서 팀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어제 경기에서는 한 경기 멀티 홈런도 기록했죠. 좋은 감각을 오늘도 이어가길 바랍니다.”
사인 교환을 마친 에인호프는 자세를 잡았다.
예정대로 초구는 커브,
떨어지는 각은 약간 덜하지만 일반적인 커브에 비해 좀 더 빠르고 카운트 잡기 유리한 구종, 예상은 했지만 낮게 떨어지는 공이라 방망이가 나오질 않았다.
“Strike!!”
“That's right(그래, 맞았어)"
주심은 곁눈질로 타자를 살폈다.
자기가 뭔데 채점을 하는 건가. 그런데 당신이 잘못 봤다고 따지는 게 아니라 인정을 했다는 게 약간 웃겼다.
“Ball~ "
"That's not right(그건 아니고)“
계속 되는 장난질, 지금 이 자식은 진지하게 할 생각이 있는 건가. 어제 이인영에게 된통 당한 조 콜먼 포수는 심리전을 걸었다.
“너 이걸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응.”
“그런데 왜 안 쳤어? 어제처럼 담장 밖으로 날려버리지?”
“칠 공은 내가 정하지 네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던 조 콜먼은 슬쩍 제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타자가 말을 거는 척 하면서 내 위치를 살펴본 기분이랄까. 반칙 아닌 반칙, 그리고 그 명분을 준 건 바로 나 아닌가. 쓸데없는 심리전은 하지 않았다.
‘내가 얼른 쳐줬으면 좋겠지? 아니야, 기다릴 거야.’
잔머리를 굴린 이인영은 차분하게 3구를 기다렸다.
KBO에서는 볼을 골라내는 능력을 선구안이라고 여기는데, 여기서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내가 칠 수 있는 공을 골라내는 게 선구안, 배드 볼 히터라고 선구안이 나쁘다는 평가를 내리는 건 성급하다.
실제로 적극적으로 치는 선수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MLB, 강속구 투수가 급증하면서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선수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에인호프는 그런 유행을 거스르는 선수, 그리고 내가 빠른 타격을 하길 바라고 있을 거다.
누구 좋으라고 그 흐름에 맞춰주나. 볼을 보면서 탐색전을 벌였다.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역시 여우는 여우에요. 투수가 정면 승부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간파한 것 같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장타도 그럭저럭 쳐주고 있지만 현지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게 선구안과 정확도에요. 에인호프 선수가 구속은 느려도 정면승부를 피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철저하게 제구를 앞세우고 있잖습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쫄았다는 건가요?”
“으하하~ 예, 그렇겠네요.”
카운트가 몰리자 에인호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게 볼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전혀 반응이 없는 타자, 또 도망치면 나는 담력 싸움에서 패배하는 건가.
계속 커브를 던지는 건 좀 그렇고, 투심을 밀어 넣었다.
따악~!!
“엇?!”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배트, 좌중간에 떨어진 안타를 확인한 이인영은 1루 코치와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약 오르지?’
아까 우리는 너와 다르다는 말을 했던 관중에게도 혀를 비쭉 내밀었다. 매너 있게 대해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인간, 그래도 화를 내는데 익숙하지 않은 애틀랜타 팬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것도 쳐?’
경기는 어느덧 3회 초, 마음을 다잡은 에인호프는 건방진 루키와 두 번째 맞대결을 벌였다.
가끔 릴리스 포인트의 차이로 구종을 읽는 타자는 있지만, 구속까지 읽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빠른 볼과 느린 커브를 모두 섞어주고 있는데 또 얻어맞은 안타, 혹시 내 커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파트너를 마운드로 불러냈다.
“혹시 내 공에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런데 왜 저 자식은 다 골라내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른 선수들은 다 못 치고 있잖아.”
에인호프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냥 저 자식이 대단한 건가. 안타를 치고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니 더욱 약이 올랐다. 계속 도망치는 제구를 하다 보니 궁지에 몰린 거겠지, 다음 승부에선 반드시 잡아내겠다며 이를 갈았다.
어쨌든 이제 1사에 주자는 1루, 3번 타자 오스틴 카터가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 깊숙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아~ 그대로 홈으로 내달립니다!! 좌익수가 송구하지만 득점!! 이인영 선수가 정신 나간 질주를 보여줍니다!! 스코어 1대 0!!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올립니다!!”
“지금은 타구가 좌측으로 갔기 때문에 홈 승부는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걸… 이명한 캐스터 말대로 정신 나간 질주였습니다.”
홈을 밟은 이인영은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이제는 좀 야유할 마음이 생겼냐는 도발, 하지만 애틀랜타 팬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이인영은 콧방귀를 뀌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갑자기 왜 그만 둔거야?”
“그만 할래. 재미없어.”
무슨 관중들이 이렇게 재미가 없나. 다음 타석부터는 얌전하게 타격만 했다.
이날 양 팀은 서로 9안타 밖에 주고받지 못했고, 오스틴 카터의 득점이 결승타가 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시리즈 2연승을 거뒀다.
카터의 결승타도 훌륭했지만 이인영의 질주가 승패를 가른 경기, 기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질주를 했는지 물었다.
“일단 저는 좌익수 카일 존스의 어깨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그 친구는 송구 정확도도 형편없죠. 타구가 외야로 뻗는 순간 홈까지 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다 생각하고 뛰었다는 겁니까?”
“자세만 봐도 그 선수가 어떤 송구를 할지 대략 감이 옵니다.”
“그럼 에인호프의 커브를 공략한 것도 다 계산된 타격이었나요?”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기자들은 에인호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패전 투수에게 마이크를 내미는 건 실례, 하지만 에인호프는 오늘 6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며 자기 몫을 다 했다.
다만 이인영과 오스틴 카터에게 맞은 연속 안타가 뼈아팠을 뿐, 덤덤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되짚었다.
“솔직히 저는 커브를 던지면 그 선수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받아치더군요. 한국에는 저 같은 투수들이 많은 겁니까?”
“글쎄요. 그것 까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에인호프는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 같은 지구에 소속됐으니 앞으로 자주 만나지 않겠나. 다음 승부에선 내가 이길 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기긴 무슨’
물론 이인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까다롭진 않았던 에인호프, 내 진정한 맞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라이벌을 찾기 위한 행보는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