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이별은 또 다른 시작 (5)
찰칵~ 찰칵~
이곳은 경기를 앞둔 라이온즈 파크, 이인영은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이곳에 돌아올 수 없는 선수, 그 옆에 앉은 차명석 단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응했다.
“단장님, 이인영 선수의 포스팅 신청을 공식으로 허락하시는 겁니까?”
“예, 이인영 선수는 그동안 한국프로야구에서 출중한 기량을 뽐냈습니다. 그 재능을 해외에서도 재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관심을 보인 구단이 제법 있다고 들었는데, 이 자리에서 공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일단 메이저리그의 뉴욕, 보스턴, 볼티모어, 디트로이트에서 정보 공개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도쿄 자이언츠, 나고야 파이터스 그리고 도호쿠 라이온즈에서도 관심을 보여 왔습니다.”
술렁이는 취재진, 메이저리그 구단은 그렇다고 쳐도 일본 구단들까지 달려들 줄은 예상 밖이었다.
기자들이 퍼트린 소문이 아니라 단장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 신빙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인영 선수, 혹시 메이저리그 진출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메이저리그 구단 쪽에서 만족할 만한 오퍼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일본으로 방향을 틀 생각도 있으신 겁니까?”
“일단 메이저리그 진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잘 안 된다면 그 다음은 나중에 생각할 생각입니다.”
다시 울려 퍼지는 카메라 플래시, 이인영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전에 은퇴는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래도 오늘이 대구에서 치르는 마지막 게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실 생각이십니까?”
“평소대로 할 겁니다. 경기 끝나고 눈물 짜는 장면을 기대하셨다면 그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묵직하게 날아든 한 방, 기자는 서둘러 다른 질문을 던졌다.
“큰 도전을 앞두고 계신데, 각오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음… 일단 그동안 저에게 많은 환호와 사랑을 보내주신 팬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멋진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하지만 떠나는 자만이 세상의 넓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제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냥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으로 택한 길이 아니라는 뜻,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기자들은 속보 형식으로 기사를 올렸다.
[일본 구단은 왜 끼어들었는지 이해가 안 되네. 솔직히 이인영 정도면 누가 봐도 NPB는 점령할 수 있지 않나?]
-> KBO와 NPB 투수진의 차이는 명확해, 성공할지 누가 알아?
-> 근거 자료도 있어. MLB는 평균 투수 기대 승률이 0.5인데, NPB는 0.45다. 투수력만큼은 일본 야구가 MLB 거의 따라잡았다는 뜻이지. KBO는 3.8밖에 안 된다. 이인영이 NPB 간다고 성공한다는 보장 없어.
-> 국제대회에서 일본 투수들 개 패듯이 두들겼는데 무슨…
-> 그건 단기전이잖아. 조건만 괜찮다면 일본 야구 거쳐서 MLB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연봉 높일 수 있는 비결이고
-> 개소리 작작해라.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관심 보였다는데 너희들은 일본 갈 거냐?
-> 닥치고 메이저리그지, 일본 거치면 100% 메이저리그 못 간다. 간다고 해도 일본에서 단물 빠지고 가는 거라 비추
일본 구단까지 끼어들면서 관심이 급증된 행보, 하지만 월드스타는 평소처럼 경기를 준비했다.
그건 팬들도 마찬가지,
떠들썩한 환호로 해외진출을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우리가 평소처럼 해야 떠나는 사람도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가 되자 이인영은 자기 자리로 이동, 등 뒤에서 간간히 응원의 목소리가 들여왔지만 애써 외면했다.
“자, 성운 라이온즈의 스타팅 멤버를 살펴보시죠. 1루수 김상규, 2루수 임완수, 유격수는 홍현구… (중략)… 오늘은 이인영 선수가 우익수로 출전합니다.”
“차명석 단장이 오늘 경기 전에 이인영 선수의 해외진출을 최대한 돕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익수로 출전시킨 것도 그런 이유겠죠.”
미국 현지에선 이인영의 포지션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간간히 1루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주 포지션은 좌익수,
그런데 그 자리가 정말 최선인가.
아마추어 리그에선 우익수가 가장 수비를 못하는 선수로 낙인이 찍히지만, 프로레벨로 올라가면 우익수의 중요도는 급상승 한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좌타자 비율이 33%나 되는데, 어깨가 약한 선수가 우익수를 보면 내야를 빠져나가는 짧은 안타에 1루 주자가 3루까지 손쉽게 진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주자가 2루에 있느냐 3루에 있느냐는 수비하는 입장에선 천지 차이, 작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어깨가 약한 우익수 때문이 2타점 희생 플라이가 나오기도 했다.
‘송구보다 중요한 건 타구를 처리하는 능력이지.’
메이저리그는 최근 우익수에게 넓은 수비범위와 타구 판단 능력까지 요구하고 있다.
어깨를 과시해서 주자를 잡아내는 게 우선인가, 아니면 타구가 내야에 떨어지기 전에 잡는 게 낫나.
중견수만큼은 아니지만 이제는 우익수에게 강한 어깨와 넓은 수비범위까지 요구하는 시대, 수비가 좋은 우익수가 FA 시장에서 고평가를 받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인영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 어차피 보낼 선수라면 스카우터 앞에서 상품 가치를 더 높이는 게 좋지 않겠나.
스카우터들은 차명석 단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챘다.
