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완전체 (8)
‘야구장은 오랜만이네.’
이곳은 대구의 라이온즈 파크, 혜진 씨는 약속대로 야구장을 찾았다.
썸남의 50 - 50 도전기로 떠들썩한 주변 분위기, 마음 같아선 이인영 홈런을 연호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속에 담아뒀다.
“플레이 볼~!!”
“와아아~!!”
1회 초, 원정 팀 NA 자이언츠의 공격으로 시작된 경기, 팬들은 경기 에 집중했지만 혜진 씨의 눈엔 1루만 보였다.
그냥 서 있을 뿐인데 저 자리에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느낌, 썸남의 사소한 손짓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정말 왔을까?’
한편, 이인영도 외야를 은근 신경 썼다.
왔다고 쳐도 그 사람은 나를 볼 수 있지만 이쪽은 아니지 않나.
뭔가 불공평한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 어디 있는지도 모르데 두리번거려서 뭘 어쩔 건가. 경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딱~!!]
“1루 땅볼, 잡아서 달려오는 투수에게 던져줍니다. 원 아웃, 이동찬 선수가 첫 아웃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최근 이인영 선수가 1루로 출장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죠. 그런데 또 저 자리가 잘 맞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왼손잡이 내야수는 1루에 송구를 할 때 몸을 틀어서 던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왼손잡이가 유리한 포지션이 있습니다. 바로 1수루죠.”
왼손잡이 1루수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2루나 3루, 홈으로 자연스럽게 송구를 할 수 있고, 뭣보다 견제를 할 때 주자를 자연태그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영은 그동안 대부분 좌익수로 출전했지만 팀 입장에선 1루수로 출전하는 게 이득, 이제는 공수주를 겸비한 완벽한 선수로 자리를 잡았다.
‘나 왼손잡이 아닌데 왜 그렇게 알려졌지?’
이인영은 정확히 말하면 양손잡이다.
태생은 왼손잡이지만 야구를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른손을 많이 쓰다 보니, 송구는 오른 손으로 하고 타격은 왼손으로 하게 됐다.
그런데 1루수로 출전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다시 왼손잡이로 컴백, 그래도 양 손을 다 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걸 아는 사람은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 정도,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어쨌든 NA 자이언츠의 1회 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성운 라이온즈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 임완수가 볼넷으로 걸어 나가고 홍현구가 안타로 밀어주는 라이온즈의 공격 패턴,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응원 단장의 구호와 치어리더의 율동에 맞춰 목소리를 높이는 팬들, 혜진 씨는 그 사이에서 눈치만 살폈다.
‘나도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
대학 축제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걸까. 커피를 홀짝거리며 약간 내려간 선글라스를 바로 잡았다.
“앗!!”
초구를 때렸는데 2루수 정면으로 가 버린 타구, 병살타가 되면서 2사 주자 3루가 됐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인영의 병살타, 혜진 씨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흘렸다. 오늘 야구가 잘 돼야 데이트 분위기가 좋을 텐데,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도도하고 차분한 가면은 벗어던졌다.
“아~!! 거기 왜 서 있는 건데?!!”
두 번째 타석은 잘 맞췄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가버렸다.
세 번째는 치겠나 했는데 땅볼, 썸남은 마지막 타석에서 볼넷 하나를 골라냈을 뿐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하루 일과를 망쳤는데 인영 씨는 데이트에서 웃어줄 수 있을까. 혜진 씨는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경기 끝나고 딴 데 잠깐 들렸어요.”
그렇게 다시 마주한 두 사람, 첫 만남 땐 자연스럽게 대화도 주고받았는데 왜 이렇게 어색한 걸까.
양쪽 모두 찬물로 민망함을 다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혜진 씨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제가 직관을 오면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제가 직관 가면 응원하는 팀은 꼭 지거든요.”
“음 …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저 솔직히 혜진 씨 경기장에 왔는지 은근 신경 쓰였거든요.”
예상 못한 고백에 혜진 씨는 얼굴을 붉혔다.
프로가 경기에 집중했어야 했는데, 어딘 가에 있을 그녀가 신경 쓰여 그러질 못했다는 거 아닌가.
저 사람도 내가 마음에 없진 않은 모양, 그렇다면 질질 끌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이날을 위해 전투화장도 확실히 했으니 승부를 보기로 했다.
“인영 씨, 오늘 저랑 술 한 하실래요? 안 좋은 기억은 날려버리자고요.”
“죄송해요. 제가 시즌 중에는 절대 술을 안 마시거든요.”
“아 … 그렇죠?”
혜진 씨는 민망함을 찬물로 다스렸다.
여자가 술 마시자고 용기를 냈는데 하필이면 이런 때 철벽을 칠 게 뭐람, 하지만 프로는 자기관리가 우선이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성과 없이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건 아닌지, 그런데 이때 썸남의 특이한 행동이 포착됐다.
지난 만남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특징,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영 씨 혹시 양손 다 쓰세요?”
“네, 그런데요?”
“저도 양손잡이에요.”
“오~ 그래요? 왜 몰랐지?”
정말 별것도 아닌 주제로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려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두 남녀는 그렇게 첫 만남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갔다.
“인영 씨는 기분 안 좋은 날 어떻게 하세요? 오늘처럼 야구가 잘 안 됐다거나 그런 날 있잖아요.”
