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제대로 붙었다 (1)
“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도 30홈런 이상을 칠 수 있다고 봅니까?”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순 없죠.”
이곳은 뉴욕의 구단 사무실,
선수 영입을 두고 스카우팅 디렉터들은 논쟁을 주고받았다. 확신이 없는 선수를 상대로 위험부담을 하지 않는 게 뉴욕의 원칙, 메이저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선수에게 30홈런 이상의 파워를 기대할 수 있나.
일단 한 번 믿어보라는 약장수의 논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하지만 이인영을 유심히 지켜본 시어도르 시모어 국제 스카우터는 이 선수는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앉았다.
“박혁은 메이저리그에서 1214타석 동안 홈런 46개를 쳤습니다. 이 선수는 한국에서 5년 연속 30홈런을 쳤죠. 이인영은 한국에서 5년 연속 44홈런 이상을 쳤습니다. 이 선수의 파워는 최소 박혁보다 한 수 우위입니다. 매 시즌 20홈런이 가능한 선수인데 그런 평가는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20홈런 칠 수 있는 유망주는 뉴욕에 얼마든지 있어요. 그 친구의 재능을 확인하겠다고 4천만 달러 이상을 쓰는 건 낭비죠.”
“그 말이 맞습니다. 시험할 유망주는 마이너리그에 얼마든지 있다고요. 우리가 원하는 건 확신입니다.”
복권을 긁더라도 너무 비싼 건 안 사겠다는 뜻, 다른 팀이 포스팅에 그만큼 투자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2년 2천만 달러에 구단이 행사할 수 있는 옵션 1년(1200만 달러)이 최종금액으로 결정됐다.
‘정말 웃기는 인간들이군.’
시어도르는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한 유망주를 원한다면 국제 스카우터는 왜 보낸 건가. 그럴 거면 FA 시장에서 검증이 된 선수를 영입할 것이지,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그 먼 길을 오고 간 건가.
모든 계약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떠안는다.
이인영의 잠재적 능력을 따져봤을 때 5천 만 달러 이상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데 너무 위험을 꺼리는 사람들, 사실 시어도르는 홈런보다 이인영의 컨택 능력에 주목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타구를 날릴 수 있고, 뭣보다 밀어 쳐서 홈런을 만들 수 있는 선수, 뭣보다 통계 전문가들이 MLB에서 주전급 활약을 할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뭘 더 증명하라는 건가. KBO를 더블 A 수준으로 보고 있으니 모든 공격지표를 무시할 수 있는 거겠지, 190이 넘는 큰 키에 유연성과 파워를 동시에 갖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되나.
시어도르는 뉴욕관계자들이 언젠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며 불만을 삭였다.
[나중에 1억 달러를 주고 사오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노력한 게 수포로 돌아간 게 서운했는지 시어도르는 SNS에 정보를 노출했다.
철저한 비공개 입찰로 진행되는 포스팅,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포스팅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 팀이 입찰에 응했는지 공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입찰액 중 가장 높은 금액만 라이온즈 구단에 통보, 그런데 그 원칙을 시어도르가 깨버렸다.
구체적인 액수가 아니라 1억 달러라는 애매모호한 숫자를 언급하긴 했지만 어쨌든 정보 유출, 사무국은 뉴욕 구단에 징계를 내렸고, 뉴욕은 바로 시어도르와의 계약해지를 선언했다.
뚜껑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는데 이 소란이라니, 입찰액을 두고 벌이는 각 구단의 눈치 게임은 더욱 치열해 졌다.
“일단 자리부터 만들죠.”
“카펜터를 트레이드 시킬까요?”
그동안 관심 없는 척 했던 세인트루이스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레이드 대상이 된 닉 카펜터는 2020년부터 세인트루이스의 주전 좌익수로 뛰었다.
첫 시즌에선 124경기 출장, 타율 0.247, 13홈런, 50타점으로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2년 차 시즌은 필라델피아 원정 경기에서 포수와 부딪쳐 35경기 출장에 그쳤고, 3년 차 시즌에 29홈런 89타점을 올리며 만개,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하는 활약을 선보였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 4년 차 시즌은 잔부상에 시달리며 115경기 출장, 타율 0.219, 홈런 11개, 43타점에 그쳤다.
가능성은 있는데 잔부상이 많고 기복이 너무 심한 편, 마침 카펜터에게 관심을 보이는 애틀랜타에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를 써야 할까요?”
“바로 그게 문제지. 가장 큰 문제야.”
세인트루이스의 단장 칼빈 벨리는 6년, 4800만 달러를 생각했다.
보장 금액은 6년 3500만 달러, 나머지는 옵션에 따라 결정된다. 옵션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이 정도 계약금을 제시할 팀이 있을까.
사실 6년 계약을 제시할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1년 연장, 이 정도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 주전 좌익수까지 트레이드 시켰는데 못 잡으면 곤란했다.
* * *
“단장님, 사무국에서 메일 왔습니다.”
“그래요?”
드디어 찾아온 운명의 날, 차명석 단장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메일을 열자 최고 입찰액이 공개됐다.
“입찰됐다고 연락해요.”
“알겠습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이인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포스팅 금액은 5천만 달러, 어느 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선수와 구단이 승인을 해야 공개하는 게 룰이라 알았다고만 답했다.
[그럼 승인 하는 건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끝난 통화, 눈치를 살피던 혜진이는 오빠 옆구리를 찔렀다.
“가는 거예요?”
“왜? 서운해?”
