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완전체 (3)
새롭게 맞이한 시즌, 선수들은 각자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내가 뜻을 이룬 만큼 누군가는 좌절하는 법, 그게 프로의 숙명 아닌가.
치열하지만 정정당당해야 하는 승부의 세계, 팬들은 올해도 그 숭고한 혈투를 즐겼다.
[이인영, 시즌 6호 도루]
[작년 기록 이미 넘어섰다.]
이인영도 오프 시즌 동안 세운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작년 시즌 144경기에서 기록한 도루는 겨우 5개, 그런데 올해는 5경기 만에 6개를 해버렸다.
거칠 것 없는 질주에 비상등이 켜진 타 구단 관계자들, 하지만 알고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음…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역시 김성현 선수가 의식을 하네요. 하지만 여기서 볼넷은 위험합니다.”
오늘 성운 라이온즈가 맞붙는 팀은 ST 위너스, 선발투수 김성현은 첫 두 타자를 잘 잡아냈지만 귀찮은 상대를 앞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더핸드 폼이라 주자가 나가면 귀찮아지는 입장, 맞더라도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따악~!!
“쳇!!”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 조금만 정면으로 갔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기분이 상한 김성현은 포수가 던진 공을 거칠게 낚아챘다.
‘가만히 있어.’
이제 타석에는 4번 타자 돈 부머, ST 위너스 벤치는 1루 주자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금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서범윤은 송구 능력이 딱히 좋다고 할 순 없다.
그렇다면 도루 저지를 위해 한 걸음 나가는 스텝을 밟아야 하나, 하지만 이건 폭투의 위험성이 있다.
포수가 왼발에 체중을 실어둔 상태에서 옆으로 빠지는 볼에 대응할 수 있겠나. 도루 신경 쓰다 잘못하면 공짜 진루, 투 아웃인데 도루에 신경 써서 뭐하나, 평소대로 투구하라는 사인을 내렸다.
‘그럼 나야 고맙지.’
1루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이인영은 바로 2루 도루를 감행했다.
벤치의 지시대로 서범윤 포수는 송구를 하지 않았고, 무관심 도루라 기록은 올라가지 않았다.
“어?!! 여기서 또 뛰는데요?!! 포수는 이번에도 던지지 못합니다!! 이인영 선수가 순식간에 3루를 선점하는 군요!! 2사 주자 3루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짧은 안타 하나만 나와도 실점이거든요. 2루 도루는 몰라도 이건 신경 썼어야죠.”
ST 위너스 벤치는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 년 만에 쌕쌕이가 되어 돌아온 녀석, 이러면 볼넷도 마음대로 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잖아도 귀찮은 녀석이 더 성가셔 졌으니,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김성현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돈 부머는 작년 시즌 홈런은 17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0.282로 제법 준수했다.
몸은 둔해 보이는데 유연성이 좋고 팔이 길어 빠진 공도 잘 잡아당기는 편, 여기에 생산력도 나쁘지 않아 87타점을 기록했다.
2사에 주자가 3루에 있으니 무조건 달려들 텐데, ST 위너스 배터리는 일단 바깥쪽 먼 곳으로 빼 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나는 최고다…나는 최고다…”
초구를 지켜본 부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덩치는 크지만 찬스가 오면 어깨가 쪼그라드는 새가슴,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단점을 고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는데, 이렇게 하면 떨리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따악~!!
“역시 난 최고야!!”
가볍게 밀어낸 타구는 2루수 위를 넘어갔다.
돈 부머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1루에 입성, 그 사이 이인영은 홈으로 들어왔다.
“홈런을 쳐야지 왜 자꾸 도루만 하냐?”
이성한 감독은 먼 길을 돌아온 월드스타의 헬멧을 가볍게 쳤다.
개막 후 아직 홈런이 없는 녀석, 이인영은 재촉 하는 감독 얼굴 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Talk to the hand(듣기 싫어요).”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할 때 쓰는 관용표현, 이제 프로 5년 차라 메이저리그 진출이 멀지 않았다.
