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제대로 붙었다 (10)
‘드디어 만나는 구나.’
이곳은 애틀랜타의 홈구장 폴턴 스타디움, 경기를 앞두고 닉 카펜터는 전의를 끌어올렸다.
올 시즌을 앞두고 카펜터는 메이저리그 신입과 논쟁을 주고받았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유치한 논쟁,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만 놓고 보면 루키 쪽이 몇 수는 위다.
일단 이인영은 5주 연속 내셔널리그 올스타 부문 우익수 1위를 차지, 타율, 홈런, 타점 모두 카펜터를 앞서고 있다.
하지만 카펜터 입장에선 인정할 수 없는 결과, 시즌이 끝나면 입지는 바뀌어 있을 거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누구였지? 아 … 그 자식?’
반면 이인영은 카펜터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정말 잘하는 선수는 알아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 그리고 정말 못하는 선수도 가끔 여론에 언급이 된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선수는 입에 오르기 어렵다. 메이저리거로서 딱 무난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벌로 쳐줄 가치도 없는 상대라 별 생각 없이 관심 리스트에서 제거했다.
‘내가 관심 있는 선수는 너다.’
이인영은 오늘도 아침 일찍 비디오 분석실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상대할 투수는 애틀랜타의 에이스 벤 콕스, 지난 2020년, 1라운드 7번 픽을 가지고 있던 애틀랜타가 지명한 유망주다.
계약 당시 평균 94마일의 빠른 볼과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지는 완성형 투수로 평가를 받았는데, 명성대로 3년 만에 마이너리그를 졸업하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첫 시즌 11승, 그리고 작년 시즌 14승 4패 평균자책점 2.98을 찍으며 애틀랜타의 에이스로 군림했다.
스트라이크 존 안에 던진 공 비율이 50%에 넘은 만큼 적극적인 투구를 한다는데 정말 구위가 좋은 걸까?
그런데 이인영은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번트 대기 쉽나?’
문제의 장면은 지난 6월 2일 벌어진 애틀랜타와 뉴욕 퀸스의 경기, 1사 주자 3루에서 투수가 번트를 댔다.
대놓고 스퀴즈를 한 것, 벤 콕스의 강점은 좋은 빠른 볼과 옆으로 휘는 투심이다.
그런데 투수가 번트를 댄 공은 위력 없는 체인지업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구위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하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런 투구를 할 수 밖에’
이인영은 전력 분석원이 내 준 자료를 체크했다.
콕스는 올 시즌 스트라이크 존 몸 쪽, 그리고 낮은 코스에 무려 3할 5푼이 넘는 피안타율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바깥쪽으로 던지려고 노력을 하는데 정말 구위가 좋은 투수는 스트라이크 존 하단을 공략하는 투구 패턴을 보인다.
그런데 콕스는 그게 안 되니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투구를 하고 있는 것, 이런 선수를 구위가 좋다고 평가한 스카우터는 제 정신인가.
오히려 내일 등판 할 가능성이 높은 스캇 에인호프가 더 까다로운 유형이다.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넓게 쓸 수 있는 제구와 구위도 괜찮은 편, 일단 오늘은 벤 콕스를 제물로 삼아 폴턴 스타디움을 피바다로 물들이기로 했다.
“어때? 공략할 만 하겠어?”
와이즈 감독은 경기 전, 슈퍼 루키에게 이런 저런 농담을 건넸다.
타율 0.361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 아무리 그래도 벤 콕스는 조금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을까.
돌아온 답은 비웃음이었다.
“공략이요? 그거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내가 무슨 말 실수 했나?”
“두고 보세요. 오늘 제가 스탯쟁이의 팬티를 벗겨버릴 테니까요.”
평균자책점 3.37을 기록하고 있다고 에이스라고 불리다니,
정말 벤 콕스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라고 생각하는 건가. 오늘은 그 민낯을 드러낼 때가 왔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 오늘 애틀랜타는 벤 콕스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12경기 등판, 6승 5패 평균자책점 3.39, 73과 2/3이닝 동안 볼넷 29개, 탈삼진은 66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도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 중 하나죠. 올 시즌은 작년에 비해 살짝 부진하지만 그래도 좋은 투구를 하고 있습니다.”
