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제대로 붙었다 (8)
[필라델피아 LA 원정 3연승]
[지난 1996년 이후, 21년 만의 쾌거]
LA 원정을 스윕으로 마무리한 필라델피아는 시애틀로 향했다.
시애틀의 홈구장 마일 하이 스타디움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홈런 이 안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 시애틀 타선의 평균 wRC+가 100이상이었던 시즌은 최근 5년 동안 한 번도 없다.
해안가라 고도가 낮고 소금기가 많은 바람까지 더해져 타구가 잘 안 뻗는 편, 거기다 비가 자주 내리는 기후 때문에 습도도 높아 타구가 안 뻗는다.
말 그대로 타자의 스탯을 깎아먹는 지옥의 구장,
그래도 시애틀은 릭키 존스, 폴 아리아스, 크리리스 폴 등, 우타 거포를 영입해 공격력을 강화했다.
문제는 이 세 선수가 공격도 안 되고 수비까지 엉망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 마일 하이 스타디움은 넓은 외야를 갖춘 만큼 외야수에게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를 요구한다.
그런데 야심차게 영입한 세 거포가 타석에서는 삽질, 외야에서는 개그 쇼를 반복하고 있으니 시애틀 팬들 입장에선 속이 터질 노릇,
그렇게 극과 극의 팀이 마주하게 됐다.
“형은 왜 여기서 빠던 안 해요?”
“그냥 … 그래.”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냥 그렇다고.”
연습 훈련을 앞두고 이인영은 박혁 선배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KBO가 배트 플립에 관대한 것도 있지만, 박혁은 특히 배트 플립을 많이 하던 선수였다.
빠던 장면만 모아 편집한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었을 정도, 하지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시간을 되돌려 지난 2024년 7월, 박혁은 팀이 5대 4로 뒤진 8회 초 공격에서 동점 홈런을 날렸다.
아직 KBO 문화를 벗겨내지 못한 박혁은 타구를 감상하다 배트를 내던졌는데, 세인트루이스 여론이 비난을 퍼부으면서 논란이 됐다.
와이즈 감독은 동점 홈런이었고 선수가 흥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변호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박혁은 오랫동안 하던 습관을 봉인했다.
‘쳐도 기분이 안 나네.’
그래도 솔직히 배트를 마음껏 내던지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안타만 쳐도 배트 플립을 하는데, 여기는 왜 안 된다는 건가. MLB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용납하기 어려운 게 배트 플립, 이인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배트는 치고 부수고 내동댕이치라고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던지면 안 돼요?”
“나도 몰라 인마, 여기 문화가 그렇다잖아.”
“그럼 오늘 제가 그 문화를 한 번 깨 볼게요.”
박혁은 흠칫했다.
LA에서 친 사고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는데 여기서 또 뭔 짓을 할 생각인가.
하지만 마일 하이 스타디움은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치기 가장 어려운 구단 중 하나, 특히 좌타자에게 홈런 치기 어려운 곳이라 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세스 브런들, 올 시즌 타율 0.263, 홈런 2개, 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좀 터져야 할 텐데 말이죠. 오스틴 카터도 그렇고, 필라델피아가 유독 타자 유망주가 안 터지고 있습니다.”
세스 브런들은 필라델피아가 애지중지하는 유망주,
지난 2021년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구단의 지명됐지만 대학 진출을 두고 고민하다 7월에야 계약을 했다.
입단 첫해에 루키 리그에서 상위 싱글 A까지 승격, 다음 해 더블 A에서는 2루타 40개, 홈런 28개를 때려내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다 다음 시즌은 39홈런을 치면서 필라델피아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 신기록을 새로 썼고, 2년 전부터 꾸준하게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메이저리그 기록이 신통치 않다는 것, 2024 시즌 113경기나 출장했지만 홈런은 11개에 그쳤다.
작년 시즌 기록은 93경기 출장 6홈런, 부상도 있었지만 필라델피아 구단이 기대했던 장타력이 실종됐다.
이러니 필라델피아가 한국의 젊은 거포에게 관심을 줬던 것, 거기다 이인영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면서 출장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절박한 입장, 브런들은 여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했다.
따아악~!!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할 수 있는 타구, 멀어지는 포물선을 느긋이 감상하던 브런들은 배트를 집어던졌다.
홈런을 허용한 제프리 프레슬리는 다음에 두고 보자는 눈빛, 그러건 말건 브런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이인영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나도 홈런 치고 배트 날릴 거야.”
“얼마든지.”
포수가 듣고 있는데도 농담을 주고받는 두 선수, 타석에 들어선 슈퍼루키는 초구를 잔뜩 노렸다.
딱~!
“아!! 젠장!!”
타구를 확인한 이인영은 배트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홈런은커녕 우익수가 앞으로 달려 나와 잡은 타구, 사방에서 동료들의 조롱이 날아들었다.
“야, 너 홈런 친다며?”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쓸모없는 배트 때문이라고.”
이인영은 모든 책임을 배트에 돌렸다.
나는 올바른 스윙을 했는데 빌어먹을 배트가 제 역할을 못했을 뿐, 배트 보이가 수거한 물건을 더그아웃에 전달했지만, 주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치워.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정말 필요 없어?”
“어, 그런 건방진 배트 따윈.”
어떤 선수들은 장비를 애지중지하는데 다 그렇지는 않다.
지금 필라델피아의 2루수를 보고 있는 조시 빌라는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경기에 나설 때 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글러브를 끼고 외야로 나간다.
눈에 띄게 더러워지면 한 번 털어주는 정도, 이걸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장비 관리는 선수의 심리, 이미지와 관계가 있다.