오프 시즌부터 시작해 지금도 틈틈이 배우고 있는 영어, 뜻을 모르는 감독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진짜 감독이고 뭐고 없는 건가. 그래도 이성한 감독은 악의로 하는 말은 아니겠거니 하며 웃어 넘겼다.
"뛰어!! 뛰어!! 뛰어!! 3루 가야지!!“
마침 이어지는 후속 타자 김상규의 안타, 돈 부머가 2루에서 주춤거리자 이인영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멈칫 하느라 2루에서 멈추고 만 대역죄인, 이인영은 왜 이렇게 느려 터졌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걸 또 좋다고 허허 거리는 부머, 덕분에 라이온즈 벤치는 오늘도 떠들썩한 하루를 보냈다.
“다음에도 뛸 거야? 나만 먹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1회 초 공격이 끝나고 2루를 맴돌던 부머는 벤치로 돌아왔다.
친구가 앞에서 출루하고 열심히 뛰어준 덕분에 부머는 올 시즌 벌써 8타점을 올리고 있다.
그에 비해 페이스가 약간 떨어져 있는 슈퍼스타, 이인영은 네 걱정이나 하라며 돌아섰다.
“지금 많이 먹어둬라. 어차피 시즌 끝날 즈음엔 내가 네 머리 위에 있을 테니까.”
“그래, 그럼 사양하지 않을 게”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초, 대기 타석에 선 부머는 친구의 타격을 지켜봤다.
현재 상황은 1사 주자 1루, 배터리가 승부를 피할 상황도 아니라 호쾌한 한 방을 기대했다.
[따악~!!]
“당긴 타구!! 1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내달립니다!! 그 사이 타자주자는 3루까지!! 아니!! 계속 달려 홈까지 들어~!! 옵니다!!!! 이인영 선수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 올 시즌 첫 홈런을 발로 장식해 냅니다!!”
“지금은 선행 주자가 거의 따라 잡힐 뻔 했어요. 홍현구 선수가 그렇게 발이 느린 편도 아닌데, 스피드의 차이가 확연히 보이네요.”
홍현구는 풀려버린 다리를 붙잡았다.
어차피 홈까지 달리려면 전력으로 뛰어야 했지만 뒤에서 무섭게 따라오는 인기척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무리를 해버렸다.
누군가 날 따라온다는 게 이렇게 소름끼치는 일이었나.
나는 1루부터 뛰었는데도 숨이 차는데 베이스를 일주하고도 앞서가는 녀석, 같은 팀이라도 두려웠다.
이 날 경기는 초반에 화력을 집중한 성운 라이온즈의 승리, 도루 2개 - 3안타 - 2타점 경기를 펼친 이인영은 수훈 선수 인터뷰에 응했다.
“이인영 선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도 놀라운 주루 플레이를 보여주셨는데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플레이를 하실 건가요?
“하이퍼 소닉으로 불릴 때까지 계속 뛸 겁니다.”
소닉은 발 빠른 캐릭터의 대명사, 스포츠 계에서 잘 뛰는 선수들은 대부분 슈퍼 소닉이라고 불린다.
소닉에도 레벨이 있는 법, 지금까지 하이퍼 소닉이라고 불린 선수는 아무도 없다.
중 2병에 걸린 소년은 아니지만 왠지 멋있는 별명처럼 들리지 않나. 팬들은 이 인터뷰를 두고 이런저런 반응을 내놨다.
[소닉은 작고 날렵하잖아. 이인영 이미지랑 좀 안 어울리는데]
[하이퍼 베어라고 불러주자, 곰이 은근 빠르거든]
-> 곰 최고 속도 48km야, 곰 만나면 죽은 척 하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지.
-> 그냥 완전체라고 부르자. 얘가 솔직히 못하는 게 뭐가 있냐?
60홈런 치는 선수가 도루까지 하면 그냥 완전체 아닌가.
하지만 소닉이라는 별명에 은근 욕심이 있는 이인영은 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뛰고 또 달렸다.
4월 동안 훔쳐낸 도루는 무려 10개, 홈런도 6개를 기록하면서 이 달의 MVP를 수상했다.