1회 초, 원정 팀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선두타자는 조시 빌라, 오늘 이인영과 똑같은 자료를 둘러본 빌라는 바깥 쪽 투심을 골라냈다.
빠른 볼 구위가 작년 같지 않으니 투심을 바깥쪽으로 던지고 있는 콕스, 하지만 이런 투구 패턴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똑같은 공인가?’
투심과 포심을 모두 지켜본 빌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구속과 궤적 거의 동일, 투심이 약간 더 휘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이 차이면 굳이 투심을 던질 이유가 없다.
벤 콕스의 문제점은 제구가 아니다.
14승 4패,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한 작년 시즌도 210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은 58개 밖에 주지 않았지만 잘 던지다가도 한 번씩 6~ 7실점으로 무너지는 날이 제법 있었다.
이런 구위로 어떻게 평균자책점 3점대를 기록하고 있는 건지, 일단 3구를 힘껏 휘둘렀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조시 빌라 선수가 안타를 뽑아내는군요.”
“초구 포심, 다시 포심, 그 다음에 커브가 들어갔거든요. 빠른 볼이 받쳐주질 않다보니 커브가 통하질 않는 거죠.”
조시 빌라는 1루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칠 수 있는 공인데 저 자식이 못 치겠나. 특유의 건방진 성격은 마음에 안 들지만 야구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몸 쪽으로 살짝 휘면서 파고드는 궤적, 포심과 다를 게 없는 구속과 무브먼트라 그대로 돌려버렸다.
따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외야로 뻗어나가는 포물선, 타구를 지켜보며 1루로 걸어가던 이인영은 배트를 던져버렸다.
우측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투 런 홈런, 시즌 11호 홈런이 터지면서 필라델피아는 2대 0으로 앞서나갔다.
“X같은 배트 플립!!”
바로 반응을 보이는 벤 콕스, 이인영은 1루를 지나며 콕스와 말싸움을 벌였다.
“뭐 잘났다고 떠들어 이 허접아?”
“뭐라고?!!”
“네가 애틀랜타 에이스라고? 웃기지마!! 오늘 내가 네 팬티까지 벗겨버릴 테니까 망신 한 번 당해보라고!!”
말싸움은 홈플레이트를 밟을 때까지 계속됐다.
양 팀 선수들이 뛰쳐나오면서 벤치 클리어링, 하지만 홈을 밟은 이인영은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우우~ 우~ .”
사방에서 쏟아지는 홈 팬들의 야유, 하지만 슈퍼루키는 중계카메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땅으로 내리 꽂는 기행을 선보였다.
겨우 저 정도 선수가 에이스 노릇을 하다니, 내셔널리그 타자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
투수도 안타를 칠 수 있는 공이라며 더그아웃을 누비고 다녔다.
‘도대체 왜 이러냐 이러지 않았는데’
한편, 벤 콕스는 잔인한 하루를 이어갔다.
시즌 초만 해도 2점대 초반 평균자책점을 유지했는데, 최근 4경기에서 평균자책점 4.56을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역시 빠른 볼, 구속은 작년과 비슷한 94마일 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올 시즌은 타자들이 너무 쉽게 때려내고 있다.
투심과 포심을 섞어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분명한 건 타자들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투심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 마침 조 콜먼 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투심은 안 던지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포심하고 별 차이가 없어. 지금 포심 - 포심 이렇게 되고 있다고.”
파트너의 고백에 벤 콕스는 충격에 빠졌다.
옆으로 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받아내는 입장에선 그게 아니라는 건가. 이때부터 투심은 버리고 포심, 커브 위주로 투구를 이어갔다.
덕분에 약간은 제구가 잡힌 느낌, 하지만 이런 단순한 피칭은 금방 타자 눈에 익숙해 졌다.
[따악~!!]
“다시 한 번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벤슨 선수까지 안타를 기록하는 군요.”