[따악~!!]
“센터 쪽 높게 가는 타구!! 계속 가는 이 타구를 우익수가 잡아냅니다!! 투 아웃, 이인영 선수가 멋진 수비를 보여줍니다.”
“역시 수비 범위가 넓어요. 거기다 펜스에서 2루로 다이렉트 송구가 가능할 정도로 어깨가 좋거든요. 우익수로 많은 경기를 뙨 것도 아닌데, 역시 다재다능한 선수입니다.”
필라델피아의 스카우터 잭 앵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략 6년 5천 8백만 달러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가치가 더 올라가지 않겠나.
외야뿐만 아니라 1루 수비도 된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다른 구단은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분명한 건 포스팅 시스템에서 2등에겐 기회가 없다는 것, 정말 저 선수를 원한다면 제시할 수 있는 최대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일본 진출 가능성까지 열려 있으니 싼 값을 제시하면 바로 퇴짜를 놓겠지, 국 구단의 눈치 싸움은 초반부터 거칠게 전개됐다.
‘저 정도 수비만 보여준다면 랜돈은 지명타자로 돌려도 되겠어.’
뉴욕의 스카우터 시어도르 시모어는 머릿속에서 내년 시즌 로스터를 정리했다.
공격은 되지만 수비가 안 되는 대니얼 랜돈, 랜돈의 형편없는 송구 때문에 뉴욕은 12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 기회를 날려버렸다.
쓸 만한 수비에 공력력까지 갖춘 야수를 원하고 있는 뉴욕, 이인영은 그 기준에 딱 맞아 떨어졌다.
문제는 역시 돈, 팀 연봉을 계산하면 6년에 6천 3백만 달러까지는 줄 수 있다. 그래도 안전하게 잡으려면 6년 7천만 달러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볼티모어와 디트로이트도 관심은 있지만 많은 돈을 주기 어려운 입장, 외야진이 포화 상태에 이른 보스턴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마인드로 응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뉴욕과 필라델피아가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 이인영은 타석에서도 인상적은 모습을 보여줬다.
[따아악~!!]
“밀어 친 타구가!! 좌측으로!! 멀리!! 펜스를 때립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홈으로!! 들어오는 군요!! 성운 라이온즈가 선취 점을 올립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41번 째 2루타!! 올 시즌도 100개의 장타를 기록합니다!!”
“특유의 밀어치기 타법이 나왔죠. 지금 보시면 오른 팔은 타구를 보내는 운전대 역할만 했습니다. 한 팔로 쳤는데 이런 파워가 나온다는 거예요.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렇게 칠 수 있는 타자는 몇 명 없을 걸요?”
“하하~ 박한우 위원님은 오늘 특히 홍보에 적극적이시군요.”
“당연하죠. 이인영 선수가 얼른 메이저리그로 가야 제가 마음 놓고 편파 해설을 할 거 아닙니까?”
박한우 위원은 국내 야구중계에서 MLB 해설로 갈아타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양아들이 미국으로 가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당당하게 편파 해설을 할 수 있는 기회, 이인호는 그 옆에서 침묵을 유지했다.
설마 했는데 점 점 현실화 되는 아들의 해외 진출, 나도 아들 따라 MLB 중계로 옮겨가야 하는 건가.
PD를 통해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따악~!!
“와아아~!!”
후속 타자 돈 부머의 안타, 좌익수 옆에 떨어진 안타지만 일찍 스타트를 끊은 이인영은 홈까지 내달렸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 그 열정에 홈팬들은 월드스타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이 날 이인영은 볼넷 하나 포함 2안타 2타점 경기를 펼치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성운 라이온즈는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체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승률은 0.482, 반타작도 못 거둔 시즌, 베이스 라인에 늘어선 선수단은 관중석을 향해 절을 올렸다.
형편없는 시즌을 마지막까지 지켜봐준 팬들에 대한 예우, 더그아웃으로 내려온 차명석 단장은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지난 6년 동안 대구 팬들에게 기쁨과 추억을 안겨준 선수의 앞날을 축복하는 행사, 감사패와 꽃다발을 받은 이인영은 마이크 앞에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해야 되는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시간을 끌었다.
“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각을 정리했을 뿐인데 눈물을 흘리는 걸로 몰아가는 팬들, 고개를 든 월드스타의 얼굴엔 슬픔 대신 환한 미소가 번졌다.
“6년 전만 해도 저는 앞날이 불투명한 유망주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많은 기회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팀 구단 관계자들, 감독님, 코치님, 팬 여러분들 그리고 기타 등등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야!! 기타 등등은 뭐야?”
“그거 설마 우리 뜻하는 거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동료들의 질타,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저런 농담을 해야 되나.
덕분에 딱딱한 분위기는 풀렸지만 곧바로 진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내년 시즌은 저 녀석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한다니, 솔직히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별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을 의미, 이인영은 다시 한 번 도전 의지를 밝혔다.
“저는 이제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인연을 맺겠죠.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라이온즈 팬 여러분들만큼 열정적이고 훌륭한 팬들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겁니다. 훗날 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가 되면 제 몸은 예전 같진 않겠죠. 만신창이가 된 몸이라도 팬 여러분들과 라이온즈가 절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끝내 숨기지 못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 장면을 지켜본 팬들은 이인영의 앞날에 축복이 있길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