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58화 (158/309)

158화. 제대로 붙었다 (6)

[따악~!!]

“좌측!! 파울입니다. 지금 타격은 게 보시나요?”

“글쎄요. 국내에서 이렇게 빠른 볼을 던지는 좌완투수는 상대해 보지 못했을 텐데, 생각보다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LA 머린스의 선발 투수는 다나 어서리, 최고 99마일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우는 좌완이다.

지난 2024년, 19승 8패, 평균자책점 2.72를 기록하며 만테냐 어워드를 수상한 초신성, 하지만 작년 시즌은 평균자책점 4.15로 좋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정타가 늘었다는 것, 뜬공 홈런 비율이 13%에서 19.5%로 뛰어 올랐다.

여기에 땅볼이 안타로 이어지는 확률이 30.2%, 리그 평균이 24%라는 걸 생각하면 분명 문제가 있는 투구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걸까.

일부 전문가들은 제구를 문제 삼았지만, 어서리는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제구를 꾸준히 가다듬었다.

최고의 한해를 보냈던 2024년 볼삼 비율은 78대 242, 작년 시즌은 67대 222로 제구만 따지면 그렇게 큰 변화는 없었다.

삼진도 2년 연속 200개를 돌파하며 구위도 인정받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어쨌든 이렇게 빠른 볼을 던지는 좌완과 붙는 건 생전 처음, 이인영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타격을 했다.

‘원래 이렇게 차이가 나나?’

2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최고 구속이 99마일이나 되는 투수라면 슬라이더 구속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서리의 슬라이더는 대략 84마일, 아주 느리다곤 할 수 없지만 빠른 볼에 비하면 그렇게 두드러지는 구속은 아니다.

하지만 구속이 전부는 아닌 게, 2024년 어서리의 슬라이더 피안타율은 0.184, 피 OPS는 겨우 0.492에 불과했다.

슬라이더가 위력적이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구속은 느려도 확실하게 꺾이면서 도망치는 궤적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강력한 패스트 볼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갖췄으니 두 가지 구종을 중심으로 볼 배합을 짜는 건 당연,

이때부터 타자들은 철저히 빠른 볼을 노리고 들어갔다.

작년에 허용한 28개 홈런 중 빠른 볼이 통타당한 게 24개, 결국 노림수에 걸려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구위가 떨어진 건 아니다.

빠른 볼은 여전히 평균 94~ 96마일 대를 유지,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슬라이더 헛스윙률은 무려 22%에 피안타율은 0.150밖에 안 된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빠른 볼을 차분하게 공략하고 있다.

올 시즌 맞은 피홈런 5개도 모두 빠른 볼을 던지다 맞은 것, 오늘 조시 빌라에게 맞은 것도 빠른 볼이다.

꼬여버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어서리 본인도 답답한지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다시 바깥쪽,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체인지업이네요. 어서리 선수가 지난 4월 18일 경기에서 안타 11개를 허용하는 동안 삼진 10개를 잡아냈고, 그 다음 경기에서 피안타 3개에 삼진 12개를 잡아냈거든요. 체인지업을 섞으면서 일어난 변화인데, 말 그대로 극과 극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체인지업이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는 뜻이죠. 오늘도 체인지업을 섞어 던지고 있는데, 빠른 볼이 타격이 되면 어떤 변화구를 던져도 효과를 보기 어렵습니다.”

빠른 볼을 자신 있게 밀어 넣는 게 어서리의 방식,

그런데 작년 시즌 크게 미끄러진 탓인지 올 시즌은 빠른 볼 비율이 약간 줄어들었다(63% -> 59%).

정말 큰 문제는 볼 배합이 아니라 자신감을 상실 한 것 아닐까. 볼 카운트가 몰리고 나서야 빠른 볼이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단순한데’

이인영은 3구도 문제없이 골라냈다.

체인지업이 좋은 것도 아니고, 바깥쪽 느린 슬라이더로 타이밍을 흔든 뒤, 빠른 볼로 마무리 하려는 패턴이 너무 눈에 띈다.

국내에서도 게스 히팅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선수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차분하게 빠른 볼을 기다렸다.

[따아악~!!]

“밀어낸 타구가!! 좌중간으로 멀리!! 계속 가는 타구!! 담자~~ 앙!! 위로 넘어 갔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홀로 홈런!! 백투백 홈런이 나오면서 필라델피아가 앞서나갑니다!! 스코어 2대 0!! 지난 4월 14일 이후 무려 2주 만의 홈런입니다!!”

“지금은 94마일 약간 높은 빠른 볼이었거든요. 놓치지 않고 걷어 올렸습니다!!”

“제가 바라던 대로 좌중간으로 갔네요. 통쾌합니다!!”

타구를 확인한 어서리는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분노했다.

내 빠른 볼을 밀어서 담장을 넘겼다? 빠른 볼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쟤가 2년 전에 19승을 했다고?”

“어, 근데 왜?”

“그때 타자들은 다 졸았어?”

홈런을 치고 돌아온 이인영은 벤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좌완에 99마일을 던진다기에 약간 긴장했는데 실제로 붙어보니 별 것도 아니다.

오히려 딱 치기 좋은 수준, 변화구는 도망치고 빠른 볼은 잡으러 들어오는데 못 치는 게 바보 아닌가.

작년에 평균자책점 4.15를 기록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다.

‘괜히 쫄았네. 별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인영은 다음 타석에서도 빠른 볼을 잡아당겨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빠른 볼 타격, 베이스에 안착한 이인영은 1루수 제이슨 캠벨에게 말을 걸었다.

“Since when have you been there?”

=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캠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양인 선수가 능숙하게 영어를 하기에 잠깐 놀랐지만, 1루수는 원래 여기에 있는 거 아닌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건지 이해를 못했다.