* * *
“야, 홈런이나 쳐, 무슨 도루를 하려고 그래?”
어느덧 5월에 접어든 일정, 성운 라이온즈는 홈에서 선화 이글스를 맞이했다.
경기 전 잠깐 얼굴을 마주한 두 앙숙, 전인규는 데뷔 시즌부터 정확한 타격과 뛰어난 주루 능력을 인정받아 이름을 날렸다.
홈런을 뻥 뻥 때려내는 친구에 비하면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대전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스타, 도루만큼은 내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그 영역까지 침범하자 견제에 나섰다.
“넌 어떻게 발전이 없냐? 연습 하는 거 맞아?”
이인영은 바로 독설로 응수했다.
전인규는 매년 3할 타율과 180안타, 30도루를 해 줄 수 있는 선수, 하지만 기량이 여기서 멈춰버렸다.
안타는 많이 치고 있지만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떨어져 생각보다 도루는 많이 못하는 편, 작년 시즌도 딱 30개 채우고 도루왕을 차지했다.
좀 더 좋은 타자가 되려면 출루율을 끌어올려야 할 텐데, 전인규는 일단 치고 나가는 스타일이라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요즘 투수들이 너 상대로 몸 쪽 승부하는 거 알지?”
“어”
“왜 그러겠냐? 너 알고 있잖아?”
전인규는 몸 쪽 볼에 전형적인 다운스윙을 하고 있다.
깎아 치고 있다는 것, 스윙을 빨리해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에 손목이 빨리 도는 못된 버릇이 반복되고 있다.
반면 이인영은 임팩트 후에도 오른손을 늦게 접어 돌리는 편, 그만큼 배트 헤드를 컨트롤 하는 시간이 월등히 길어진다.
그에 비해 전인규는 손목을 일찍 돌려버리니 배트 헤드를 컨트롤 할 수가 없다.
몸 쪽 변화구에 대응이 안 되는 것도 이런 이유, 이 약점을 투수들이 언제까지 지켜봐 줄까?
전문가들은 지켜봐주면 페이스가 올라올 선수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윙을 돌리는 건 팔이 아니라 허리다.
허리가 먼저 움직여야 팔도 돌아가고, 그 다음에 손목을 꺾어야 직구 타이밍에 변화구가 와도 대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세계, 전인규는 잘난 척 좀 그만하라며 푸념을 늘어놨다.
“자, 1회 초 선화 이글스의 공격으로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전인규 선수 올 시즌 타율 0.271, 홈런 없이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올 시즌은 페이스가 떨어져 있죠. 특히 몸 쪽 공에 약점을 보이고 있는데, 본인이 스스로 이겨내야 합니다.”
전인규는 친구의 조언을 떠올리며 타석에 섰다.
솔직히 자세를 의식하며 타격을 한 적은 없다. 전문가들에게 배트 컨트롤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4년 연속 3할을 칠 정도로 컨택능력도 뛰어난 편, 이런 내가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나.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 자세에 집중해 봤다.
‘으음…뭔 소린지는 알겠네.’
손목을 늦게 돌리면 자연스럽게 어퍼컷 스윙 자세가 된다. 힘이 떨어지는 내가 이런 폼으로 얼마나 효과를 낼까, 그래서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땅볼을 굴리는 타격에 집중했다.
올해도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안 풀리는 타격, 발로 안타를 만들어 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손해 보는 셈 치고 돌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음 공도 몸 쪽 공이 들어오자 허리를 한 껏 틀며 스윙을 돌렸다.
[따악~!!]
“당긴 타구가!! 우중간을 완전히 가릅니다!! 전인규 선수는 1루를 지나 어느덧 2루까지!! 3루에 들어갑니다!! 선두타자 3루타!! 선화 이글스가 좋은 기회를 맞이합니다!!”
“역시 지켜보면 올라올 선수죠.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3루에 안착한 전인규는 친구가 있는 벤치를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네 덕분에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는 놀림의 표시, 발끈한 이인영은 다음 타석에서 홈런으로 바로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