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55화 (155/309)

155화. 제대로 붙었다 (3)

“혹시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거 없나?”

계속되는 시범경기, 어느 날 필라델피아의 피터 와이즈 감독은 선수들과 개인 면담을 나눴다.

감독이 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선수가 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겠지.

이인영은 한 마디로 속마음을 정리했다.

“감독님은 야구 못할 때 누가 두둔해주면 기분 좋았나요?”

“그야 뭐 … .”

와이즈 감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240파운드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됐지만 고교 시절만 해도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을 정도로 날렵한 운동신경을 자랑했다.

나름 기대를 받으며 입성한 메이저리그, 4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콜 업 됐지만 백업과 대타 요원을 전전하다 유니폼을 벗었다.

그렇게 잘한 기억도 별로 없지만, 끔찍한 하루를 보냈을 때 어깨를 만져 준 동료의 손길도 생각해보면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쓸데없는 동정은 상대를 더욱 불쾌하게 할 뿐, 이인영은 비난보다 어설픈 칭찬이 더 기분 나쁘다는 걸 확실히 표현했다.

“저는 한국에서 3할 8푼을 쳤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안 되겠죠. 더 많은 아웃을 당하고 끔찍한 하루를 보내는 일도 많겠죠. 병살타를 치고 들어오는데 감독님이 어깨를 쳐주면 제 마음이 어떨까요? 다들 욕해도 내 편이 있으니까 기뻐할까요?”

“뭐 … 그건 아닌 것 같네.”

“그러니까 제가 실수하면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아니면 그 따위로 못하냐고 욕을 하시던가요.”

와이즈 감독은 이 선수의 자존심이 정말 강하다는 걸 재확인했다.

어설프게 자극했다간 오히려 역공을 맞을 선수, 와이즈 감독은 요구사항을 확실하게 접수했다.

“그럼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겠나?”

“네, 얼마든지요.”

“자네 수비 위치가 조금 얕은 것 같은데, 위치를 조정해 줄 수 있나?”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의 수비 방식에 약간 불만이 있었다.

야수들은 보통 외야로 날아오는 볼을 처리하기 위해 속도를 죽이는데, 이건 불규칙 바운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속도 조절을 잘못해서 공을 뒤로 빠트리면 대재앙, 그렇다고 이인영이 시범 경기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다.

하지만 와이즈 감독은 속도를 죽이지 않는 전진스텝이 훗날 팀에 화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제가 공을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빠트렸나요?”

“그건 아니지만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는 플레이라고 생각하네.”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서도 야수 앞으로 날아오는 공은 빠른 스텝으로 처리해 주자의 추가 진루를 막았다.

바운드 처리에는 나름 자신이 있고,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빠른 스텝의 부정적인 면만 보는 걸까.

일단 설득을 이어갔다.

“감독님은 제가 수비할 때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아시나요?”

“그게 무슨 소린가?”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얕게 있잖아요.”

이인영은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경쾌한 스텝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다른 외야수보다 좀 더 앞으로 전진 하는 편, 어깨도 좋아 유격수 머리 위를 넘어가는 짧은 안타가 2루타가 될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빠른 전진스텝을 갖췄으니 바가지 안타가 될 타구도 곧 잘 잡아냈다.

공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수비가 저평가를 당하고 있는데, 빠른 스텝을 포기하라는 건 내 장점을 지우라는 것과 다름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빠른 스텝 할 겁니다. 이게 마음에 안 드시면 지금이라도 1루로 돌리세요.”

와이즈 감독은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이 친구의 수비 위치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스텝이 빠르고 어깨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와이즈 감독은 좌타자가 나왔을 때 시프트를 자주 쓰지만, 우익수 위치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와이즈 감독이 우익수에게 요구하는 건 수비위치를 조정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강한 어깨와 공격력 뿐, 하지만 이인영은 그건 내가 추구하는 야구가 아니라며 맞섰다.

