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완전체 (10)
“야, 너 오늘 어떻게 하냐?”
“감독님도 너무하시네, 관리 좀 해주시지.”
이곳은 시즌 최종전을 앞둔 NA 자이언츠의 라커룸, 선수들은 선발 등판을 앞둔 이찬용을 동정했다.
어디까지 클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밟진 말아야 할 어린 새싹, 신인왕 후보에 오른 녀석을 성운 라이온즈와 붙여야 되나.
라이온즈는 최근 6승 1패를 거두며 정규리그 2위를 확정지었다.
특히 타격이 강한 팀, 어린 선수가 버텨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찬용은 자신감을 드러냈다.
“완봉하고 신인왕 확정할 거예요.”
“하하~ 그래, 그런 패기도 있어야지.”
“까짓 거 이인영 그 자식도 잡아버리고 네가 스타가 되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동료들 덕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그렇게 이찬용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신인왕 도전에 나섰다.
“자, 이찬용 선수가 시즌 23번 째 선발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34경기 출전해서 9승 7패 평균자책점 3.88, 139이닝 동안 볼넷 84개, 탈삼진은 142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고 140km 중반의 포심, 커브, 슬라이더가 주무기죠. 지금 9이닝 당 탈삼진이 9.19개나 되는데 KBO 전체 4위입니다. 엄청난 구위를 보여주고 있어요.”
“다만 제구가 엉망이죠. 9이닝 당 볼넷이 5개를 훌쩍 넘어가는데, 이건 아쉽습니다. 볼넷만 줄였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뒀을 텐데 말이죠.”
주심의 콜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라이온즈의 선두 타자는 임완수, 145km가 넘는 묵직한 직구에 연거푸 파울이 나오자 김성일 포수는 다시 빠른 볼을 요구했다.
따아악~!!
“어?!!”
3구 타격, 낮고 빠르게 날아간 타구는 좌측 담장을 살짝 넘어갔다.
임완수의 시즌 5호 홈런,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맞은 홈런이라 슈퍼루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호기 있게 완봉승을 예고했는데 한 타자 만에 무너진 꿈, 그래도 다음 타자 홍현구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게 문제죠. 잘 던진다 싶어도 갑자기 릴리스 포인트를 잃어버려요. 아무리 경험이 많은 포수라도 이렇게 제구가 흔들리면 별 방법 없습니다.”
이찬용은 4구와 5구를 바깥쪽 꽉 찬 곳에 집어넣어 투 볼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었다.
그렇게 욕을 했는데 갑자기 회복된 제구력, 이런 선수는 처음이라 박한용 위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뭐야?’
홍현구는 결국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고, 대기 타석에서 승부를 지켜본 이인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쓰리 볼에서 삼진을 잡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진 녀석인가.
어쨌든 빠른 볼은 쓸 만한 선수,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선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볼~ ”
또 흔들리기 시작한 제구, 카운트가 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되자 이인영은 스트라이크 존을 바깥쪽으로 좁혔다.
이런 때는 가운데로 우겨넣는 투수들이 많지만 저렇게 제구가 엉망이면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가운데는커녕 머리로 공이 날아오길 않질 바랄 뿐, 바깥쪽으로 빠지는 3구도 골라냈다.
“아~!! 씨!!”
결과는 스트레이트 볼넷, 이찬용은 글러브에 얼굴을 처박고 아쉬움을 표했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그림은 헛스윙 삼진인데 너무 다른 이상과 현실, 다음 승부를 기약했다.
‘저러면 더 뛰기 쉽지.’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자연스럽게 리드 폭을 벌렸다.
이찬용은 레그 킥이 거의 없는 투구 폼,
레그 킥을 반드시 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중심이 빨리 넘어오면 주자 입장에선 타이밍 잡기 딱 좋다.
투구가 시작되면 견제 전환이 어려운 폼, 적당히 기회를 엿보다 2루로 뛰었다.
“뛰었어요!!”
“2루에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48번째 도루!! 질주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계속됩니다!!”
“이인호 위원님, 지금 도루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좌투수 상대로 도루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은 초구부터 뛰어버렸거든요. 뭔가 약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자이언츠의 2루수 박이찬은 좀 천천히 하라며 이인영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타격 7관왕을 예약해 뒀는데 어린 선수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가. 하지만 KBO의 왕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너무 빈틈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네요.”
“그렇게 도루하기 쉽냐?”
“그냥 도루 헌납하는 수준이잖아요. 코치들이 뭐라고 안 해요?”
박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속도 빠르고 좌완에 중심이동이 빠른 투구 폼, 저런데 도루를 하기 쉽다는 건가.
투수코치들도 칭찬하는 퀵 모션을 보유한 녀석인데 이인영 앞에서는 그냥 먹잇감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어쩌다 그런 거겠지. 설마 또 도루하겠어.’
그러려니 웃어넘긴 도발, 그런데 이인영은 두 번째 타석에서도 볼넷으로 걸어 나가더니 바로 2루를 훔쳐버렸다.
시즌 49호 도루 달성, 이찬용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내가 뭘 잘못 했지?’
코치들도 칭찬했던 퀵 모션과 투구 폼, 그런데 이렇게 눈 뜨고 코를 베일 수 있는 건가.
어쨌든 2루로 갔으니 지금은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다음 타자 돈 부머에게 집중했다.
“또 뛰었어요!!”
“자!! 여기에서 다시!! 도루 성공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50번 째 도루를 달성하는 군요!!”
“지금은 변화구 타이밍에 뛰었죠. 볼 배합이 완전히 읽혔어요.”
타자 몸 쪽으로 떨어지는 커브,
김성일이 포구를 했지만 우타석에 들어선 돈 부머가 장벽을 치고 있어 바로 송구를 하지 못했다.
