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제대로 붙었다 (9)
[1964년의 악몽 재현?]
[필라델피아 중부지구 3위로 추락]
6월을 넘어 시즌 중반으로 가고 있는 시즌,
하지만 초반에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준 필라델피아는 바닥 뚫린 배처럼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최근 21경기 성적은 4승 17패, 필라델피아 여론은 1964년에 일어난 악몽을 되새겼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12경기를 놔두고 90승 60패, 리그 2위 신시내티에 7경기 앞선 지구 1위를 유지했다.
어느 팬도 의심하지 않았던 월드시리즈 진출, 하지만 그 기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내리 10연패를 당하며 신시내티와의 경기 차는 1게임으로 좁혀졌고, 그래도 필라델피아 팬들은 설마 하는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그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해냈다.
12연패를 당하며 90승 72패로 시즌을 마감, 1위 자리를 신시내티에 내주고 말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어이가 없는 역전패로 남은 사건, 그 시절의 악명에 비교될 정도로 필라델피아는 끔찍한 6월을 보냈다.
[브런들을 리드오프에서 빼 버려]
[지명할당 처리해라. 아니면 싱글 A로 보내버려]
필라델피아 팬들의 분노는 세스 브런들에게 집중됐다.
조금 잘해주나 했더니 바닥을 찍고 있는 성적, 홈런은 6개를 치고 있지만 타율은 0.217로 멘도사 라인에 걸쳐 있다.
공격은 그렇다고 쳐도 수비 활약은 끔찍함을 넘어 절망적, 43경기를 좌익수로 뛰었는데 UZR 마이너스 7을 찍고 있다.
물론 통계가 그 선수를 평가하는 절대 지표가 될 수는 없지만, 브런들은 지난 6월 7일, 어이없는 2루 송구로 팀의 패배를 자초했다.
팀 내 최고 유망주가 이 지경이라면 지명할당 처리하고 FA로 선수를 영입하는 게 최선, 와이즈 감독의 선수기용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 세스 브런들(7연패 기간 동안 성적)
6월 2일 : 3타수 무안타 1볼넷 1삼진
6월 3일 : 4타수 무안타 2삼진
6월 4일 :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
6월 6일 : 4타수 1안타 1삼진
6월 7일 : 4타수 무안타 2삼진
6월 8일 : 4타수 무안타 2삼진
6월 9일 : 3타수 1안타 1삼진
브런들은 7연패를 당하는 동안 타율은 겨우 0.115, 26타석에서 삼진을 9개나 당했다.
볼넷은 겨우 1개, 이런 선수를 계속 1번에 박아두는 이유가 뭔가.
최근 감이 좋은 스캇 브라운을 상위 타선으로 기용해도 될 텐데 끝까지 브런들을 1번으로 기용하는 바보 감독,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팬들은 당장 그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라며 분노했다.
‘이게 메이저리그 통산 1만 패 팀의 위용인가.’
이인영은 씁쓸한 현실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4~ 5월의 즐거웠던 기억이 악몽이 되는 건 한순간,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팀이 있는 건가.
각 지역으로 원정을 다닌 메뚜기 같은 팬들도 이젠 시들, 역시 메뚜기도 한 철 지나면 끝인가.
그래도 여느 때처럼 출근길에 올랐다.
“나한테도 욕 좀 해 줘!!”
“라이브로 듣고 싶다고!!”
입구부터 정신 사나운 분위기, 분명 여긴 선수 전용 주차장인데 어떻게 들어온 건가. 팀이 연패에 빠졌지만 슈퍼루키의 인기는 여전, 경기 중에도 가운데 손가락 좀 날려달라는 팬들이 있다.
나도 돌아이 기질이 있지만 저 놈들은 그 이상, 슈퍼루키는 모른 척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야!! 이 XX야!! 욕 좀 해라고!!”
“우리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욕 안 한다고 다들 난리, 약간 발끈한 이인영은 그대로 뒤돌아서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아우우~ 아우~!!!”
