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다 내 탓이오 (7)
[융통성 없는 용병술이 화를 불렀다.]
저주를 운운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보다 냉정하게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팬들도 있었다.
왜 베어스는 핸드볼 스코어급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가.
익명의 팬은 이재학 감독의 융통성 없는 투수 운영이 패배를 불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진호, 감강필 - 등판 기록 없음]
[원동호 - 1이닝 3실점(평균자책점 27.00)]
-> 베어스가 자랑하는 필승조의 이번 한국시리즈 기록이다. 뭐가 문제인지 이제 감이 오지?
한진호 - 김강필 - 원동호는 베어스의 승리를 책임지는 수호신, 당연히 7~ 9회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지금이 정규시즌이 아니라 한국시리즈라는 것, 경기 초반 선발투수가 흔들렸을 때 필승조를 투입했다면 악몽 같은 전개를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경기 초반에는 나름대로 팽팽하게 진행된 게임, 하지만 이재학 감독은 마지막까지 필승조를 아끼는 융통성 없는 투수기용을 선보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맞이한 3차전, 그런데 이 경기에서도 원동호가 3회 말에 3실점으로 무너지자 베어스는 말 그대로 멘탈이 나가버렸다.
타선은 3차전까지 타율 0.105로 부진에서 빠져나올 줄을 모르고, 투수진은 완전 붕괴, 솔직히 4차전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이재학 감독은 각오를 다지고 4차전을 맞이했다.
위험한 태클로 김환희를 위협한 건 성운 라이온즈도 마찬가지지만 진짜 심한 부상을 당한 건 이인영,
이것 때문에 베어스 구단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경기마저 대패를 거듭한다면 지난 5년 동안 힘들게 쌓아올린 왕조의 위엄은 뭐가 되는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4차전, 3차전에서 무너진 원동호를 제외하고 모든 투수진을 불펜에 대기시켰다.
‘마지막까지 방심은 금물, 그때그때 맞춰간다.’
성운 라이온즈의 이성한 감독도 각오를 다지고 4차전을 맞이했다.
단기전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감독의 융통성, 성운 라이온즈는 베어스처럼 필승조가 확실하지가 않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덕분에 훨씬 유연하게 투수 기용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베어스와 달리 승리의 공식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시작했군.’
한편, 이인영은 병원에서 한국시리즈 4차전을 지켜봤다.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내가 없어도 팀이 승리를 한다는 건 다행, 뜯어놓은 과자봉지도 잊고 게임에 집중했다.
“자, 오늘 성운 라이온즈는 이동찬 선수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이번 시즌 25경기 출장, 7승 8패 평균자책점 4.73, 데뷔시즌 치고 나름 훌륭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최고 구속이 145km 정도 되는데, 타석에서 보면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라고 하죠. 우타자 상대로 던지는 슬라이더도 헛스윙을 끌어내기엔 부족합니다. 기록으로 봐도 땅볼 비율이 더 높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는 투수입니다. 일반적으로 슬라이더는 타격이 되면 장타가 될 확률이 높거든요. 그런데 이 선수는 땅볼 유도율이 높습니다. 참 도깨비 같은 선수에요.”
이동찬은 특유의 장점으로 베어스 타선을 요리했다.
날카롭다고 표현하기엔 민망한 궤적, 그래도 철저하게 바깥쪽을 노리는 빠른 볼과 낮게 유지되는 슬라이더를 활용해 많은 땅볼을 이끌어 낸다.
그만큼 안타를 내줄 확률도 높지만 수비가 받쳐주고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꾸역꾸역 버티는 편,
베어스 타선은 이동찬을 무너뜨리기 위해 초반부터 적극적인 스윙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러지?’
거짓말처럼 야수 정면으로 향하는 타구,
아직 초반이지만 지난 3경기에서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한 베어스 타자들은 조급증에 시달렸다.
역전의 용사들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전개,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얼씨구?’
3번 타자 페르난데스는 초구부터 밖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돌렸다.
원래 바깥쪽 변화구에 약점이 있는 스타일이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따라 나와선 안 될 공이다.
이렇게까지 팀이 망가질 수 있는 건가.
베어스에 비해 절대적으로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라이온즈, 하지만 거듭된 승리로 선수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다.
반면 거듭된 패배로 자신감이 망가진 베어스, 이인영은 포스트 시즌에서 연패가 강팀을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이번 일로 확실히 개달았다.
‘당신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
마침 이재학 감독의 얼굴이 중계카메라에 비쳤다.
이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순 없지만 원래 감독은 책임을 지는 자리 아닌가.
이번에는 어떻게 행동할지,
3회 말 성운 라이온즈가 1사 주자 1 - 2루 기회를 잡자, 이재학 감독은 선발을 끌어내리고 불펜에 신호를 줬다.
“아, 여기서 투수를 교체하네요? 조금 이른 것 아닙니까?”
“글쎄요. 한진호 선수가 지난 18일 동안 등판이 없었거든요. 경기 감각이 조금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올라왔습니다.”
한진호는 올 시즌 83경기 등판, 9승 3패 평균자책점 2.38을 기록했다.
83경기 등판은 KBO 역사상 역대 3번 째 많은 기록, 특히 마무리 김강필이 등 부상으로 잠시 로스터에 빠져 있을 때 마무리 역할까지 하는 강행군을 거듭했다.
미친 듯이 달리다 보름이 넘는 기간을 쉬고 올라온 경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따아악~!!]
