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제대로 붙었다 (5)
[좋은 선수인건 맞다. 하지만 일류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어느덧 일주일이 흐른 시즌, 팔라델피아 지역 기자 애쉬 클로이는 나름대로 정리한 기사를 내보냈다.
요점부터 말하면 이인영은 좋은 선수지만 일류는 아니라는 것, 근거는 대략 이랬다.
“파워는 앨런 스캇, 정확도는 데이빗 파슨스, 수비 범위는 더글러스 바렛, 어깨는 다니엘 리드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므로 일류는 아니다.”
애쉬 클로이가 예를 든 선수들은 모두 각 부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다.
최고치를 기준으로 평가를 한다면 일류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수가 있을까.
예를 들어 앨런 스캇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파워를 갖추고 있지만 떨어지는 정확도와 수비 때문에 좋은 평가는 못 받고 있다.
그래도 파워 하나는 진짜라 구단에서 써주는 것, 애초에 모든 게 완벽한 선수가 어디에 있나.
사실 애쉬 클로이가 이런 기사를 쓴 본심은 이랬다.
이인영은 파워 - 컨택 - 수비 - 어깨 - 주루까지 전부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들과 비교될 정도라는 뜻, 자극적인 기사로 팬들의 관심을 끌면서 교묘하게 슈퍼루키를 띄워줬다.
사실 필라델피아 여론이 이렇다.
정말 뛰어난 선수가 나와도 직접적인 칭찬을 안 하는 편, 상대를 정말 사랑해도 표현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이런 도시에서 조롱 아닌 조롱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 팬들의 조롱은 계속 됐다.
“이봐!! 안타는 충분히 봤으니까 홈런을 치라고!!”
“그 타율이면 앤디 스캇은 벌써 홈런 5개는 쳤을 거야!! 힘이 없어서 안 되는 거야?!!”
이인영은 지난 일주일 동안 타율 0.353, 홈런 없이 5타점을 기록했다.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활약이지만 홈런이 없다는 게 옥의 티,
하지만 슈퍼루키는 앞발을 약간 벌린 채 평소처럼 타격을 했다.
[따악~!!]
“밀어 낸 타구가!!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안타!! 개막 이후 8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스윙을 보세요. 짧게 돌아 나오지 않고 긴 궤적을 그리고 있거든요. 국내에서도 가끔 이런 스윙을 하긴 했는데, 아직 적응하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장타가 잘 나오지 않는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스윙이 이렇게 길게 나오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빠른 공에 대비하기 위해 간결하게 스윙 궤적을 바꾸는 선수들과 전혀 다른 행보, 어쨌든 이런 스윙으로 메이저리그에서 3할 중반 타율을 기록하는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 아닌가.
이제 됐다고 판단되면 잡아당기는 스윙도 나오겠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줬다.
‘하아~ 혜진이 보고 싶다.’
한편, 1루에 안착한 슈퍼루키는 한국에 놔두고 온 애인을 떠올렸다.
긴 머리칼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샴푸 냄새, 뽀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키스를 하면 그녀는 깔깔거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절대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허리를 감싸 안으면 살짝 긴장하는 어깨, 여길 건드리면 어떻게 반응할까.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반응을 살피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공이나 상대하고 있으니 솔직히 욕구 불만, 약간 짜증이 몰려왔다.
‘이래서 연애하면 야구에 집중 못하는 구나.’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다음 타석에서도 공에 집중했다.
[따아악~!!]
“타격!! 우측으로 멀리!!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 7경기 만에 드디어 터졌습니다!! 한국 팬 여러분들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첫 타석에서 스윙을 길게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 지금도 약긴 긴 편인데, 그래도 스트라이크 존 앞에서 정확히 때려냈습니다. 이게 이인영 선수의 진짜 모습이죠!!”
“그렇습니다. 이제 감을 잡았으니 홈런도 많이 나오겠죠.”
이인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받아내며 홈을 밟았다.
통산 첫 홈런은 모른 척 하는 게 메이저리그의 관례, 와이즈 감독은 환한 미소로 하이파이브를 권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모른 척 했다.
“여~!!”
“첫 홈런 축하해!!”
뒤늦게 축하해주는 동료들, 하지만 이인영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홈런 쳤는데 얼굴이 왜 이래? 뭐가 불만이야?”
“너희들한테 축하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아. 아리따운 여인이 귓속말을 건넨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쳐 주는 동료들.
조시 빌라는 오늘 밤 재미 좀 보라며 농담을 건넸지만 주인공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안 잤어?]
“응, 경기 봤지.”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애인과 전화 통화를 나눴다.
오늘은 낮 경기라 오후 5시에 일정이 끝났다.
한국은 지금 새벽 6시, 남들은 잘 시간이지만 혜진 씨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경기를 챙겨봤다.
남자 친구가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때려냈을 땐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나름 차분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홈런 치고 무슨 생각했어?]
“네 생각했지.”
[에이~ 또 느끼한 거짓말 한다.]
“농담 아닌데?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뭔 줄 알아? 널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 키스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네 머리카락 냄새 맡고 싶어.”
[어휴~ 진짜 변태야!!]
혜진 씨는 질색을 했지만 적극적인 표현을 하는 애인이 싫지 않았다.
그 전에 사귀었던 남자는 몸에 손이 닿으면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지금 전화 통화를 나누는 사람은 그런 거부감은 없다.
