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완전체 (6)
“평범하게 월급 받으면서 살고 있어요.”
허세 없이 본론만 말했다.
10억을 벌어도 어쨌든 월급 받고 사는 입장, 암컷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컷의 날갯짓도 아니고 얼마를 번다느니 우쭐거려봤자 솔직히 멋없지 않나.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지 고개만 끄덕이고 마는 상대방, 그렇게 대화는 잠시 단절됐다.
‘이제 그만 보내드릴까?’
별로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만남, 이쯤에서 그만 일어나자고 해야 되나?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이라는 게 김환희 선배의 충고, 그런데 이런 작업도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인영은 눈앞의 숙녀를 찬찬히 뜯어봤다.
‘내가 뭘 알겠어?’
투수가 던지는 공은 치고 거르는 기준이 명확하다.
공도 쳐 본 놈이 거른다고 학창시절 연애편지 하나 못 받아본 내가 무슨 선녀안을 발휘하겠나. 외모만 따지면 상당한 미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홈런을 날려야 할지 걸러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뭐가요?”
“소개팅 하는 사람들은 연애계의 마이너리거래요.”
“마이너리거요?”
“네, 정말 괜찮은 사람은 사회에서 좋은 사람만나서 사귀는데, 저희들 같은 경우는 그게 안 되니까 소개팅 하러 돌아다니는 거래요.”
계속 되는 도발에 이인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멋진 사람은 알아서 연애를 한다? 그런데 그것도 환경에 따라서 다르다. 예를 들어 야구선수는 만나는 사람이 거의 다 남자다.
만나는 여자는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잠깐 마주하는 리포터나 팬, 그런데 무슨 이성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겠나. 거기다 이인영은 대학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에 뛰어든 몸, 캠퍼스를 누비며 청춘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함부로 그 사람을 연애계의 마이너리거라고 단정 짓는 건 위험, 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런데 조건이 되도 본인이 마음이 없어서 연애를 안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전 올해 스물 네 살 밖에 안 됐는데 굳이 연애에 절박해야 하나 … 라는 생각도 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젊고 예쁘고 돈도 많은 사람들도 결혼 늦게 하는 경우 있잖아요. 소개팅 한다고 그걸 마이너리거니 뭐니 하는 건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저희는 조건은 되는데 생각이 없는 것뿐이잖아요?”
어쩌다보니 토론이 된 대화, 이인영은 순간 아차 했다.
연애를 할 조건은 되는데 생각이 없는 것뿐이라니, 결국 이 소개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몰아 붙였다.
“그리고 연애는 타이밍도 중요한 것 같아요.”
“타이밍이요?”
“정말 좋은 선수가 FA 시장에 나와도 돈을 못 받는 경우가 있거든요. 예를 들어 그 해는 포수가 별로 없다. 아니면 투수가 많이 나왔다. 시장 상황이 매번 달라요. 연애 시장도 다르지 않겠죠.”
세상에 남녀가 아무리 많다 해도, 매력적인 매물이 시장에 안 풀리는 때도 있을 거다.
아니면 과잉 공급되는 경우도 있겠지, 그 때는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눈에 띄긴 어렵지 않을까.
거기다 소개팅을 주선하는 사람도 가능한 남녀의 레벨을 맞추려고 하겠지, 인연이란 이런저런 조건과 타이밍이 맞아야 이뤄지는 것 아닐까.
지금 연애를 하든 못하든 그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인영 씨는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괜찮은 매물인가요?”
또 훅 치고 들어오는 직구, 남녀를 매물로 빗댄 건 좀 무리수였나. 민망함을 커피 한 모금으로 가라앉혔다.
“그럼 혜진 씨는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번 보고 상대를 평가하는 건 좀 성급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일단 서로 알아가는 게 중요하겠네요?”
예상도 못한 애프터 신청,
잠깐 만나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지자 이인영은 은근 신경 쓰고 있던 의문을 제기했다.
“혜진 씨는 야구 좋아 하세요?”
“네? 야구요?”
“아까 마이너리그 뭐니 하시는 거 보니까 야구 아시는 것 같은데 … .”
뜨끔 하는 얼굴, 꼬투리를 잡은 이인영은 바로 심문에 나섰다.
“솔직히 말하세요. 저 누군지 아시죠?”
“ … 데헷~ .”
웃으면 뭘 어쩌라는 건가, 하긴 소개팅을 나오는데 상대가 어떤 사람인진 대략 알고 나왔을 거 아닌가.
대화가 길어지면 꼬리를 잡히기 마련, 이제야 진실 된 대화가 오갔다.
“알면서 왜 모른 척하셨어요?”
“팬이에요~ 야구 잘 보고 있어요~ 이러면 팬이 하는 말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그리고 인영 씨도 여기에 본인 자랑하러 나온 거 아니잖아요.”
“뭐 … 그렇죠.”
“저는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배경이니 뭐니 이런 거 치우고요.”
이인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 그런데 나는 그냥 한 번 만나보겠다고 나왔다.
매너가 없는 태도, 이제부터는 진심모드로 전환했다.
“인영 씨는 혹시 따로 취미 있으세요?”
“글쎄요 … 특별히 관심 가는 건 없어요. 굳이 있다면 봉사?”
그런데 이때 뭔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보육원에 있는 그 말광량이 이름도 혜진이 아니었나?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 떨어졌는지, 사연을 털어놨다.
“제가 알고 있는 아이 중에 혜진이라는 여자 애가 있거든요. 지금 보육원에 있는 … .”
“어머? 진짜요?”
“그런데 애가 너무 일찍 철이 들었어요. 전에 제가 너 내 동생 할래? 그랬는데 다른 아이들 기회 뺏는 것 같아서 싫다고 … 그 말 듣고 마음이 찡 하는데 … 그래도 씩씩하게 지내는 거 보면 기특해요.”
