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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일인자-132화 (132/309)

132화. 완전체 (2)

“우리 올해는 조금 더 뛰어보자.”

오키나와에 둥지를 차린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이성한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3개월 동안, 라이온즈 분석 팀은 각 구단의 주전 포수가 송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분석했다.

작년 시즌 KBO 투수들의 평균 직구 구속은 143km, 이걸 기준으로 잡았을 때 공이 포수 미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0.423초였다.

여기에 포수가 2루에 송구하는 시간이 대략 평균 2.20초, 태그 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주자는 3초 안에 2루 베이스를 찍어야 된다.

물론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100m를 11초에 뛰는 선수도 2루까지 3.2~ 3.5초 걸리는데 이게 가능한가. 이론만 따지면 도루 성공률은 0%에 가깝다.

그런데 왜 잘 뛰는 선수의 도루 성공률은 80%를 상회하는 건가.

이론을 넘어서는 게 실전, 이성한 감독은 좌타자 타석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로야구 어느 무대를 둘러봐도 왼손잡이 포수는 없다.

모두 오른손잡이, 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포수는 그 자리에서 송구를 할 수가 없다.

옆으로 빠지는 스텝을 밟아주며 타자를 피해야 되는데, 당연히 송구하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좌타 앞에 빠른 주자를 배치하면 성공률은 높아지겠지.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이인영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3루 도루는 생각 안 하시나요?”

“3루?”

“네, 2루 도루보다 3루 도루가 더 쉬운 거 아닌가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상대는 자타공인 야구 천재, 이성한 감독은 의견을 구했다.

“좌타자 앞에서 도루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 팀에 좌타자가 몇 명이나 있나요?” 일단 상위 타선에선 저 밖에 없는데요? 그렇다고 홍현구 선배가 도루를 잘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뼈를 대리는 발언에 할 말을 잃은 이성한 감독, 이인영은 오프 시즌 동안 도루의 대가에게 전수 받은 비기를 풀어냈다.

“이 팀에서 가장 많이 출루하는 선수는 저에요. 그러니까 뛰더라도 제가 뛰어야죠.”

“너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다칠 것부터 걱정하면 프로가 아니죠. 어차피 시즌 치르다보면 잔부상은 하나씩 달고 다니잖아요.”

이인영은 올 시즌 50도루 이상을 자신했다.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다들 의외라는 반응 보였지만 월드스타는 실전에서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정말 뛸까?’

다음 날 열린 자체 청백전, 청팀에 소속된 이인영은 볼넷과 진루타로 2루를 밟았다.

포수 마스크를 쓴 진수영은 며칠 전 열린 팀 미팅을 떠올렸다.

2루에 나가면 3루로 뛴다고 호언장담했던 그 녀석, 설마 연습경기에서 그런 무리수를 두진 않겠지, 3루 도루는 없을 거라고 방심했다.

‘아니…저게 뭐야?’

설마 했던 3루 도루, 야생마의 질주에 이성한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빠른 선수라도 처음부터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는 건 어렵다. 천천히 속력을 높이다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슬라이딩을 하는 게 정석, 그런데 이인영은 초반부터 스피드를 냈다.

오프 시즌 동안 하체 근력을 끌어올린 덕분, 포수가 자세를 잡기도 전에 3루를 점거했다.

거기다 타석에는 우타자 돈 부머, 지금 진수영 포수가 자리를 잡은 위치에선 3루 송구 각이 안 나온다.

한 걸음 빠져줘야 되는데, 그 사이 주자는 3루에 더 가까워지겠지, 그제야 이성한 감독은 3루 도루가 2루 도루보다 더 쉽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야, 너 오프 시즌 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도사님을 찾아갔죠. 도루의 도사님이요.”

“도사? 그게 누군데?”

답을 들은 3루 코치는 혀를 비쭉 내밀었다.

이정준이 누구인가, 통산 493도루를 해낸 대도, 거기다 3루 도루를 68개나 했던 선수다.

다른 선수에게도 3루 도루 이론을 적용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방금 전 이인영이 보여준 순간 속력은 다른 선수들이 흉내 낼 수가 없다. 오로지 이 선수에게만 가능한 이론,

그날 밤, 이성한 감독은 코치진을 모아 놓고 의견을 모았다.