“배트를 던졌고!! 이 타구는 계속 뻗어!! 좌중간 담장을 넘어~~ 갑니다!!!! 김상규 선수의 쓰리 런 홈런!!!! 한진호 선수까지 무너져 내립니다!!!! 베어스의 침몰!!!! 날개 없는 추락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이재학 감독이 정규 시즌에 한진호 선수를 너무 무리시켰습니다. 거기다 18일 만의 등판… 감각이 약간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고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한 방은 너무 크네요.”
베어스도 벤치도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는 분위기, 따라붙겠다는 기력도 잃었는지, 선수들은 얼빠진 플레이를 반복했다.
‘내가 그 때 참았어야 했는데… ’
한편, 출장정지를 당한 탓에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김환희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누가 봐도 뚜렷해진 내야 구멍, 그동안 김환희의 엄청난 수비 범위에 막혀 있던 라이온즈 타선은 보란 듯이 밀어 쳐서 안타를 뽑아냈다.
잔펀치의 마무리는 김상규의 화끈한 쓰리 런 홈런, 지난 3차전에서 3회에 우르르 무너진 베어스는 4차전에서도 똑같은 경기를 반복했다.
모든 투수진을 총 동원해 뒷수습에 나섰지만 그런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니고, 베어스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따악~!]
“유격수 정면!! 2루에 송구!!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병살타!! 페르난데스는 오늘도 득점권에서 범타로 물러납니다!!!”
“눈에 보이니까 휘두르는 거죠. 만만하니까 건드리고 있는데,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페르난데스는 1루까지 반도 안가고 등을 돌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까지 던져버린 용병의 돌발행동, 코치가 나태한 플레이를 지적하자 페르난데스는 폭발했다.
“You think the whole thing is totally my fault?”
= 지금 이게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사실 페르난데스는 베어스 코치진에 불만이 많았다.
나는 지명타자로 뛰고 싶은데 계속 외야로 돌리려는 코치진, 심지어 수비를 못한다고 코치에게 면박을 당한 적도 있다.
5년 동안 베어스에서 뛰며 4번이나 우승에 일조했는데 날 전혀 배려하지 않는 코치진, 폭발한 페르난데스는 좀 진정하라는 통역의 만류도 무시하고 코치 얼굴에 폭언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날 존중하지도 않았잖아?!! 팀이 깨지고 있는 게 내 탓이야?!! 투수가 얻어터지는 것도 내 탓이고 지고 있는 것도 내 탓이지?!! 너희들은 그냥 XX이야!! XX같은 놈들!! 나는 이 팀이 XX같이 싫어!! 난 이제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페르난데스는 물통을 뒤엎고 그대로 더그아웃 통로로 사라졌다.
우승할 때는 서로 웃으며 그러려니 넘겼던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한 상황, 이 장면은 중계카메라를 통해 한국 전역으로 생중계 됐다.
결국 이날 베어스는 4차전마저 4대 0으로 패배, 우승을 확정지은 라이온즈 선수단은 마운드에 모여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도 저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
병원에 누워있던 이인영도 소소한 박수로 팀의 우승을 축하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어지는 승장 인터뷰에 귀를 기울였다.
“이성한 감독님 커리어 첫 한국시리즈 우승 축하드립니다.”
“예… .”
“지금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성한 감독은 리포터의 질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베어스에서 타격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네가 한 게 뭐가 있느냐는 팬들의 조롱을 받으며 퇴장, 그런데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이렇게 화려하게 비상할 줄이야.
솔직히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던 게 사실, 모든 공을 팬과 선수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지금 이인영 선수가 병원에 누워있는데요. 그 선수가 1 - 2차전에서 기록한 결승홈런 덕분에 팀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인영아!! 우리가 이겼다!!”
“보고 있냐?!! 복수는 너의 것!! 아니!! 우리의 것!!”
이때 임완수와 홍현구가 인터뷰에 개입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뒤를 잇는 김상규와 돈 부머의 승리 세리머니, 동료들의 위로 공연에 이인영도 서운한 마음을 풀어냈다.
승리의 기쁨이 있으면 패배의 슬픔도 있는 법, 경기가 끝난 후, 이재학 감독은 기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한 해 동안 변함없는 성원을 보내준 베어스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 한해. 이건 모두 내 탓이라며 용서를 구했다.
“선수들은 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 책임입니다. 모든 비난은 제가 받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게 패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아~ 글쎄요… 베어스는 이번 시리즈에서 1점을 내는 동안 32점을 내 줬습니다. 패배원인을 따지는 게 무색한 졸전이었습니다. 거기다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것도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이재학 감독은 페르난데스를 무리하게 외야로 돌린 것과, 일부 투수들을 혹사 시킨 것도 인정했다.
지난 5년 동안 잘 버텨줬지만 이제는 한계였던 불펜 진,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내 실책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뭣보다 저희는 깨끗하게 경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큰 부상을 입은 이인영 선수에게도 이 자리에서 사죄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재학 감독은 정식으로 용서를 구했다.
김동환이 1루 베이스를 막은 건 사실 감독의 지시였다.
라이온즈 선수들이 거칠게 나오기에 우리도 기 싸움에서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플레이를 지시한 것,
하지만 되돌아보면 정규리그 1위 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 이재학 감독은 화려한 커리어에 최악의 오점을 남기고 감독에서 사퇴했다.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한 순간에 오판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한국시리즈, 적장이지만 이인영은 씁쓸한 얼굴로 TV 시청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