“어머 … 그렇구나 … .”
혜진 씨는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연애하기 좋은 청춘, 봉사활동에 매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내 한 몸이나 챙기면 다행, 그런데도 이 사람은 돈을 벌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솔직히 대단한 일, 그래도 선뜻 그 뜻에 동참하긴 어려웠다.
봉사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 나는 그만한 여유가 있나. 이것저것 재다가 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차, 이건 괜히 말 했다.’
눈치를 살피던 이인영은 헛스윙을 했다는 걸 직감했다. 우연히 이름이 겹쳐서 생각 없이 뱉어본 말,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혜진 씨는 취미 없으세요?”
“저는 … .”
멍석을 깔아주자 이런 저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것 같은데 솔직히 재미도 없고 공감도 안 되는 내용, 그래도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며 관심이 있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오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생애 첫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인영은 차 안에서 깊은 숨을 뿜어냈다.
‘어우~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들지?’
별로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한 2분 동안 참았던 숨을 단숨에 뿜어낸 기분이랄까.
아직 연애가 고프지 않은 것도 원인이겠지, 인생은 원래 타이밍 아닌가. 조금 더 고플 때 만났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지도, 너무 생각을 많이 한 탓에 머릿속이 잠시 꼬여버렸다.
‘심심한데 장난이나 쳐야지.’
이때 떠오른 그 녀석의 얼굴, 통화버튼을 눌렀더니 바로 반응이 왔다.
[네에~ 여보세요.]
“혜진아~ 오빠야. 잘 있었어?”
[그냥 저냥 살고 있어요.]
여전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한 녀석, 이인영은 계획한 대로 장난을 이어갔다.
“혜진아, 오늘 오빠 데이트 했다.”
[데이트요?]
“응, 그런데 그 사람 이름도 혜진이었어. 오빠가 고민이 많다.”
[뭐가요?]
“오빠 연애하면 앞으로 너 자주 못 볼 거 아냐. 어느 쪽 혜진이를 택해야 할지 모르겠어.”
잠시 말이 없는 녀석, 혹시 충격을 받은 건가. 장난꾸러기 오빠는 애원하는 대답을 은근 기대했다.
[돈만 보내주시면 연애해도 되요.]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너한테 오빠는 그런 존재였어?!!”
[오빠 저 취직할 때까지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만 지키면 상관없어요.]
이인영은 충격에 빠졌다.
얼마 전 휴대폰도 개통해 주고 나름 애정을 쏟았는데, 그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다 키워놓은 딸에게 뒤통수 맞은 기분, 납득할 수 없었다.
“너 오빠 진짜 연애한다? 그래도 괜찮아?”
[해요, 어디 해 봐요.]
연애하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는 목소리, 그제야 이인영은 녀석의 본심을 알아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연애하는 게 싫었던 모양, 바로 달래줬다.
“장난 친 거야. 오빠 연애 안 해.”
[그럼 됐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
“그래~ 조만간 보자.”
기분전환에 성공한 이인영은 집으로 향하는 길을 서둘렀다.
이제 막 전반기가 마무리 됐을 뿐, 후반기 대약진을 위해 늘어진 고삐를 틀어쥐었다.
* * *
[분위기 어땠니?]
“좋았던 것 같아. 내가 다음에 만나자고 했어.”
[그래? 어머~ 그거 잘 됐네!!]
데이트를 마친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혜진 씨는 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의 약혼남은 프로야구 선수 김환희,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프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와 인연이 닿을 줄이야.
혜진 씨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실제로 보니까 되게 괜찮았어, 외모도 깔끔하고 뭣보다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게 마음에 들었어.”
[거짓말 하지 마. 걔 연봉이 얼만데? 너도 그거 은근 신경 쓰였지?]
“훗~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이제 막 첫발을 뗐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아닌가. 이러다 나중에 애프터 신청 안 하는 건 아닌지, 솔직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언니가 애인한테 바람 좀 넣어줘.”
[너 진짜 마음에 들었구나?]
“어, 놓치면 절대 안 될 것 같아.”
혜진 씨는 다음 만남을 위해 칼을 갈았다.
프로야구 선수라 당장 만나진 못하겠지만, 덕분에 나 자신을 가꿀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다음 만남에선 더욱 가다듬어진 미모를 보여줘야겠지, 지원요청을 받은 김환희도 적극적인 엄호 사격에 나섰다.
[야, 어땠냐?]
“뭐가요?”
[전쟁터에서 돌아왔으면 상관한테 보고를 해야지, 분위기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연애가 별로 안 고프다고 해야 될까 … 그냥 그렇네요.”
김환희는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 소개시켜준 사람은 이화여대에 재학 중이고 스타일이나 미모 뭐 하나 빠질 게 없다. 거기다 집안도 중산층은 되는 편, 그런데 배가 안 고프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일단 여자 쪽은 마음이 있는 게 확실, 하지만 그걸 밝혀버리면 여성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가.
최대한 돌려서 말을 했다.
[너 혹시 언제든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고 착각 하는 거 아니냐?]
“그런가요? 별로 그런 생각은 … .”
[정신 차려 인마, 세상에 아무리 여자 많아도 그런 사람 만나기 어렵다. 잘 생각해 봐]
“안 만나겠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한 번 더 만나 볼 거예요.”
소개시켜 준 사람 성의가 있지, 어떻게 한 번 만나보고 끝인가.
그리고 나쁘지 않았던 것도 사실, 시즌이 끝나면 한 번 더 만나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지금은 일이 우선이다.’
어쨌든 지금은 시즌에 집중하는 게 우선, 그래야 나도 그 사람과 당당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지 않겠나.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한 분투는 계속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