혜진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미국으로 가버리면 우리는 신경도 안 쓰겠지, 내가 가는 게 그렇게도 서운할까. 죄 많은 오빠는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오빠 미국 간다고 여기 안 오는 거 아니야.”
“거짓말 마요.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이인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얘는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운 걸까, 그런 건 다 헛소리라며 해명에 나섰다.
“좋아하는 사람이 멀리 가면 더 보고 싶어지는 거야.”
“… 정말요?”
“그럼, 오빠는 미국 가면 혜진이 엄청 보고 싶을 거 같은데, 너는 안 그래?”
“… 아니에요.”
“그렇지? 그러니까 다 헛소리야. 오빠가 돈 많이 벌어야 너희들 공부도 시키고 그러지. 오빠가 책임질 사람이 많아,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돈 주는 데로 가는 거야. 이해하지?”
“… 네에… .”
말은 그렇게 해도 서운함이 묻어 있는 얼굴, 월드스타는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아이들과 헤어졌다.
울먹이는 얼굴들을 보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지만, 성공해서 돌아오면 저 녀석들 앞에서 더욱 더 당당해 질 수 있지 않겠나.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필라델피아, 6년 5천만 달러 제시]
[역대 포스팅 3위 규모, 한국 선수로 역대 최고액 경신]
입찰 승인이 떨어지고 계약을 제시한 팀이 공개됐다.
라이온즈 구단에 넘길 계약금까지 합해, 5762만 달러를 지불한 필라델피아, 이인영은 정식 계약을 맺기 위해 대구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역대 7번째 코리안 메이저리거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 혹시 소속팀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필라델피아는 메이저리그 현역 선수들이 기피하는 구단, FA 계약을 맺을 때 트레이드 거부 팀 1순위로 오르는 팀이다.
박혁 선수도 필라델피아는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팀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선수는 물론 필라델피아에도 실례되는 질문, 평범한 질문만 반복했다.
“위대한 도전을 앞두고 계신데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뭐… 듣자하니 필라델피아의 어느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죠? 동양인 선수가 두 명이나 있는 뉴욕 퀸스는 MLB의 수준을 떨어트릴 뿐이라고 말이죠. 이제 필라델피아도 한국인 선수가 두 명이 됐으니 수준 떨어지는 팀이 된 건가요?”
기자들은 경악했다.
우리도 감히 던지지 못한 화제를 터트리다니, 하지만 여기까지는 농담이었다.
“성공 여부는 이 자리에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KBO 최고의 선수가 MLB에서 망신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만은 증명하고 오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이인영은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수준 떨어지는 팀 발언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필라델피아 여론, 극성팬들은 저 선수에게 57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지불한 구단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발끈했다.
“마음에 드는군. 아니, 우리 팀에 딱 어울려.”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홈팬들이 얼마나 극성맞은지 모르는 사람이 있나, 팬보다 더 독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 초반부터 거하게 선수를 친 배짱에 경의를 표했다.
“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네.”
이인영은 필라델피아의 홈구장 TNT 파크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단장, 부사장, 감독, 100여명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자리, 사인을 휘갈기는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Now you're the second-in-command."
= 이젠 자네가 우리 팀의 넘버 투야.
단장은 등번호 2번이 찍힌 유니폼을 어깨에 걸쳐줬다.
2번은 필라델피아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전 주인은 로이 데븐포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스타지만 데븐포트는 필라델피아 모자를 거부했다.
통산 483홈런 중 284개를 필라델피아에서 쳤지만, 사무국의 권유도 결심을 되돌릴 순 없었다.
“어떤 멍청이가 그 팀에서 또 2번을 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그 유니폼에 내 이름이 새겨지는 것도 거부한다.”
필라델피아가 얼마나 싫었기에 은퇴 후에도 감정을 풀지 않은 건가.
이후에도 구단이 거듭 설득을 이어갔지만 끝내 실패, 이후 몇 몇 선수가 2번을 달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인영은 필라델피아에서 7년 만에 2번을 단 선수, 구단 관계자들은 이 선수가 제 2의 데븐포트가 되어 주길 바랐다.
“제가 먼저 질문 드리겠습니다.”
계약식이 끝나고 진행된 인터뷰, 이인영은 통역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필라델피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듣자하니 공항에서 재미있는 말을 하셨던데요.”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대로라면… 한국인 선수가 2명이 됐으니 필라델피아가 수준 떨어지는 팀이 됐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뒷내용은 모르십니까? 기사 제대로 안 보셨군요.”
첫 만남부터 전개되는 팽팽한 접전, 자칭 월드스타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드러냈다.
“메이저리그가 얼마나 대단한 무대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저는 그 벽을 깨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여론이 무슨 말을 하든 제가 신경 쓸 바 아닙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할 뿐이고, 여러분들은 평가를 내리면 되는 겁니다. 충분한 답이 됐습니까?”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기자가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앞으로 훈련은 어디서 하실 생각이십니까?”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이 올해는 애리조나로 전지훈련을 온다고 들었습니다. 2월 23일 전까지는 옛 소속팀에서 훈련을 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이제 필라델피아 선수입니다. 기왕이면 필라델피아 선수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절 원하지 않는 선수들도 있는 것 같은데, 불청객이 가 봤자 분위기만 흐려지지 않겠습니까?”
불과 몇 달 전, 한국 야구를 깔 본 조시 빌라가 그곳에 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건네야 하나.
그쪽이 먼저 사과를 하는 게 예의, 이인영은 그 전에는 서로 얼굴 보고 웃을 일 없을 거라며 철벽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