“그러려니 해야죠.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요? 경기 보면 막 화도 내고 그러는 선수들도 있던데 … ”
“그건 화를 푸는 게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을 잘못한 거죠. 자기감정도 통제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냉정하게 경기를 하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저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부족한 점을 알고 채워나가는 것 뿐, 그런 자세를 유지해야만 프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은데 어떻게 사람이 완벽할 수 있겠나.
혜진 씨는 썸남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안 좋다고 당장 돌변할 사람은 아니라는 건데, 자기는 정 반대라 조금 걱정이 됐다.
“인영 씨, 저 고백할 거 있어요.”
“뭐가요?”
“저 … 사실 연애 경험 있어요. 없는 것처럼 연기해서 죄송해요.”
혜진 씨는 첫 만남에서 썼던 가면을 하나 벗어던졌다.
사실 이성에 관심이 많았지만 학업 때문에 관심 없는 척 했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리미터가 해제 돼 버렸다.
여자가 클럽에 왜 가겠나, 술 마시려고? 거기에 남자 있어서 가는 거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지만 몇 달 못 가 종료, 심지어 서로 욕설에 폭력까지 행사하며 안 좋게 끝을 맺었다.
평소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수 틀리면 바로 돌변하는 성격, 솔직히 첫 연애가 실패한 것도 본인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연애에선 자신을 최대한 포장하려고 했던 것, 이인영은 상대의 과거에 흥미를 보였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셨는데요?”
“그냥 모든 게 안 맞았어요. 걔가 말을 함부로 하는 편이었는데 저도 그땐 말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거든요. 그러다 뻥 터진 거죠.”
“뭐가 어떻게요?”
“어느 날 제가 요즘 너무 힘들다고 했는데, 걔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럼 너도 외삼촌처럼 자살할 거냐고 … ”
“ … 네? 뭐라고요?”
이인영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자기 여자 친구 외삼촌이 자살을 했는데, 그럼 너도 자살할 거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그건 혜진 씨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이상한 거라며 변론에 나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죠?”
“당연하죠.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X소리를 … 욕해서 죄송해요.”
내일도 아닌데 갑자기 욱하다니,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자 이인영은 바로 뒷수습에 나섰다.
그런데 죽은 삼촌을 두고 너도 자살할 거냐고 하는 말은 정말 아니지 않은가.
요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일이 그렇게 꼬인 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겠네요.”
“뭐가요?”
“그 사람이 혜진 씨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잖아요.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눈에 보이는 아부에 혜진 씨는 입꼬리를 들썩였다.
첫 남자와는 달리 말을 가려 할 줄 아는 사람, 하지만 본인도 예전엔 엄마 아빠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편이었다.
내가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상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의 일,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에 대한 배려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이 남자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우리 이제 그만 솔직해 질까요? 저는 인영 씨 마음에 들어요. 인영 씨는 저 어때요?”
“관심 있습니다.”
“그럼 사귈래요?”
“네, 그러죠.”
일사천리로 끝난 두 번째 만남, 드라마처럼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이뤄진 고백은 아니지만 이게 현실적인 남녀 관계 아닌가.
일단 호칭부터 정하기로 했다.
“제가 인영 씨보다 한 살 더 많은데 앞으로 어떻게 부를 거예요?”
“연인인데 서로 존댓말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남친한테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는 말 듣고 싶으세요?”
“훗~ 그건 좀 아니네요.”
남친의 반응에 혜진 씨는 얼굴을 붉혔다.
딱히 존대를 받겠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받아치다니, 그래도 은근 누나라고 불리고 싶었다.
“겨우 한 살인데 뭘 자꾸 그러세요.”
“그래도 누나는 누나잖아요. 저 그렇게 불리고 싶어요. 해 주실 거죠?”
“이러면 협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는데요. 사귀는 거 잠깐 재고 할 게요.”
별것도 아닌 일로 협상이 막혀버렸다.
혜진 씨는 무조건 누나라고 불려야겠다는 입장, 이인영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한 살 더 드셨으니까 저보다는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겠죠? 앞으로 뭐 해 달라 이거 해 달라 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그런 거 의외로 엄청 따지시네요?”
“따지는 게 아니라 당연한 요구를 하는 거죠. 동생 같은 누나는 사양하고 싶네요. 하지만 제 품에 의지하겠다면 그건 받아들일 게요.”
혜진 씨는 고민 끝에 누나 호칭을 포기했다.
아 남자가 내 것이 된다는데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하나. 서로 편하게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혜진아.”
“왜?”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알았지?”
가슴에 찬물도 안 젖혔는데 이렇게 치고 들어와도 되는 건가, 나이도 한 살 어린 남자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지, 혜진 씨는 답을 회피했다.
“말 했잖아. 왜 답이 없어?”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아니 먼저 사귀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준비가 필요해?”
“그래도 여자는 그런 게 아니야. 너 정말 연애 한 번도 못해 봤구나?”
“못 한 게 아니라 할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했잖아. 나는 그 날 사실대로 말 했어.”
“쳇~ 내가 그날 거짓말 했다고 삐친 거야?”
“솔직히 좀 서운하긴 해. 이제부턴 진실 된 모습만 보여줘,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니까.”
혜진 씨는 다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첫 만남 때 온갖 내숭을 떨었던 내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좀 더 알고 싶다니,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거 아닌가.
이번에야 말로 실패 없는 연애를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