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59화 (159/309)

159화. 제대로 붙었다 (7)

“어서 오세요!! 유령의 집에!!”

“존재감 없는 놈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경기 전, 관중석을 점거한 필라델피아 팬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이쪽 팬들은 다른 구장에서 진상 짓을 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미국 동부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데, 팀이 잘 나가는 시기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 관중석을 점거하고 홈 팬들의 기를 죽인다.

오죽하면 멕시코와 가까운 샌디에이고에 출몰해 3루 관중석을 빨간색으로 물들이곤 하는데, 때로는 국경을 넘어 캐나다까지 나타난다.

“필라델피아 XX들은 메뚜기 떼 같다. 정말 짜증난다.”

오죽하면 한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

어쨌든 올 시즌 필라델피아는 15승 10패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를 달리는 중, 거듭되는 승리는 강성 팬의 진상 짓을 더욱 자극했다.

“자, 조시 빌라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 환호가 대단하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LA 머린스의 홈구장입니다.”

“바다에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네요. 진상이든 뭐든 어쨌든 열정만은 인정해 줘야겠습니다.”

LA 팬들도 지지 않고 푸른 물결로 관중석을 물들였다.

하지만 워낙 강렬한 붉은 색에 묻힌 존재감, 외치는 응원의 강도도 차원이 달랐다.

“LA 여자들은 못 생겼어!! 필라델피아 여자가 최고!!”

“와아아아~!!”

이날 강성 팬은 필라델피아 레인저스 치어리더 팀과 동행했다.

필라델피의 치어리더 군단은 최근 3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섹시한 응원단으로 평가 받았다.

지역에서만큼은 어지간한 유명인사보다 많은 인기를 누릴 정도, 하지만 미식축구를 1년에 몇 번 안 하기 때문에 이렇게 팬들과 같이 야구 팀 원정에 동행하기도 한다.

여기는 필라델피아 홈구장인가.

한동안 저 빌어먹을 메뚜기 떼로부터 평화를 유지했는데, LA 팬들은 다들 인상을 구겼다.

이건 다 쓸데없는 말을 한 건방진 루키 때문, 조시 빌라가 아웃되고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홈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82, 홈런 4개, 19타점, 어제 4안타를 때려내며 시즌 타율을 대폭 끌어올렸습니다.”

“팬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존재감은 확실하네요. 어딜 가든 눈에 띄고 있습니다.”

LA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오늘 LA의 선발은 존 킨사이드, 현역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를 논할 때 반드시 입에 오르내리는 선수다.

커터와 슬라이더를 나눠 던지는 건 위험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킨사이드도 그렇게 알고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 던졌지만, 패스트볼 구속이 상승하면서 빠른 볼과 슬라이더 사이에 간극이 일어났다.

어제 최고 97마일 빠른 볼과 86마일 슬라이더를 던진 어서리가 그런 유형, 이 차이를 극복하려면 그 간극을 채워주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킨사이드는 그 구질로 커터를 택했고, 그렇게 커터와 슬라이더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킨사이드, 오늘도 4실점]

[평균자책점 4.38로 상승]

물론 처음엔 잘 되지 않았다.

슬라이더와 커터가 뒤섞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투구가 됐고 고민 끝에 킨사이드는 빠른 볼 평균 구속을 94마일 정도로 내렸다.

패스트볼에 스핀을 많이 먹이면 그만큼 중력에 저항하는 힘이 생기는데, 그럼 공이 빠를수록 이런 효과가 극대화 됐을까?

가장 많은 스핀 효과를 보인 공을 나열해 보면 평균 구속은 대략 92마일 정도였다.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던 것, 투구에선 구속도 중요하지만 빠른 볼과 변화구의 구속 차가 너무 심하다면, 패스트볼 구속을 약간 줄이는 것도 필요했다.

