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별은 또 다른 시작 (4)
“이런 사진이 있었나?”
이곳은 대전 시내의 한 아파트,
동산고 야구부 감독에서 은퇴한 김재호 씨는 낡은 사진첩을 꺼내들었다. 옛 제자들과의 추억이 담긴 기록, 그 중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그래, 이런 시절도 있었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당시 이인영은 야구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이었다.
언젠간 프로에서 큰 활약을 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기대를 넘어선 제자, 녀석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너 이 사진 기억 나냐?]
“당연하죠. 그 날 무슨 훈련했는지도 기억나요.”
이인영은 그날 감독에게 배트 그립을 잡는 방법을 배웠다.
타격에선 스윙 각이나 중심이동도 중요하지만 배트를 잡는 모양도 중요하다.
보통 거포들은 노브를 잡고 스윙을 돌린다. 배트를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고, 손목을 강하게 틀어 파워를 실어주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영은 그날 감독에게 배트를 짧게 잡고 치는 법을 배웠다.
새끼손가락만 노브에 걸친 채 스윙, 힘을 실을 때 양팔을 다 쓰지도 않았다.
힘은 왼팔에서 나오고 오른팔은 타구가 날아가는 방향을 정할 뿐, 이런 타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힘이 받쳐주고 타격 센스를 갖춰야 할 수 있는 기술, 그렇게 손목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타구를 멀리 보내는 비법을 전수 받았고, 이 기술을 밀어치는 타법에 접목시켜 많은 홈런을 때릴 수 있게 됐다.
‘그래, 노력은 내가 했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곤 생각하지 않아.’
이인영은 오늘의 성공이 있었던 비결은 본인의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관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지식이 있다고 그런 기술을 연구했겠나,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리는 인생, 이인영은 그런 점에서 좋은 스승들은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재호 감독, 그리고 프로에 들어와서도 박한우, 이정준 등 좋은 코치를 만났다.
이런 인연을 만났다는 건 내 복 아니겠나, 더 큰 도전을 앞둔 월드스타는 옛 스승님께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때 가르쳐 주신 스윙 잘 써먹고 있어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솔직히 나도 네가 그걸 그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다.]
김재호 감독은 딱히 홈런을 치라고 그 기술을 가르쳐 준 게 아니다.
중장거리 타자들이 하는 스윙, 그런데 이걸 한 단계 수준 높은 기술로 승화시킨 건 제자의 노력이다.
청출어람이라고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는 법, 김재호 감독은 도전을 앞둔 제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누가 뭐래도 내가 보장한다.]
“그럼 저 메이저리그에서도 일인자 할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내친 김에 신인왕에 MVP까지 노려봐라.]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학생 시절엔 이렇게까지 칭찬을 해주신 기억이 없는데 한국에서 성공한 제자라고 너무 무리한 배팅을 한 건 아닌지,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한 번 찾아 뵐 게요.”
[그래, 손은 가볍게 하고 와도 괜찮은데 성공은 해서 와야 된다.]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이인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은사님들은 나중에 찾아뵈면 되지만, 내가 대구 팬들 앞에서 야구를 할 날이 또 올까.
은퇴는 이곳에서 한다고 결심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시즌도 이제 막바지라 마음이 복잡했다.
올 해는 팬들의 기억에 남는 시즌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걸까. 의문을 품고 출근길에 올랐다.
[라이온즈, 올 시즌은 포스트 시즌 힘들 듯]
안타깝게도 라이온즈는 작년 시즌의 영광과 멀어진 행보를 보였다.
타선은 어느 정도 해줬지만 투수진이 붕괴하며 자멸,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리그 4위를 유지했지만 8월에 내리 7연패를 한 게 뼈아팠다.
팬들 보기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겠고 도망치듯 차를 몰아 경기장을 빠져나갔던 기억,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딱~!]
“아… 이 타구가 다시 내야를 빠져 나가는 군요. 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성운 라이온즈가 선취점을 내 줍니다.”
“그러니까 이게 매 경기 반복되는 패턴이거든요. 투수진 붕괴, 수비 불안, 이러면 방법이 없습니다.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베어스를 4승 무패로 꺾은 위용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가요?”
1회 초부터 실점으로 시작,
오늘 좌익수로 출장한 이인영은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아쉬움을 온 몸으로 받아냈다.
역시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건가. 잠시 어깨가 위축됐지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쫓아냈다.
다행히 추가 실점 없이 1회 초는 마무리, 라이온즈의 1회 말 반격이 시작됐다.
최근 10경기에서 42타수 9안타 부진에 빠진 임완수 - 홍현구 조합, 이성한 감독은 과감하게 타선을 재정비 했다.
일단 최근 감이 좋은 최지환을 전진배치,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임완수를 2번으로 내리고 홍현구는 6번에서 타격감을 조율하도록 했다.
“자, 최지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05, 홈런 17개, 5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6번을 치다 1번으로 올라왔죠. 2년 차 징크스 따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해외로 진출하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선수입니다.”
하지만 최지환은 5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변화구에 당했다.
유리한 볼 카운트에선 좋은 스윙을 하지만 특유의 급한 성격 때문에 위기에 몰리면 자멸, 이인영의 자리를 넘보기엔 많이 부족했다.
다음 타자 임완수까지 땅볼로 물러나며 이인영은 텅 빈 밥상을 받아들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91, 홈런 51개, 110타점, 올해도 믿기지 않는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반기 홈런이 17개 밖에 없거든요. 최근 타선까지 침묵에 빠지면서 집중견제를 받다보니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배터리는 미련 없이 볼넷을 택했다.
작년에 당한 발목 부상 때문에 올 해는 많이 뛰지 않는 이인영, 배터리는 뛰지 않는 주자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니다.’
그런데 이 날은 조금 달랐다.