“XXXX!! All of you도 해줘!!"
개처럼 울부 짓는 팬들, 그렇게 슈퍼스타는 소소한 팬서비스를 마치고 라커룸에 입성했다.
“야, 아직도 주차장에 미친 X들 있냐?”
“어, 욕 좀 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해줬지.”
먼저 와 있던 스캇 브라운 루키의 증언에 한숨을 쉬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지 2년이 됐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고 해야 하나, 미치광이 팬들을 상대하다보니 나도 똑같이 물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나는 여기 팬들 마음에 들어.”
“왜?”
“쓰레기는 마지막까지 쓰레기다워야지. 나중에 착해지는 악당은 별 볼 일 없어.”
하지만 이인영은 이곳 팬들이 싫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악당이 주인공을 만나 개화하는 전개가 있지 않나. 그런데 그건 전개는 정말 잘 써야 한다.
악당은 마지막까지 악당다워야 영화의 질이 사는 법, 어설프게 선역으로 전환되는 시나리오는 관객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해 온 필라델피아 팬들, 이 정도면 모범 악당 아닌가.
어설프게 개화하는 것보다는 한결같은 쓰레기가 나았다.
“안녕?”
마침 라커룸에 입성하는 또 다른 얼굴, 필라델피아 팬들의 공공의 적이 된 세스 브런들 아닌가.
이인영은 아침부터 거한 입담을 날렸다.
“너 방출된 거 아니었냐?”
“뭐? 내가?”
“아까 기사 올라왔던데?”
깜짝 놀란 브런들은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렸다.
놀란 건 산체스도 마찬가지,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그런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XX!! 재미없는 농담은 하지 말라고!!”
장난이라는 걸 안 브런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주차장에서 야유를 들은 탓에 민감해져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악질적인 농담을 하다니, 하지만 슈퍼루키의 얼굴은 평온했다.
“뭘 그렇게 화를 내냐? 네가 지금 3할에 30홈런 치고 있으면 그런 농담에 욱했겠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브런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떳떳하지 못하니 그런 시답잖은 농담에 당황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분위기라 저 친구의 장난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X 같으면 보란 듯이 홈런 치라고, 지금 네가 화를 낼 대상이 팬이냐? 아니면 나야? 네 형편없는 성적을 먼저 생각하라고 그것만 해결되면 아무 문제없으니까.”
여과 장치 없는 폭언에 브런들은 할 말을 잃었다.
화는 나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고 해야 되나, 마침 이때 와이즈 감독이 클럽하우스에 발을 들였다.
“무슨 문제 있나?”
“아 … 아닙니다.”
“그럼 됐네.”
사무실로 들어가는 감독, 브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이 잠깐 보자고 했다면 뜨끔 했을 텐데 오늘 하루 목숨은 부지한 건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인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 거면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게 낫지 않나. 실력 없는 선수는 언제나 불안한 법, 나는 저 꼴 되면 안 되겠다는 각오는 더욱 굳건해 졌다.
* * *
“자, 1회 말 필라델피아의 공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스캇 브라운, 올 시즌 타율 0.277, 홈런 6개, 1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타순이 바뀌네요. 그동안 1번으로 기용됐던 브런들은 9번으로 내려갔습니다.”
“너무 늦었죠. 브런들 선수가 팀 내 최고 유망주라 기회를 줬다, 이런 변명도 있는데 이미 평가는 뒤집어졌단 말입니다. 필라델피아 구단의 고집이 참극을 불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8연패 위기에 몰린 필라델피아의 공격,
팬들의 기대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선 브라운은 초구부터 달려들었다.
최근 메이저리그는 볼넷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유는 대략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투수들의 평균 구속과 무브먼트의 상승 때문이다.
구속과 무브먼트가 상승한 만큼 포수의 부담이 늘어났는데, 실제로 최근 메이저리그는 와일드 피치가 10%나 급증했다.
작년 시즌 폭투 기록은 1847개, 한 경기에 대략 10개 이상이 나왔다는 거다.