킨사이드는 이렇게 구속과 구위의 관계를 이해하게 됐고, 이때부터 커터를 버리고 투심과 슬라이더를 장착했다.

두 구종은 완전 다른 구종으로 보이지만 한 가운데로 던지면 포심과 비슷한 궤적으로 날아가다 스트라이크 존 좌우로 흩어졌다.

타자 입장에선 이게 패스트 볼인지 투심인지 슬라이더인지 구별할 수가 없게 된 것, 이렇게 2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위장투구가 완성됐다.

이인영은 킨사이드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중계석도 긴장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나는 누구일까요?’

이인영은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봤다.

패스트볼로 보이는데 마지막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투심, 공이 말을 할 리는 없는데 내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약을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보였다 너의 약점,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2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늘 아침 7시에 나와 비디오를 돌려보며 킨사이드의 투구를 분석했다.

킨사이드의 장점은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잘 활용한다는 것, 하지만 이건 투심과 슬라이더를 일정하게 한 가운데로 던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그렇다면 공을 확실하게 빼야 할 땐 어떻게 투구를 할까. 가운데로 안 던지면 그만,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약간 실수가 일어났다.

세밀하게 코스를 컨트롤 하는 투수가 아니라 투심과 슬라이더가 가끔 한 가운데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난 것,

킨사이드의 그날 투구는 이 문제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런데 오늘은 투심이 너무 눈에 띄게 빠지는 편, 이렇게 되면 공을 타격할 구간은 가운데와 몸 쪽으로 정해진다.

쳐야 할 공이 정해졌다면 기다릴 뿐, 차분하게 3구를 기다렸다.

[따악~!!]

“당긴 타구가!! 아!! 2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이인영 선수가 어제에 이어 좋은 감각을 이어 가는군요!!”

“저 지금 소름 돋았습니다. 킨사이드 선수가 누구입니까? 메이저리그 대표하는 투수거든요. 그런데 너무 편안하게 타격을 하고 있어요.”

안타를 허용한 킨사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던질지 알고 있었다는 듯 튀어나오는 방망이, 어제 투수들이 왜 손도 못 쓰고 당했는지 이해가 됐다.

‘저 자식 위험하다. 컨트롤이 잡힐 때까지는 피하자.’

킨사이드는 다음 승부는 볼넷으로 피했다.

사방에서 원정 팬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무시, 5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초반에 안타를 많이 맞았지만 변화구 컨트롤이 잡히면서 페이스를 찾았고, LA는 5회 말 공격에서 3점을 추가하며 앞서나갔다.

초반에 비해 확실히 좋아진 컨트롤, 자신감이 붙은 킨사이드는 3번 째 승부는 피하지 않았다.

[따악~!!]

“1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이 타구는 데굴데굴 굴러 펜스까지!! 이인영 선수는 그 사이 2루를 찍고 3루까지 내달립니다!! 3루타!! 이인영 선수가 다시 한 번 킨사이드를 두들깁니다!!”

“지금도 노리고 쳤어요. 이 선수만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습니다.”

장타를 얻어맞은 킨사이드는 넋이 나간 얼굴, 내가 뭘 던질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맥주 한 캔을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일단 경기에 집중했다.

“와아아~!!”

여기에 후속 타자 오스틴 카터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1사 주자 1 - 3루, 경기 내내 잠잠했던 붉은 메뚜기 떼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홈런 한 방이면 동점, 하지만 LA 벤치는 침묵을 유지했다.

에이스가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데 성급한 교체는 금물, 특히 다음 타자 박혁은 킨사이드를 상대로 17타수 3안타로 아주 약했다.

여기서 병살 나오면 이닝 종료, LA 머린스의 댄 말론 감독은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금 나가 있자.’

분위기를 살피던 이인영은 3루에서 약간 멀어졌다.

좌익수 헤인스는 어깨가 강하기 때문에 타구가 멀리 가지 않으면 태그 업 시도도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3루를 지키고 있는 게 정답일까.