이인영은 커브 타이밍을 읽고 2루를 훔쳤고, 늘어져 있던 홈 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남은 일정을 따져봤을 때 오늘도 지면 포스트 시즌 진출은 절망적, 타석에 선 돈 부머도 집중력을 유지했다.
따악~!!
“와아아아~!!… 어??”
“뭐야 아웃이야?!!”
맞는 순간 적시타를 직감한 팬들, 하지만 몸을 날린 중견수는 잡은 공을 번쩍 들어올렸다.
2루심은 아웃을 선언,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3루를 지나 홈으로 들어왔다.
“자, 지금 이성한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 것 같은데요. 문제의 장면을 다시 돌려보겠습니다. 여기죠?”
“아~ 이건 아니네요!! 안타가 맞습니다.”
한 눈에 봐도 바운드가 되고 글러브에 들어간 공,
홈 팬들은 어처구니없는 판정을 내린 2루심과 사기 행각을 벌인 중견수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쩝~ 안 통하네.’
선화 이글스의 중견수 전인규는 태연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투 아웃이라 2루 주자는 무조건 뛰었어야 했던 상황,
하지만 오늘 2루심을 맡고 있는 채철수는 오심으로 악명이 높은 심판이라 내심 기대를 걸어봤다.
완전범죄 코앞까지 갔는데 CCTV에 걸려버린 범죄행위, 그 시커먼 속을 대략 눈치 챈 이인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백 날 해 봐라. 그게 통하나’
기술이 늘어야지 지난 6년 동안 잔머리만 늘어난 친구,
나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논하고 있는데 같은 시기에 입단한 친구는 저러고 있으니 솔직히 실망했다.
친구도 서로 레벨이 맞아야 어울릴 수 있는 법,
저런 녀석이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KBO에서 어떻게 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경기를 할 수 있을까. 수준이 안 맞아서 놀아줄 수가 없었다.
[따악~!!]
“자 이번에도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 중견수가!! 몸을 날려 잡아냅니다!! 전인규 선수의 멋진 다이빙 캐치!! 이닝이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비디오 다시 돌려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제대로 잡은 거 맞나요?”
“하하~ 지금 이인영 선수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진짜 비디오 판독 하는 겁니까?”
이인영은 허공에 계속 네모를 그렸다.
이번엔 명백히 글러브에 들어갔지만, 양치기 소년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시위를 이어갔다.
1회는 한 점씩 주고받은 양 팀, 2회는 조용히 지나갔지만 3회부터 폭풍이 몰아쳤다.
양 팀 모두 타력은 괜찮지만 투수진이 엉망, 핵전쟁이 시작됐다.
[따악~!!]
“이 타구는 오른쪽으로!! 우익수 앞에 떨어지지만!! 뒤로 공을 빠트립니다!! 그 사이 타자 주자는 2루로!! 3루를 지나 홈까지 내달립니다!! 득점!! 선화 이글스가 두 점을 더 추가하면서 11대 9로 앞서나갑니다!!”
“아~ 지금은 최지환 선수가 글러브를 너무 빨리 들었어요. 홈 승부를 하겠다는 의욕이 너무 앞섰습니다.”
대역죄인에게 쏟아지는 야유,
최지환은 평소 겁이 없는 성격이지만 이 날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어지는 7회 말 공격에서도 바깥 쪽 떨어지는 공에 삼진, 공격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음 타자 임완수는 다행히 볼넷 출루, 가볍게 몸을 풀던 해결사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타석에 섰다.
‘정말 죄송한데 한 번만 쳐주시면 안 될까요.’
최지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선배의 타격을 지켜봤다.
실책을 저지르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여기서 이인영 선배가 한 방 날려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확실히 도망쳐야지, 어중간하게 들어가면 내가 죽어.’
마운드에 선 최지용은 볼넷을 주겠다는 각오로 집요하게 구석을 공략했다.
천하의 이인영도 이런 볼 배합은 어쩔 수 없었고 결국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역전타를 날릴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정말… .”
“울지 마, 너도 실수 하고 싶어서 했겠냐.”
이인영은 눈물을 훔치는 후배를 다독였다.
홈 승부를 하겠다고 서두르다 그렇게 된 걸 어쩌겠나. 사람은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는 법, 본인도 얼마나 속이 상할까.
선수들은 물론 코치진도 최지환을 책망하지 않았다.
오늘 경기 패배로 포스트 시즌에서 더 멀어진 라이온즈, 이인영은 착잡한 얼굴로 퇴근길에 올랐다.
“저기… 죄송한데 사인 좀 해주실래요?”
눈치 없게 패배한 팀 선수에게 사인을 건네는 팬, 하지만 이인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야구공과 펜을 잡았다.
[제가 라이온즈 선수라 행복하셨나요?]
잠시 망설이던 이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사인을 하고 말았다.
6년 동안 변함없는 성원을 보내준 팬에게 하고 싶었던 말, 사인 볼을 받아든 팬은 순간 목이 턱 막혔다.
뭐라고 답은 해 줘야 할 텐데 시야에서 멀어지는 자동차, 팬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행복했지, 그런데 그런 말은 하지 마 눈물 나온다. ㅠㅠ]
-> 이인영은 올 시즌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포스트 시즌 진출 못해도 이해해 줄 수 있어.
-> 이런 선수가 다시 라이온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떠나보내자니 너무 아쉽다.
-> 그래도 팬이라면 응원해 줘야지. 나는 이인영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하고 돌아와도 무조건 응원할 거다.
-> 안 돌아 와도 좋으니까 무조건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 선수는 성공해야 됨
-> 당신은 영원한 라이온즈의 전설입니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Respect).
어째 다들 이대로 이별을 준비하는 분위기, 하지만 이인영은 마지막 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