내가 뭘 잘못생각하고 있는 건가. 와이즈 감독은 코치진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적극적인 건 좋지만 외야수비는 안정적인 게 최고입니다.”

폴 보먼 코치는 와이즈 감독의 의견에 찬성했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타구라면, 야수는 안전하게 바운드로 잡아서 내야로 송구를 해야 한다. 다이빙을 시도해서 공을 잡는다면 아웃이지만 놓치면 2~ 3루까지 전진, 그런 도박을 해야 하나.

하지만 이인영은 지금 다이빙을 논하는 게 아니라고 맞섰다.

“누가 몸을 날린다고 했습니까? 빠른 스텝으로 먼저 가서 타구를 잡아낸다는 거 아닙니까?”

“자네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저 무시하는 겁니까? 당신이 날 며칠이나 봤다고 그런 평가를 합니까?”

제대로 불꽃이 튄 폴 보먼 코치와 열렬 루키, 화들짝 놀란 와이즈 감독은 중재에 나섰다.

“우리가 싸우자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잖나. 잘 해보자고 하는 말인데 둘 다 진정하라고.”

약간 누그러진 분위기, 폴 보먼 코치는 자네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며 사과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투 자체가 약간 무례했던 게 사실, 하지만 이인영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는 지난 6년 동안 그렇게 수비를 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라는 겁니까?”

“알았네. 자네 뜻대로 하게, 다시는 참견 하지 않을 테니까.”

기어이 감독과 코치를 이겨먹은 열혈 루키, 이 선수는 올 시즌 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백기를 들긴 했지만 와이즈 감독은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루키 때문에 불안에 휩싸였다.

* * *

“나는 여자가 너무 좋아!! 젊은 여자를 보기만 해도 황홀해!! 그리고 난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고혈압으로 죽을 거야!!”

이곳은 필라델피아의 홈 구장 TNT 파크, 구단 마스코트 폴 모리는 관중석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여자는 무조건 안고 남자에겐 시비를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캐릭터, 바로 작업이 시작됐다.

“여기 고칠 데가 없는 언니가 있네. 오늘 시간 있어?”

“꺄아아~!!”

“저리 가!!”

괴수의 역습에 질색하는 여성 팬들, 그렇게 관중석에서 한참을 노닥거리던 폴 몰리는 행사가 시작되자 그라운드로 내려왔다.

올 시즌도 형편없는 플레이로 팬들의 혈압을 올릴 녀석들, 선수 소개가 시작되자 폴 몰리는 베이스 라인에 늘어선 선수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네가 배트를 휘두르는 걸 보느니 맥주 한 캔을 마시겠어. 너는 팬들에게 아무 즐거움도 못 주는 형편없는 녀석이니까!!”

조시 빌라는 그러려니 넘겼다.

한두 번도 아니고 싸워봤자 득이 될 게 없는 녀석, 관심을 끊자 다른 선수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너 아직 안 쫓겨 난 거야? 다시 보니 속이 울렁거리는데?”

박혁도 그냥 웃어 넘겼다.

올해 메이저리그 4년 차, 처음엔 당황했지만 관심을 끊으면 다른 선수에게 가 버릴 녀석이라 이제는 면역이 됐다.

문제는 이인영 그 녀석, 은근 욱 하는 성격이라 약간 불안했다.

[No 2!! Right Fielder!! In Young Lee!!]

드디어 등장한 문제의 선수, 사방에서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쏟아졌고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베이스 라인에 섰다.

“네가 5천만 달러짜리라고?!! 내 팬티가 1억 달러다!! 넌 내 팬티만도 못한 녀석이라고!!”

초반부터 강하게 나오는 폴 몰리,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내심 슈퍼 루키의 반응을 기대했다.

퍽!!

배로 날아드는 묵직한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진 폴 몰리는 벗겨진 인형 탈을 급히 뒤집어썼다.

아프진 않은데 선수 성질 건드렸다가 걷어차인 건 정말 오랜만, 뭣보다 첫 만남부터 발길질 하는 선수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와하하하~ .”