유명한 선수라면 특별한 장비 관리 비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안 해도 야구 잘하는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저 선수는 배트를 함부로 대하네?”
“글러브도 더러워, 분명 야구를 대충하고 있는 거야.”
내가 배트를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면 팬들은 이걸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분명 불성실하고 야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선수로 보겠지.
이런 이미지 때문에 유독 장비 관리에 신경 쓰는 선수도 있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야구를 하지 않았다.
때가 타면 타는 대로 그만큼 멋이 나는 장비, 내가 그만큼 열심히 뛰었다는 증거 아닌가. 더러워진 장비를 보고 나는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배트 중 내가 유독 마음에 드는 물건도 있는 법, 플라이 볼이나 때려낸 물건에 애정을 줘야 하나?
슈퍼 루키는 부숴버리지 않은 걸 고맙게 여기라며 배트를 노려봤다.
‘다음엔 너로 정했다.’
거치대에 꽂힌 배트를 둘러보던 눈빛은 한 곳에 머물렀다.
빨갛게 물든 도색이 인상적인 배트, 그렇게 선택을 마친 슈퍼 루키는 다음 타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좌측!! 높게!! 펜스를 넘어~ 갑니다!! 투런 홈런!! 박혁 선수가 첫 타석에서 시즌 4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스코어 3대 0!! 필라델피아가 기세를 이거갑니다.”
“아~ 지금은 프레슬리 선수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아까 브런들 선수가 홈런을 쳤을 때도 약간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박혁 선수가 배트 플립을 하지도 않았거든요? 타구를 너무 오래 봤다는 건가요?”
경기는 어느덧 2회 초,
2회에도 홈런을 맞은 프레슬리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름 배려를 했는데 쓸데없이 핏대를 올리는 프레슬리, 평소 조용히 지내던 박혁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봐, 일단 홈부터 밟으라고”
3루 코치는 한 판 붙으려는 박혁을 붙잡았다.
이대로 싸움질 하고 퇴장당하면 홈런은 무효, 그런 바보짓을 왜 하나. 펄펄 뛰던 박혁도 코치의 말대로 3루를 돌아 홈으로 향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 시애틀까지 날아온 필라델피아 팬들도 야유를 퍼부었다.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지만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벤 존스 주심은 양 팀에 경고를 줬다.
서로를 자극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3회 초에 일이 터졌다.
[따아악~!!]
“배트를 던졌고!! 이 타구는 그대로~!! 우측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5호 홈런!! 필라델피아는 오늘 홈런 3방으로 점수를 뽑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도 홈런!! 오늘은 한국인의 날입니다!!!!”
“아~ 그런데 지금 주심이 뭔가 지시를 내린 것 같은데요. 아~!! 퇴장인가요?!!”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 지금 무슨 짓 했습니까?!! 네?!!”
벤 존스 주심은 홈을 밟은 이인영에게 경기장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배트 플립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왜 또 그런 짓을 했냐는 것, 이인영은 양 손을 높이 들며 항의 했다.
“아니 배트는 원래 치고 던지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무슨 레이디처럼 고상하게 다뤄야 되요? 홈런 쳐맞고 괜히 신경질 내는 저 자식들이 이상한 거죠!! 별 이상한 양반 다보겠네!!”
“잠깐!! 잠깐!! 자네는 뒤로 빠지라고!!”
마침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와이즈 감독이 선수 앞을 가로 막았다.
배트 플립 했다고 퇴장시키는 건 메이저리그 역대 최초의 사건, 이건 규정에도 없는 일이라며 격하게 반발했다.
“배트 던지면 퇴장이라는 규정 있어?!! 있냐고?!!”
“ … … .”
“왜 말을 못해?!! 그런 규정 있냐고!! 어?!!”
와이즈 감독이 핏대를 올리는 사이, 이인영은 홈런을 날린 배트를 외야로 던져버렸다.
한참을 날아 외야에 처박힌 배트,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슈퍼루키는 주심과 시애틀 벤치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XXXX!! All of you!!"
= 엿이나 처먹어라 이 XXX들아!!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에 얼어붙은 주심의 얼굴, 반면 필라델피아 팬들은 너무 화끈하다며 괴성을 질렀다.
“너 진짜 끝내준다!!”
“난 게이도 아닌데 반하겠어!!”
“오빠 오늘 시간 있어?!!”
시애틀까지 점령한 메뚜기 떼,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은 바로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로 몰려갔다.
하지만 퇴장당한 이인영은 이미 호텔로 돌아간 상황, 와이즈 감독이 대신 해명에 나섰다.
“오늘 우리 선수들은 최고의 플레이를 했습니다. 홈런을 치고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런데 시애틀은 이상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배트 플립이 충돌의 원이라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우리 선수들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나요? 홈런을 치고 배트를 던졌을 뿐입니다. 오늘 리(이인영)가 심판에게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배트는 원래 치고 던지라고 만든 물건이라고요. 무슨 레이디처럼 고상하게 다룰 물건도 아닌데 던졌다고 그게 큰 잘못입니까? 홈런을 맞고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시애틀 선수들이 더 큰 문제를 자초한 겁니다. 우리 선수들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필라델피아 구단도 정식으로 사무국에 항의했다.
배트를 던졌다고 퇴장을 내린 경우도 없거니와 그런 규정도 없다는 것, 심판이 재량권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배트를 집어던지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건 용서할 수 없는 행위, 사무국은 이인영에게 2경기 출장 정치 처분을 내렸다.
[XXXX!! All of you!!]
반면 슈퍼루키가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사진은 빠르게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일종의 유행이 됐다고 해야 할까, 뭣보다 필라델피아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의 사진이라며 열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