포수는 폭투에 대비하기 위해 홈 플레이트 뒤 쪽에 자리를 잡기 시작, 그런데 이걸 상대 팀도 보고 있다는 게 문제다.
‘아까보다 더 뒤로 빠져 있네?’
‘다음 공은 변화구가 들어오겠어.’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간파하는 메이저리그,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포수들은 처음부터 뒤로 빠져 앉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변화구를 던지는 건 비효율적, 자연스럽게 빠른 볼 투구가 작년 대비 9%나 급증했다.
빠른 볼 비율이 늘어났다는 건 투수들이 좀 더 공격적인 투구를 하기 시작했다는 뜻, 브라운이 초구부터 달려든 건 당연했다.
[딱~!]
“이 타구는 유격수 정면!! 잡아서 1루에 송구합니다. 원 아웃, 브라운 선수의 첫 타석은 범타로 종료됩니다.”
“아~ 잘 맞았는데 방향이 좋질 않네요. 필라델피아가 전체적으로 뭔가 꼬여 있는 것 같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있어요.”
“이인영 선수에게 기대를 해보죠. 그나마 필라델피아에서 타자다운 타자니까요.”
브라운의 성급한 타격에 야유를 퍼붓던 홈 팬들은 한 순간에 태도를 바꿨다.
올스타 투표 우익수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의 등장, 필라델피아의 유일한 자존심이라 특별대우를 받았다.
현재 성적은 타율 0.364, 홈런 9개 - 36타점, 27홈런 - 108타점 페이스를 달리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안타 페이스, 지금 이대로라면 252안타까지 칠 수 있는데, 역대 어느 신인 선수도 250안타를 넘긴 적이 없다.
최고 기록은 240개,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것인가.
한국 팬들도 그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딱~!!
“아!!”
초구부터 나갔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가버린 타구, 맞는 순간 아웃을 직감한 이인영은 배트를 허공에 한 바퀴 돌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지금은 초구 타격이 맞는 건데 아웃 됐다고 야유를 보내는 팬들, 그러건 말건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어이!! 어떻게 된 거야?!!”
“너까지 이러면 우린 티켓 값을 지불한 의미가 없다고!!”
7회까지 3타수 무안타, 팬들의 원성은 거세졌지만 슈퍼루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악~!!]
“좌측!! 아!! 다시 유격수 정면!! 2루에 송구 다시 1루에서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 이인영 선수가 4번 째 타석마저 범타로 물러나는 군요.”
“하아~ 오늘은 이상하게 운이 안 따라주네요.”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죠. 오늘 경기 전까지 37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습니다. 기회가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타선은 오늘도 6안타 1득점 빈공에 그쳤고, 팬들은 8연패를 당한 더그아웃에 쌍욕과 야유를 퍼부었다.
한국 팬들 입장에서 뭣보다 아쉬운 건 이인영의 안타 행진이 종료됐다는 것, 한국 기자들은 클럽하우스로 몰려가 소감을 물었다.
“이인영 선수, 오늘 경기는 좀 아쉽게 됐네요.”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저는 제 스윙을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4번 째 타석에서 병살타가 나왔을 때 엄청난 야유를 받으셨는데 팬들에게 서운하진 않으신가요?”
“상관없습니다. 일관성이 있어서 오히려 보기 좋습니다.”
“일관성이라고요?”
“네, 원래 이곳 팬들은 잘 하면 환호하고 못하면 욕하지 않습니까. 37경기 연속 안타도 잘 한 거라고 박수쳤으면 솔직히 서운할 뻔 했습니다. 악당은 마지막까지 악당다워야죠. 한결 같은 쓰레기들이라 마음에 듭니다.”
이 인터뷰는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홈 팬들을 대놓고 쓰레기라고 욕하다니, 필리건을 상대로 이 정도로 당당한 태도를 보인 선수가 있었는가.
루키 주제에 너무 건방져서 꼴 보기 싫다던 팬들도 약간은 긍정적인 반응으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