“I've been here all along."

= 난 아까부터 여기에 있었어.”

"Oh, really?" It was so quiet that I thought you were a ghost."

= 오 그래? 네가 너무 존재감이 없어서 유령인 줄 알았거든.

한 방 먹은 캠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오늘 활약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그 경력 4년 차에 접어든 내가 루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반격할 기회를 노렸지만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복수는 물거품이 됐다.

“뭐 저런 건방진 자식이 다 있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3회 초가 끝나고 더그아웃에 들어온 캠벨은 불같이 화를 냈다.

배경을 알 리 없는 동료들은 일단 캠벨을 다독였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정말 루키가 그런 건방진 말을 했단 말인가. 초반에 잘 나간다고 메이저리그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건 아닌지, 그렇다고 위협구를 던지는 건 아마추어 같은 짓이다.

실력으로 눌러놔야 다시는 그런 건방진 소리를 못하는 법, 다나 어서리도 친구의 모욕을 갚아주기 위해 정면 승부를 택했다.

[따악~!!]

“이 타구는!! 이번에는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필라델피아가 5대 2로 앞서나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 3타수 3안타!!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첫 3안타게임을 기록합니다!!”

“이제 3루타만 추가하면 힛 포 더 사이클이죠. 필라델피아가 지난 2004년 조쉬 벨 선수 이후 20년 동안 힛 포 더 사이클 기록이 없거든요. 이인영 선수가 오늘 그 기록을 깨는지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굴욕 뿐, LA 머린스의 댄 말론 감독이 마운드에 올랐다.

투수 교체, 강판단한 어서리는 글러브를 집어던지고 물통에 주먹질을 하며 울분을 표했다.

덕분에 더 어두워진 LA 머린스의 더그아웃, 그 사이 이인영은 귀밑머리를 어루만지며 경기가 재개되길 기다렸다.

‘나도 괴물이었네. 똑같은 괴물이면 할 만 하지.’

생각보다 칠 만 한 메이저리그 수준,

괴물들만 우글거리는 곳이라 섣불리 발을 들이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나도 괴물이었단 말인가.

혼자 피식 웃으며 베이스에서 멀어졌다.

[따악~!!]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타구!!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 승부!! 하지만 발이 먼저 빨랐습니다!! 세이프!! 필라델피아가 6대 2로 점수를 더욱 벌립니다!!”

“타구는 짧았지만 좌익수가 어깨가 약하다는 걸 알고 바로 뛰지 않습니까.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데 이렇게 저돌적인 때도 있어요. 상대하는 입장에선 끔찍하겠지만 저희는 너무 즐겁습니다.”

LA 원정 경기에서 이렇게 앞서 나가는 게임을 한 게 몇 년 만인가.

와이즈 감독은 오늘 경기의 영웅에게 환한 미소를 건넸다.

지금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20홈런 만 쳐줘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선수가 이 정도 활약을 펼치고 있으니 입이 귀에 걸렸겠지.

여기에 6번 타자 박혁이 2사 주자 1루에서 좌중간을 넘어가는 시즌 2호 홈런을 추가하면서 필라델피아는 8대 2로 달아났다.

사실상 게임 종료, 하지만 와이즈 감독은 대기록을 앞둔 이인영을 계속 우익수로 내보냈다.

“자, 이제 7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드레먼드 필리스, 오늘 2타수 2안타를 치면서 시즌 타율을 0.259로 끌어 올렸습니다.”

“오늘 6이닝 2실점 투구에 타격도 만점이네요. 원래 타격에 재능이 있는 선수지만 오늘은 특히 인상적인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필리스는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를 뽑아냈다.

필라델피아의 오늘 경기 14번째 안타, 선발 타자 전원 안타에 투수에게 3안타를 내주다니, 기분이 상한 홈 팬들이 자리를 뜨면서 주변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 졌다.

‘어딜 가시나, 아직 보여줄 게 더 많은데’

후속 타자 조시 빌라의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여기서 힛 포 더 사이클까지 내주면 말 그대로 개망신, 그렇다고 도망은 더 큰 치욕이라 LA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도 3루를 돌아 계속 내달립니다!! 타자 주자는 어디까지?!! 3루!! 3루까지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 3루타!!!! 설마 했던 그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스코어 10대 2!! 승리와 함께 하는 대기록입니다!!”

“한국 선수 역대 최초 기록이죠!! 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아들 정말 잘 낳았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중계석에 쏟아지는 환호성, 바다 너머의 한국 팬들도 대기록에 찬사를 표했다.

그건 미국 현지 여론도 마찬가지,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클럽하우스 기자 회견 실에서 질문을 받았다.

“오늘 4안타 경기를 하면서 메이저리그 전체타율 1위 올라서셨는데,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은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칠 만 합니까?”

“뭐 … 글쎄요. 아직 많은 선수들을 상대해 본 게 아니라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는 것 같습니다.”

“잠시 다른 질문 드리겠습니다. 중계카메라에 캠벨이 굉장히 화를 내는 장면이 잡혔거든요.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그런 행동을 했는데, 무슨 말을 한 겁니까?”

“하도 존재감이 없기에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고 물어 봤습니다.”

기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도발을 했단 말인가. 누구라도 열이 받을 상황, 하지만 오늘 캠벨이 경기 내내 아무 것도 못한 게 사실이라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오늘 LA에선 눈에 띄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치 유령의 집에서 경기를 하는 느낌이더군요. 내일은 좀 더 존재감 있는 활약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새를 못 참고 또 날아드는 도발, 저 친구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어쨌든 특색은 확실한 선수, 건방진 루키의 도발 덕분에 다음 날 경기 시청률은 13%까지 급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