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다 내 탓이오 (5)
“자, 성운 라이온즈의 1회 초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1차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습니다.”
“바깥쪽 공을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냈죠. 그 기회가 이인영 선수의 만루 홈런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딱~!!]
“다시 잡아당긴 타구가!! 깊숙한 곳으로!! 던지지 못합니다!! 선두 타자 출루!! 성운 라이온즈가 1회부터 기회를 잡습니다!!”
“임완수 선수가 이번 포스트 시즌 들어서 강하게 치는 타구가 늘어나고 있거든요. 지금도 타구가 수비에 걸리긴 했지만 강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어요.”
안타를 쳤지만 임완수는 약간 찡그린 얼굴로 1루 코치에게 보호대를 건넸다.
베이스를 사수해야 하는 1루수와 그걸 뚫어야 하는 타자, 급박한 상황에서 서로 충돌이 나올 수가 있다.
그래서 주자는 베이스 끝을 밟는 게 정석, 다만 베이스가 워낙 딱딱하기 때문에 잘못 밟으면 발이 접질리는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다.
그걸 다 감수하고 뛰는 경기,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 아픈 척 없이 플레이를 이어갔다.
다음 타자 홍현구는 2구를 때렸지만 중견수 정면, 1사 주자 1루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자, 지금 수비 위치를 보시죠.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유격수가 2루 베이스 뒤에 있네요. 이게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프트는 좌타 슬러거에게 적용된다.
우타가 들어서면 1루수는 무조건 베이스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우타 를 상대로 시프트를 시도하면 오히려 내야 구멍이 넓어진다.
하지만 좌타자는 아니다.
3루수가 베이스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4명의 내야진이 생각보다 촘촘하게 그물망을 짤 수 있다. 물론 이것도 타자의 성향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내야 땅볼이 많고 당겨 친 타구 비율이 높은 좌타자는 유독 시프트에 약점을 보이기 마련, 하지만 타자 밀어 칠 줄 안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인영은 올 시즌 당겨 친 타구 타율이 0.393, 밀어 친 타구도 0.363을 기록했다. 거기다 발도 빠른 편, 좌타라도 이런 선수에겐 시프트를 거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게 현장관계자들의 말이다.
그런데도 시프트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인영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몸 쪽 이구나.’
몸에 맞는 공이 나오더라도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겠다는 뜻, 주사 한 방 맞을 각오를 다졌다.
“몸 쪽!! 참아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이렇게 몸 쪽 높게 공이 날아오면 피하려다 무게중심을 잃으면서 스윙을 하는 선수들이 많거든요. 몸 쪽을 예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박한우 위원님께서는 그런 것 까지 생각을 하십니까? 선수시절 때도 그러셨나요?”
“그렇죠. 제가 봤을 때 지금 볼 배합 읽혔어요. 다시 몸 쪽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올해 프로 11년 차에 접어든 오건무 포수는 타자의 자세에 식은땀을 흘렸다.
몸 쪽으로 바짝 붙었기에 망정이지 약간 몰렸으면 바로 배트가 나갔겠지, 어제 맞은 만루 홈런도 몸 쪽 승부가 어긋나면서 맞았다.
몸 쪽 승부를 하겠다는 벤치의 뜻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위험하다는 걸 직감했다.
‘이번만은 제 뜻대로 해야겠습니다.’
다시 몸 쪽 승부 사인이 났지만 오건무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차라리 볼넷을 주는 게 나은 상황, 쓰리 볼이 되자 오건무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타석에는 우타 돈 부머, 시프트를 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베어스 내야진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따악~!!]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1사 주자 1 - 3루 기회가 이어집니다!! 성운 라이온즈의 선취 득점!! 오늘 경기도 심상치 않게 흘러갑니다!!”
“중심타선이 강하긴 강하네요. 베어스가 정규 시즌에도 이렇게 초반부터 밀리는 모습은 거의 없었거든요. 라이온즈가 말 그대로 칼을 갈고 나왔습니다.”
적시타를 친 돈 부머는 동료들을 향해 하트 세리머니를 날렸다.
얼굴은 무섭게 생겼지만 마음만은 유리처럼 세심한 남자, 선수들도 손하트를 날리며 애정을 표했다.
‘조금 과격하게 나갈까?’
돈 부머는 1루와 약간 거리를 뒀다.
병살을 막기 위한 과감한 주루가 필요한 상황, 하지만 어제 최지환이 김환희에게 강한 슬라이딩을 한 사건 때문에, 여론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또 강한 슬라이딩을 하면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팀 승리가 우선이라 다른 건 잊었다.
[딱~!!]
“유격수 정면!! 2루로 송구!! 다시 1루에서~!! 세이프 입니다!! 세이프!!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2대 0이 됩니다!!”
“지금도 약간 충돌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김환희 선수가 이번 시리즈에서 수난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된 성운 라이온즈의 비 매너 플레이, 홈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김환희는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제처럼 대놓고 방해를 하는 건 문제가 있지만 돈 부머는 슬라이딩을 조금 깊게 했을 뿐, 주로를 이탈하진 않았다.
이런 것까지 다 따지면 어떻게 야구를 하나,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파이팅이 너무 부족한데.’
반면 베어스 이재학 감독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들 너무 얌전하게 야구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우리도 강하게 해야 하는데 이번 시리즈에선 유독 투지가 떨어지는 선수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게 뭐지?’
이어지는 후속 타자 김상규의 타석, 2루 땅볼을 때린 김상규는 1루수 김동환의 다리에 주목했다.