아직 낯간지럽고 어색하긴 한데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편, 정말 궁합이라는 게 있는 건가.
부끄러운 말을 주고 받다보니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원래 이런 생물, 좀 더 대담하게 나섰다.
[내 목덜미에 키스하고 머리카락 냄새 맡는 게 그렇게 좋아?]
“어, 미칠 것 같아.”
[그럼 얼른 성공해서 돌아와. 깨끗이 씻고 기다릴게]
“오~ 의욕이 막 불타오르는데?”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며 경악할 대화, 하지만 이게 바로 연인 관계 아니겠나.
동기부여가 확실히 된 슈퍼스타는 이후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한 달 동안 타율 0.350, 홈런 2개, 17타점을 기록했지만 아깝게 이 달의 루키 수상은 실패, 아쉬움을 삼켰다.
‘내가 타율하고 타점은 더 좋았는데?’
이인영은 수상에 의문을 품었다.
이달의 루키 수상자는 LA 머린스의 마이클 헤인스, 헤인스는 한 달 동안 타율 0.313, 홈런 4개, 14타점을 기록했다.
홈런 빼곤 나보다 나을 게 없는데 도대체 수상 기준이 뭔가.
차라리 밀워키의 찰리 해리슨이 받았다면 억울하진 않았다.
해리슨은 지난 한 달 동안 타율 0.270, 홈런 6개, 22타점을 올렸다. 하지만 52일 이상 메이저리그에 등록한 선수는 신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자격에서 탈락, 그렇게 이 달의 루키는 헤인스에게 돌아갔다.
어쨌든 다음 경기는 LA 머린스와의 원정경기, 라커룸에 들이닥친 기자들은 헤인스에게 전해줄 말이 없냐고 물었다.
비수상자에게 수상자를 축하해 주라는 건가.
이인영은 다소 까칠한 반응을 보였다.
“제가 축하라도 해주길 바라는 건가요?”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헤인스가 솔직히 저보다 나은 게 뭐가 있습니까? 홈런이 2개 더 많았다고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한 달 동안 결승타만 3개를 때렸습니다. 차라리 해리슨이 받았다면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투표를 하는 겁니까?
헤인스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28살 늦은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중계석에서도 헤인스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불우한 과거를 끊임없이 언급, 그렇게 영웅 만들기가 시작됐고 역경을 극복한 헤인스가 가산점을 받았다.
“이달의 루키는 실력으로 정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사연 대회라도 해서 상을 정하는 게 낫겠네요. 저도 여러분들이 눈물 뺄 사연이라면 얼마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헤인스의 수상을 철저히 비꼬는 발언, 본인들이 생각해도 무안했는지 기자들은 라커룸에서 철수했다.
“어이~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다음 달 상은 네가 받을 거야.”
“됐어. 눈물이나 짜면서 동정표 얻는 자식이나 받아가라고 해.”
사방에서 위로가 쏟아졌지만 여전히 불편한 얼굴, 그렇게 이인영은 전쟁을 시작했다.
“자,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조시 빌라, 올 시즌 타율 0.217, 홈런 1개,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율이 너무 떨어지죠. 출루율은 0.310으로 나쁘지 않은데, 컨택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경기,
중계석의 험담을 들었는지 조시 빌라는 초구를 잡아당겨 좌측으로 큰 타구를 날렸다.
시즌 2호 홈런, 간만에 한 건 한 조시 빌라는 타석에 들어서는 루키에게 하이 파이브를 권했다. 하지만 피해버리는 녀석, 갈 곳은 잃은 손바닥은 허공을 헤매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저 자식 아직도 삐쳐있는 거야?”
“그러게, 그런데 내가 저 자식 입장이라도 좀 서운할 것 같아.”
“내가 상 압수한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몰라, 그냥 네가 싫은가 봐.”
한국인은 메이저리그 수준을 떨어트린다고 떠벌렸으니 죄가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조시 빌라는 고개를 흔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딱~!!]
“초구,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도 지면을 한 번 짚고 앞발이 나가죠. 현지에서도 주목하는 동작인데, 이인영 선수에겐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토 탭으로 타이밍을 잡는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 동작은 파워 히터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앞발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시야가 덜 흔들리고 그만큼 선구안과 컨택도 좋아지지만, 체중 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온전하게 힘을 싣기가 어렵다.
타고난 파워가 없는 선수가 하기 힘든 자세, 그리고 이인영은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2개 밖에 때려내지 못했다.
한국에서 40~ 50홈런을 쳤던 타자지만 역시 메이저리그의 구위를 이겨내는 건 어려운 건가.
하지만 그건 끝까지 가봐야 알 일, 이인영은 자신이 정한 지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도 앞발이 일찍 지면에 닿았죠. 이렇게 준비가 빨리 되면 떨어지는 볼이나 유인구에 잘 속지 않습니다. 이게 맞는 거예요.”
“이런 자세는 파워를 싣기 어렵다고 하는데, 지금 이인영 선수는 3할 5푼을 치고 있습니다. 홈런 적다고 뭐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저는 이 선수가 왜 이달의 루키 수상을 못한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평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이인호 위원은 목소리를 냈다.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뭔가 투표가 잘못된 거 아닌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여기서 뭔가 무력시위를 해주길 바랐다.
마침 중계카메라에 잡힌 좌익수 헤인스의 얼굴, 기왕이면 저쪽으로 타구가 날아가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