“앞으로 천 번은 더 걷어차 줘야 돼!!”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고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폴 몰리는 매번 패배만 당하는 필라델피아 팬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캐릭터, 구단으로부터 받는 연봉도 꽤 많다.

선수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는데 겁이 없는 루키가 대뜸 발차기를 해버렸으니, 10년 묵은 원한이 씻겨 내려갔다.

‘뭘 봐?’

한편, 이인영은 폴 몰리에게 계속 눈치를 줬다.

인형 탈 뒤집어썼다고 다 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또 까불면 재미없을 줄 알라며 주먹 감자를 날렸다.

개막전부터 제대로 존재감을 어필한 슈퍼루키, 필라델피아 팬들은 어서 시작하라며 아우성을 쳤다.

경기가 시작 돼야 욕설이든 뭐든 할 거 아닌가. 주심의 콜이 울리자 환호성은 더욱 높아졌다.

“자, 1회 초 피츠버그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칼 레이븐, 작년 시즌은 타율 0.277, 홈런 13개, 31도루를 기록했습니다.”

“홈런은 많이 치지 않지만 풀 히터 기질이 있는 선수죠. 제가 조사를 많이 했습니다.”

생애 첫 메이저리그 중계,

양아들의 발길질에 껄껄 웃던 박한우 위원은 긴장된 목소리로 첫 걸음을 뗐다. 국내 선수는 잘 알고 있지만 메이저리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공부를 하고 나왔다.

반면 그 옆에 앉은 이인호 위원은 캐스터의 목소리에 맞장구를 쳐주며 아들의 활약을 기다렸다.

따악~!!

몸을 날린 2루수 글러브를 외면하고 날아오는 타구, 이인영은 평소처럼 빠른 스텝으로 타구를 처리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역시 강하게 치는 타자들이 많은 메이저리그, 그래도 특유의 전진수비는 수정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넘어가는 타구 처리는 나름 자신이 있는 편, 후속 타자 케빈 몰리건은 2구를 잡아당겨 우측으로 타구를 보냈다.

[따악~!!]

“이번에도 우측으로 가는 타구!! 우익수!! 우익수가!! 잡아냅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줍니다!!”

“국내에서도 이 정도 타구는 쉽게 처리했던 선수죠. 놀랄 것도 없습니다.”

타구를 확인한 케빈 몰리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꽤 앞에서 수비를 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타구를 따라잡은 스텝, 저 덩치에 저런 수비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건 필라델피아 코치진도 마찬가지, 얼마 전 이인영의 수비 방식을 두고 충돌했던 폴 보먼도 지금 수비는 인정했다.

그래도 외야수비는 안전한 게 제일, 약간 불안한 눈으로 외야를 응시했다.

‘수백 번도 더 잡았단 타구다. 놓칠 리가 없지.’

반면 이인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빠른 발에 타구 판단 능력도 있는데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 당연히 해야 할 플레이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외면했다.

다음 타자가 병살타를 치면서 이닝 종료,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 조시 빌라는 2구를 건드렸지만 2루 땅볼 아웃,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슈퍼루키는 메이저리그 첫 타석을 맞이했다.

시범경기에서 타율 0.356, 홈런 3개, 9타점을 올린 선수,

본 경기에서도 그런 활약을 할 수 있을까. 도발을 날렸다가 배를 걷어차인 폴 몰리는 아웃을 당하면 야유를 퍼부어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따악~!!]

“자!! 당긴 타구가!! 오른 쪽으로!!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메이저리그 데뷔 첫 안타!! 초구를 잡아당겨 안타를 기록합니다!!”

“지금은 바깥쪽 약간 가운데로 몰렸는데, 망설이지 않고 나왔거든요!! 컨택에 자신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타격입니다!!”

“말만 할 게 아니라 우리 박수 한 번 치죠.”

조용히 있던 이인호는 중계진의 박수를 유도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자랑스러운 녀석, 이 기세가 시즌 마지막까지 이어지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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