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별은 또 다른 시작 (1)
“우승을 해도 한 것 같지가 않네요.”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인영은 친분이 있는 기자의 전화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 팀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우승은 바라지 않았다.
어느 선수가 병석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보길 바랄까. 거기다 선수들의 비 매너 플레이로 얼룩진 시리즈, 내가 원하던 우승은 이런 게 아니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건 제가 원했던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내년에는 좀 더 공정하고 긴장김 있는 한국시리즈를 치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예, 그건 그렇고 발목 부상은 어떠십니까?]
“일단 치료는 잘 받고 있습니다.”
다른 곳은 튼튼한데 왜 이렇게 발목을 다치는 걸까.
데뷔 시즌 때도 발목 부상을 당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부상, 혹시 선천적으로 발목이 약하게 태어난 건가. 이것도 의사와 상담을 나눴다.
“혹시 과거에 발목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으십니까?”
“예, 대략 3~ 4년 정도 됐을 겁니다.”
“발목 인대는 한 번 손상되면 완전 회복이 어렵습니다. 거기다 이인영 씨처럼 운동선수라면 재발률이 80%까지 올라갈 수 있죠.”
의사에 발에 따르면 운동선수의 발목부상 재발률은 일반인들에 비해 3배 정도 높았다.
더 심각한 건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도 체계적인 관리를 받지 않는 선수가 대부분이라는 것, 이인영도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열심히 뛰겠다는 의욕만 앞세웠지 몸을 보호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올 시즌 도루만 50개를 넘게 했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그동안 내 몸을 너무 소홀히 한 게 아닐지,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병원에서 재활에만 집중했다.
[나 오늘 병문안 가도 돼?]
“응, 언제든지 와.”
혜진 씨는 이날부터 병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렇잖아도 시즌 중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부상 때문에 병원에서 데이트를 해야 하는 신세, 미안했는지 월드스타는 여자 친구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퇴원하려면 얼마나 걸린데?”
“글쎄, 대략 한 달 정도?”
“으음… 그렇구나… .”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지만 뭔가 억울하다는 반응, 하지만 이것도 야구선수를 애인으로 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 진도는 언제 빼지?’
혜진 씨는 좀처럼 진전이 없는 관계에 초조해 했다.
사귄지 3달이나 됐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댄 건 며칠 안 된다. 남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면 좋을 텐데, 키스는커녕 손 한 번 잡으려는 시도도 안 하고 있고, 솔직히 약간 서운했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부족해서 그러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잡생각만 늘어났다.
‘뭐라도 좀 해야 되나?’
이인영도 내심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나도 남잔데 으슥한 곳에서 못된 짓 한 번 안 해보고 싶겠나. 하지만 발목에 깁스를 한 채 다가가는 것도 모양 빠지고, 속이 끓었다.
‘이 사람은 지금 나한테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을까?’
이인영은 스윙 거리를 재는 타자처럼 상대와의 거리를 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과감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건 쉽게 볼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 짓거리를 이 사람과 해도 되느냐는 거겠지, 마음먹고 휘둘렀는데 헛스윙이 되면 얼마나 무안한가.
내 과감한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혜진아, 우리 문자로 대화 좀 할까?”
“서로 보고 있는데 뭐 하러?”
“주위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
뭔가를 눈치 챈 혜진 씨는 휴대폰을 잡았고, 이인영은 과감하게 스윙을 돌렸다.
[넌 나한테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어?]
문자를 확인한 혜진 씨는 그제야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다면 뭐든 못할까, 신경 안 쓰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들도 있지만 두 사람은 지켜야 할 선은 지켰다.
[내 마음은 이미 열려 있어]
답장을 받은 이인영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시작한 일지만 생각할수록 민망한 짓, 일단 둘만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커튼 칠까?]
[그럼 더 수상하게 볼 텐데?]
[뭐 어때, 커튼 걷어낼 사람이 어디 있다고]
불이 붙었는지 혜진 씨는 바로 커튼을 쳤다.
점 점 가까워지는 달아오른 얼굴, 혜진 씨는 애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분위기를 풀었다.
자기가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뜻, 이런 건 별로 경험도 없고 이인영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분명 내가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오히려 역공을 당한 기분,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느낌에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까진 무리겠지, 물결처럼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무리를 한 건 아닌지, 그래도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은 뿌듯했다.
“내가 그동안 표현 안 해서 서운했어?”
“솔직히 조금 그랬어.”
“미안해, 앞으로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할게.”
“그럼 더 좋고, 빨리 부상 나았으면 좋겠다.”
어디 낫기만 하면 두고 보자는 얼굴, 역시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건가.
타석에서도 생각이 많아지면 결과가 형편없는데, 연애에서 너무 생각이 많았던 게 흠, 리미터가 해제된 두 남녀는 이날부터 적극적인 애정을 주고받았다.
남들이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광경, 그래도 은밀한 공간에서 벌이는 짓이라 더 스릴 있게 다가왔다.
* * *
[야, 조만간 만나자]
“그러죠.”
11월 말, 병원에서 퇴원한 이인영은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이어온 아이들을 만나고 나름대로 훈련을 하면서 다음 시즌을 대비, 김성태 회장과 약속했던 우승 기념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그 전에 풀고 갈 건 풀고 가야겠지, 김환희 선배의 주도 하에 라이온즈 - 베어스 선수단이 자리를 함께 했다.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내년 시즌에도 얼굴 붉히면서 갈 건가. 팬 들 앞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한국시리즈 흥행에 악영향을 끼친 것도 있고, 기자들까지 불러 정식으로 사죄를 표했다.