지금 3루 견제를 하면 보크, 조금 나간다고 손해 본 건 없었다.

[딱~!!]

“이 타구는 높게!! 좌익수!! 중견수!! 2루수!! 사이에 떨어집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오는 군요!! 필라델피아가 오늘 경기 첫 득점을 냅니다!! 스코어 3대 1!! 1사 주자 1 - 2루 기회도 계속됩니다!!”

“지금 이인영 선수 플레이를 보세요. 사실 아까부터 3루에서 나와 있었거든요. 태그 업을 하겠다고 홈에 붙어 있었다면 들어오지도 못했습니다. 확실히 센스가 있는 선수에요.”

겨우 한 점이지만 메뚜기 떼는 격하게 날뛰었다.

그건 필라델피아 벤치도 마찬가지, 보호 펜스 앞으로 뛰쳐나온 와이즈 감독은 하이파이브를 권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플레이로 팀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 이런 선수가 우리 팀에 있다는 게 행복했다.

따아악~!!

“와아아~!!!!”

흔들리던 킨 사이드는 다음 타자 스캇 브라운에게 쓰리 런을 맞고 무너졌다.

제구가 잡혔던 슬라이더가 한 가운데로 몰린 게 원인, LA 팬들이 침묵에 빠지면서 머린스 파크는 붉은 유니폼으로 물들었다.

결국 이 날 경기는 5대 3 필라델피아의 승리, 내셔널리그 최강 팀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내셔널리그 승률 전체 2위로 올라섰다.

설마 킨사이드까지 무너뜨릴 줄이야,

사방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이인영 앞에 마이크를 내밀었다.

“오늘 킨사이드를 상대로 2타수 2안타를 기록하셨는데, 어땠습니까? 공략할 만 했나요?”

“뭐 … 사실 그 친구의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더군요. 다음에는 서로 최고의 상태일 때 붙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침 7시에 나와 그 선수를 분석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실력도 있는데 유쾌하기까지 하다니, 왜 이 선수를 머린스가 잡지 않은 걸까. 순간 그런 원망을 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6회 초로 돌려보죠. 당신은 3루에서 제법 멀리 리드를 했습니다. 애매한 타구가 나왔는데, 그게 안타가 될 거라고 예상하신 겁니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죠. 사실 헤인스가 잡았다면 저는 홈으로 뛰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갑자기 나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2루수에게 떠넘겼죠. 그런 플레이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 어깨만 강하지 판단 능력은 별로더군요.”

이젠 루키가 선수 평가까지 하는 건가.

기자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 이인영은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주루는 과감해야 합니다. 만약 제가 그 때 태그 업을 하겠다고 3루로 돌아왔다면 득점은 되지 않았겠죠. 주자의 판단이 때로는 경기를 뒤집기도 합니다. 오늘 제가 그 역할을 해낸 거고요. 팀이 6회까지 3대 0으로 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절대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일도 필라델피아는 승리를 거둘 겁니다. 그리고 울면서 돌아가는 홈 팬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겠죠. 이상입니다.”또 시작된 도발,

약이 오른 LA 머린스 구단은 3루 관중석을 티켓 판매를 막아버렸다.

저런 발언을 했으니 내일도 메뚜기 떼가 관중석을 점령할 것 아닌가. 하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은 조롱으로 화답했다.

[우리 이미 예약했거든? 멍충아]

[매일 이기기만 하니까 몇 경기 지는 것도 보기 힘드냐?]

[내일 퍼렁이들은 경기장 오지마라. 어차피 울면서 돌아갈 테니까]

[그리고 역시 LA 여자들은 못 생겼어. 필라델피아가 최고야]

결국 다음 날 경기도 3루 석은 원정팀의 차지가 됐다.

1회부터 계속되는 메뚜기들의 발악, 청정지대였던 LA마저 붉게 물들자 다른 구단들도 바짝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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