‘너 정말 못된 자식이다.’
돈 부머는 친구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는 눈빛을 보냈다.
제구 때문에 마운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 선수, 그런데 도루까지 해야 되나. 하지만 부머는 이찬용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줬다.
[딱~!]
“좌측!! 파울이군요. 승부는 이제 9구로 넘어갑니다.”
“이찬용 선수가 구위나 탈삼진 능력은 분명 뛰어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상황에선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거든요. 이런 선수는 선발보다는 롱릴리프가 어울립니다.”
볼 9개 던지게 만들고 볼넷 출루,
잠시 멘탈이 무너진 이찬용은 폭투로 3루 주자를 홈으로 보내더니 연속 폭투로 돈 부머를 3루로 보냈다.
아마추어도 비웃을 제구력, 이찬용은 4회까지 2실점만 했지만 볼넷 4개에 폭투 3개라는 기괴한 기록을 작성했다.
‘넌 솔직히 집중할 가치도 없다.’
이제 5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느슨하게 배트를 잡았다.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데 빠른 구속에 속아 연신 방망이를 돌린 동료들, 몸 쪽으로 날아오는 볼만 조심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쓰리 볼이 되자 자이언츠의 고원규 감독은 불펜 문을 두들겼다.
12년 만에 자이언츠 선수로 신인왕을 등극을 노리고 있는 이용찬, 지난 경기에서 6이닝 동안 볼넷 2개만 내줬으니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예상 못했다.
거기다 지금은 주자가 없는데도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상황, 더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결국 세 번째 타석도 스트레이트 볼넷,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이인영은 보호대를 풀며 1루로 걸어 나갔다.
스윙 한 번 안 하고 전 타석 출루, 5년 동안 뛰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어? 지금 나 비웃은 거지?’
이찬용은 그 모습을 보고 뚜껑이 열렸다.
야구 좀 잘 한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감독이 교체를 권했지만 이번 이닝만 막고 내려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그만 하자.”
“아니요.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이렇게 물러설 순 없어요.”
리그 9위를 달리고 있는 자이언츠는 이미 포스트시즌과 이별했다.
그렇다면 이찬용의 신인왕이라도 수성해야겠지, 이렇게 꼴사납게 물러난 유망주에게 표를 던질 기자들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10승 달성 욕심도 있고, 이찬용은 한번만 더 믿어달라며 애원했다.
결국 고원규 감독은 교체를 접었고, 이찬용은 4번 타자 돈 부머와 마주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곳은 1루, 견제구를 던졌지만 이인영은 무리 없이 귀루 했다.
견제와 투구가 뚜렷한데 이런 짓이 무슨 소용인가. 눈치를 살피다 시동을 걸었다.
“다시 뛰었고 ··· 2루에 안착합니다. 시즌 51호 도루 성공, 이인영 선수가 베이스를 휘젓고 있습니다.”
“목소리에 힘 좀 주시죠. 너무 톤이 낮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뛰었다 하면 성공 아닙니까? 뭔가 긴장감이 있어야 저도 목소리를 높일 텐데 ··· 어쨌든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만 도루 4개 허용, 멘탈이 완전히 부서진 이찬용은 돈 부머에게 좌중간을 넘어가는 투런 홈런을 맞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던 후배의 눈물, 자이언츠 선수들은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위로했지만 이찬용은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분노를 표했다.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잔인한 중계카메라는 그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이인영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농락할 수가 있지?]
-> 뭐가? 홈런 볼 애주라는 것도 아니고, 어린 선수면 봐줘야 돼?
-> 프로세계에 봐주는 거 없다. 얼마나 견제가 개판이면 대놓고 도루를 하냐.
-> 제구도 엉망이지, 5회도 못 채우고 볼넷 6개 줬다. 이게 투수냐?
[이찬용은 신인왕 자격 없다. 좌완선발 프리미엄 붙이지 마라. 이 자식 완전 거품이다.]
-> 9이닝 당 삼진 9개가 넘는데 거품이냐? 제구만 가다듬으면 대성할 선수다.
-> 그 제구가 엉망이잖아. 제구 안 잡혀서 사라지는 유망주가 한 둘이냐?
[그런데 이인영 오늘 좀 심하긴 했다. 도루 4개를 해버린 어린 선수가 어떻게 버티냐?]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의 플레이는 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46홈런 51도루로 마무리 한 시즌, 어느 리그를 들춰봐도 40홈런 50도루를 한 시즌에 달성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그만큼 대단한 시즌이었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신인 투수를 농락하던 모습은 말 그대로 악마,
많은 팬들은 당연한 플레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이찬용이 흘린 눈물은 많은 동정표를 샀다.
내가 어린 선수를 너무 심하게 괴롭힌 건가? 이인영은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솔직히 저는 그날 두 번째 타석 이후부터 볼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스트라이크를 전혀 못 던지는데 무슨 타격을 합니까? 그리고 이찬용 선수는 중심이 너무 빨리 넘어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공에서 손이 일찍 빠지다 보니 스피드 건에 찍히는 구속보다 체감 구속은 더 느리게 느껴졌죠. 한 마디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인영은 자이언츠 코치진도 미처 잡아내지 못한 문제점을 줄줄이 열거했다.
우리는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선수는 그걸 약점이라고 생각했을 줄이야. 매번 코치들에게 칭찬만 받았던 이찬용도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고졸 신인으로 데뷔해 신인왕 수상까지 노리고 있었으니 조금 우쭐 했던 것도 사실,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
‘내년에는 내가 이긴다.’
그렇다고 상대를 존중하진 않았다.
이런 저런 지적을 했다면 그걸 보란 듯이 수정해서 복수해주는 게 프로의 자세 아닐까. 감사의 인사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