“제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 너무 큰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라이온즈의 최지환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선배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든 건 잘못한 일, 베어스 선수단은 박수를 치며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11년 동안 프로선수로 뛰었습니다만 이번 일은 정말 후회가 됩니다.”
2차전에서 베이스를 막는 플레이로 여론의 공분을 샀던 김동환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난 한 달 동안 평생 들을 욕을 다 먹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서로 미안해하기만 하면 의미가 없는 법, 이인영은 지난 일은 다 잊었다며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
“너 진짜 사과 받아주는 거냐?”
“네, 걱정하지 마세요. 지나간 일로 앙심 품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면 그런 좋은 경험은 하지 못했겠지, 그래도 이 자리에서 자랑할 일은 아니라 가슴에만 묻어뒀다.
“야, 너 요즘 살 맛 나지?”
“뭐가요?”
“다 알면서 뭘 그러냐?”
김환희는 피앙세를 통해 후배에게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대략 입수했다.
부상이라는 악재가 있었지만 올해도 나름 완벽했던 후배의 시즌, 거기다 다음 시즌 끝나면 포스팅 자격 얻고 메이저리그 가는 거 아닌가.
너무 완벽한 인생, 애인 두고 해외로 갈 수 있겠냐며 약을 올렸다.
‘당연히 가야지. 저 넓은 세상이 날 부르는데’
이인영은 별 말 없이 피식 웃었다.
메이저리그로 가면 애인과 만날 기회는 더 없어지겠지, 그런데 메이저리그 진출은 내 평생의 꿈 아닌가. 한국에서 대접 받으면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아직 젊은 나이라 꿈을 추구하고 싶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라이온즈 팬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국행 비행기에 발을 올릴 수 있을까.
지난 5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 커리어를 시작한 팀이라 애정은 각별했다.
‘은퇴를 하더라도 이곳에서 한다. 여기는 내 고향이니까.’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망가진 몸으로 돌아와 봤자 팀에 민폐가 되고 팬들도 실망하겠지, 그럴 바엔 깨끗하게 은퇴하는 게 낫다.
훗날 돌아와도 건강한 모습으로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게 낫겠지, 그래서 재활에 집중하는 거 아닌가. 미래를 위해서라도 술자리는 적당히 했다.
“야, 너 벌써 일어나는 거냐?”
“운동이 조금 부족해서요.”
“야,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쉬워라. 부상도 아직 안 나았을 텐데… .”
“그럴수록 움직여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먼저 일어날 게요.”
이인영은 그렇게 술자리를 파하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착실하게 재활훈련에 집중한 덕분에 부상회복은 빠르게 이뤄졌고, 12월 중순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해가 지난 1월, 연봉협상을 두고 차명석 단장과 얼굴을 마주했다.
“연봉 협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
“그렇죠.”
최대 난제는 역시 포스팅 신청, 이인영은 내년 시즌을 채우면 포스팅 신청 자격을 얻는다. 문제는 구단의 허락, 라이온즈 입장에선 보내주기 싫은 게 당연한 거다.
그리고 포스팅 신청을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이유도 없다.
상대 구단에서 터무니 없는 계약조건을 제시하면 그걸 거절하는 것도 구단의 권리, 이인영은 더 큰 무대를 꿈꿨지만 구단의 입장도 존중했다.
“단장님은 계약금이 얼마나 돼야 절 미국으로 보내주실 겁니까?”
“글쎄… 솔직히 마음 같아선 보내고 싶지 않네. 자넬 대체할 선수가 어디에 있겠나?”
“그래도 놔주셔야 돼요. 안 된다고만 하시면 저 내년 시즌에 태업할지도 몰라요.”
월드스타는 협박과 당근을 동시에 제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은퇴는 라이온즈에서 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런 말도 구단 입장에선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딱 2년만 더 뛰어줄 수 있겠나? 지금 전력에서 약간만 추가되면 3연패도 꿈은 아닐 텐데.”
“단장님, 죄송한데 저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메이저리그 가고 싶습니다. 연봉이나 다른 건 양보할 수 있으니까, 깨끗하게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명석 단장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너무도 확고한 선수의 태도, 더 설득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포스팅 총액이 8백만 달러만 넘는다면 보내주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설마 내가 그 정도 대우도 못 받겠나. 이인영은 그 정도면 납득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연봉에 대한 논의, 13억 정도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
“자네 방금 전에 양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15억 부르려다 13억으로 낮춘 겁니다. 이보다 싸게 해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차명석 단장은 쓴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우리가 협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건가. 어쨌든 계약을 마친 이인영은 SNS 통해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는 각오를 팬들에게 전했다.
[작년 시즌, 라이온즈의 우승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건 팬들의 기대와 응원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올 시즌이 끝나면 저는 대구를 등지고 새로운 출발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 해는 저와 팬 여러분들 모두의 기억에 남는 한 해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라이온즈 팬 여러분들의 자부심이 될 수 있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이 출사표는 라이온즈 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정말 올해가 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이 되는 건가. 지난 5년 동안 대구 팬들을 웃기고 울렸던 선수의 각오, 팬들의 관심은 시즌 티켓 예매율 상승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