“지금은 투수에게 맞은 안타라 자존심이 더 상하겠네요. 거기다 빗맞은 것도 아니고 정타란 말이죠.”
경기는 어느 덧 3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 선두 타자 벤슨이 안타를 치고 나갔다.
필라델피아는 유독 타격에 재능이 있는 투수들이 많은 편, 그렇다고 쳐도 2할 언저리를 맴도는 수준이다.
2할 타자가 때릴 수 있는 공이라면 지금 구위가 어느 정도인지 말 다한 거 아닌가. 다음 타자 조시 빌라는 초구를 잔뜩 노리고 들어갔다.
따악~!!
“아!! 젠장!!”
마음먹고 당겼는데 너무 떠버린 타구, 배트를 집어던진 조시 빌라는 신경질을 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욕심이 너무 과하면 저렇게 되는 법, 이인영은 차분하게 칠 수 있는 공을 기다렸다.
‘내 팬티를 벗겨버리겠다고? 웃기시네.’
벤 콕스는 팔각도를 바꿔가며 무브먼트에 변화를 줬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중요한 상황이 오면 이렇게 위기를 넘기곤 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주 써먹은 기술, 그런데 의도치 않게 빠른 볼 - 빠른 볼 - 빠른 볼 피칭이 돼 버렸다.
벤 콕스는 최고 96마일 빠른 볼을 던진다고 하는데, 사실 강속구를 던질 때 투구 폼이 로우에서 하이 쓰리쿼터로 올라간다.
변화구가 안 먹히는 투수가 구속만 늘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상대가 강하게 나오자 이인영은 회초리를 바꿨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길게 스윙을 했지만 이번엔 강하고 빠르게 돌아 나오는 스윙, 제대로 걸린 타구는 외야로 쭉 뻗어나갔다.
[따아악~!!]
“자!! 이번에도!! 우측!! 높게~!! 담자~ 앙!!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투런 홈런!!!! 연타석 홈런을 쏘아 올리면서 벤 콕스를 무너뜨립니다!! 스코어 4대 0!! 필라델피아가 한 걸음 더 앞서나갑니다!!”
“그냥 초구에 홈런 맞는 게 나을 뻔했네요. 괜히 공만 더 던지고 한 대 더 맞잖아요.”
TKO 펀치를 맞은 벤 콕스는 이날 3회도 못 채우고 5실점 강판을 당했다. 최근 5경기 평균자책점은 5.34, 일그러진 에이스는 글러브를 집어던지며 화를 뿜어내다 더그아웃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게 말이 돼?’
좌익수를 보고 있던 닉 카펜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
콕스가 최근 부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연타석 홈런을 맞을 선수가 아니다.
말 그대로 충격의 연속, 이 날 이인영은 카펜터 앞에서 4타수 3안타, 2홈런 4타점 경기를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바로 이어지는 인터뷰, 클럽하우스 앞에서 질문과 답이 오갔다.
“오늘 콕스를 말 그대로 농락하셨는데, 어떻게 공략을 하신 겁니까?”
“편안하게 휘둘렀습니다. 오늘 콕스는 구위도 제구도 멘탈도 뭐 하나 타자를 압도하지 못했죠. 투수가 번트를 대는 장면을 봤을 때, 아 … 이 선수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인영은 오늘 비디오 분석실에서 내린 결론을 설명했다.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은 투구, 정말 뛰어난 투수는 그날 구위가 안 먹혀도 어떻게든 경기를 끌고 가는 커맨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벤 콕스는 그 능력이 없었고, 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도 롤러코스터 피칭은 계속 될 거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래서, 콕스의 팬티는 벗긴 겁니까?”
“오늘 저한테 홈런 두 방 맞았으니 살짝 지렸겠죠. 3회에 강판 됐으니 지금쯤 클럽하우스 한편에서 잘 마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괘씸하고 발칙한데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이랄까.
배트 플립도 화끈하고, 뭣보다 말재주가 뛰어나 최근 급격히 관심을 받는 선수, 앞으로 메이저리그를 이끌어 갈 별이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