충돌 방지를 위해 반드시 열어둬야 하는 베이스, 하지만 김동환은 왼발로 베이스 위에 버젓이 자리를 잡았다.
잘못하면 주자가 1루수 다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직접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 2아웃이고 아웃 타이밍이라 무리한 주루는 하지 않았지만 김상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도 그렇고 초반부터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가는 양 팀, 경기는 어느덧 3회 초로 흘러갔다.
“자!! 2대 0으로 앞선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최진환 선수, 어제 경기에서는 안타 없이 1볼넷을 기록했습니다.”
“승부욕이 굉장히 강한 선수죠. 어제도 팬들과 잠시 부딪치는 모습을 보였고, 슬라이딩도 과격했는데 조금 차분해 져야 합니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계속 가는 데요?!! 좌측 담장 위로 넘어~ 갑니다!!!! 최진환 선수의 솔로 홈런!! 라이온즈가 베어스의 철벽 마운드를 다시 한 번 두들깁니다!! 스코어 3대 0!!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홈런입니다!!”
“거의 두 달 만의 홈런 아닌가요? 그런데 정말 결정적인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최진환은 별 다른 세리머니 없이 베이스를 돌았다.
너무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게 이인영 선배의 조언, 마음 같아선 양 팔로 허공에 원을 그리며 폴짝폴짝 뛰고 싶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후속타자 임완수까지 안타를 치면서 점 점 더 궁지에 몰리는 베어스,
이재학 감독은 여기서 투수를 교체했지만 볼넷이 나오면서 무사 주자 1 - 2루 위기가 왔다.
거기다 타석에는 이인영, 연이은 악재에 홈팬들이 점거한 관중석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거 못 막으면 진다.’
이재학 감독은 오건무에게 몸 쪽 승부를 지시했다.
절대 도망가선 안 되는 상황, 항명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오건무는 지시를 어기지 않았다.
딱~!!
“아!!”
당겼지만 2루수 정면으로 간 타구, 이인영은 병살을 막기 위해 전력 질주 했다.
지금은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 이를 악물고 뛰기만 했다.
“어?!! 이게 무슨 일인가요?!! 1루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아 … 이인영 선수가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데요. 제발 큰 부상만 아니길 바랍니다.”
1루수 김동환은 여기서도 베이스 앞에 왼 발을 뒀다.
피할 틈도 없이 충돌한 양 선수의 다리, 크게 넘어진 이인영은 다리를 붙잡았고 김동환도 옆으로 쓰러지며 고통을 호소했다.
“너 자꾸 장난칠래?!!”
1회에 비슷한 일을 겪은 김상규는 누구보다 먼저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고의라고 밖엔 볼 수가 없는 플레이, 1차전부터 쌓여있던 감정은 여기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넌 뭐야?!!”
“뭐라고?!!”
최진환은 김동환을 향해 달려들다 김환희에게 막혔다.
참으려고 했는데 어린놈에게 모욕을 당하다보니 김환희도 욱했고, 양 선수가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불똥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저리 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벤치에서 뛰쳐나온 이성한 감독은 쓰러진 이인영을 보호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다친 선수가 있는데 여기서 왜 싸움질인가.
가까이 오는 선수들을 힘으로 밀어냈고, 그 사이 라이온즈 팀 트레이너는 부상선수를 살폈다.
“설 수 있겠어?”
“한 번 일어나 볼 게요.”
이인영은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걸어지긴 하는데 발목에 통증을 느꼈고, 트레이너는 벤치에 안 되겠다는 사인을 내렸다.
“아~!! 진짜!!”
이인영은 얼굴을 감싸 쥐며 더그아웃에 발을 들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박살내고 싶지만 지금은 부상을 다스릴 때,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에 올랐다.
“저 남은 경기 뛸 수 있을까요?”
트레이너를 잡고 늘어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려운 일인데 트레이너를 붙잡아서 뭘 어쩌겠는가. 너무 속상해서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왔다.
“하아~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 ”
아쉬운 마음에 혼잣말은 계속 됐다.
그 어떤 위로도 저 아쉬움과 원통함을 씻어줄 순 없겠지, 트레이너는 눈물을 훔치는 선수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너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너 몇 살이야 이 XX야?!!”
한편, 양 팀 선수들의 충돌은 더욱 격력해 졌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이지만 벤클에서는 선배고 뭐고 없었다.
다른 선수는 몰라도 태클을 건 범인을 잡아 족치겠다는 분위기,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은 김동환은 서둘러 동료들 뒤로 숨었지만 그런 태도가 라이온즈 선수단을 더욱 자극했다.
“그만!!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라고!!”
주심이 말려 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심은 양 팀 벤치에 경고를 내렸다. 선수들을 자극하지 말고 제 자리로 돌려보내라는 것,
특히 벤클을 주도하는 이재학 감독에게 주의를 줬다.
“지금 당장 선수들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으면 몰수패 조치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왜 몰수 패야?!!”
“경기 지금 몇 분째 지체됐는지 아세요?!! 정말 망신 한 번 당해보실 겁니까?!!”
주심의 엄포에 이재학 감독은 꼬리를 슬쩍 내렸다.
하지만 이때 뭔가가 날아와 이재학 감독 머리 위로 지나가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고, 깜짝 놀란 주심도 양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팬의 물병 투척, 이 날 한국시리즈 2차전은 역대 최악의 경기라는 오명을 안고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