“홈런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루하다가 다치면 팀만 손해라고요.”

“하지만 그런 스타트를 유지할 수 있다면 도루 성공은 확실합니다. 아낄 이유가 없습니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저렇게 뛰어다니면 후반기에 무조건 퍼진다고요.”

코치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 도루가 쓸모없는 플레이로 굴러 떨어진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장타력의 향상

지난 2015년, UA 베어스는 순수장타율 0.197을 기록했다.

이건 단일 시즌 기준으로 역대 1위, 베어스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도 장타력이 크게 늘면서 도루의 가치가 떨어졌다.

그 다음으로 힘을 얻은 근거가 리그 수준의 향상, 투수와 포수의 도루저지 능력이 문제가 있으면 도루가 나올 수가 없다는 건데, 리그 수준이 향상됐으니 도루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는 거다. ‘정말 장타가 늘었나? 리그 수준이 향상 됐어?’

하지만 이성한 감독은 두 가지 의견 모두 받아들이지 못했다.

장타력이 늘어났다니, 공인구가 메이저리그 표준에 맞춰지자 리그 장타력은 급감했다.

작년 시즌 이인영은 62홈런을 때렸는데, 그럼 2위는 몇 개였을까.

페르난데스의 33개, 거의 30개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 녀석의 장타력이 워낙 압도적이었을 뿐, KBO 리그의 전체적인 장타력은 요 2년 동안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리그 수준이 향상 됐다니, 양심에 털이 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인재 풀이 적은 한국야구, 어깨가 좋은 선수는 무조건 투수 유망주로 돌리고, 한 번 또 거른 선수들은 유격수로 뛴다.

이런데 송구가 좋은 포수가 나오길 기대하는 게 우스운 일 아닌가.

거기다 경기를 치르다보면 저게 정말 프로인지 헷갈릴 정도로 형편없는 블로킹과 포구 능력을 지닌 선수들이 눈에 띈다.

이런데 무슨 리그 수준 향상을 논하는 건가.

냉정히 말하면 뻥 야구가 심해져 도루가 줄어들었을 뿐, 포수 수준이 높아진 건 절대 아니다.

최근 2년 동안 장타력이 감소했으니 도루와 진루타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겠지, 이성한 감독은 그 녀석의 발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마음 놓고 뛰어봐라.”

“정말요?”

“그래, 대신 아웃 많이 당하면 못 뛰게 할 거다.”

“제가 뛰는 거 보셨잖아요?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세요.”

이렇게 이인영은 그린라이트를 받아냈다.

요즘 시대에 이런 권리를 누리는 선수가 있을까, 다른 구단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미쳤다고 비웃겠지만 그걸 철저한 공포로 바꿔놓는 게 내 임무, 정규시즌을 위해 전지훈련 기간 동안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 * *

“오후 1시요? 네~ 알겠습니다.”

시간은 흘러 3월 23일,

시범경기 일정이 끝나고 친가에서 휴가를 보내던 이인영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라이온즈의 모기업 성운 그룹은 이번에 새로 출시한 가전제품을 불우이웃에 기증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연예인도 좋지만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있는 선수를 앞세우는 게 낫겠지,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 이인영은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 사진 한 장 찍자고, 지금 아니면 언제 찍겠나?”

성운 그룹의 김태성 회장은 자연스럽게 이인영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야구만 잘해줘도 되는데 봉사활동까지 열심히 해주면서 기업 이미지를 드높여준 선수, 거기다 김태성 본인이 워낙 야구를 좋아하니 예뻐하는 건 당연했다.

“한국시리즈 우승한 다음에 저랑 사진 한 번 더 찍으시죠.”

“하하~ 그래, 그 약속 꼭 지키자고”

어쩜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지, 김태성 회장은 아부를 할 줄 아는 친구라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인영은 기분 좋게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시선을 돌렸다.

“이인영 선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영화배우 김경희,

1년 전 김경희 씨는 SNS에 이인영을 만나면 사인을 받고 싶다는 글을 올려 팬들을 긴장하게 했다.

어린 남자 사냥꾼으로 악명이 자자한데 우리 곰돌이는 건드리지 말라며 단체로 들고 일어난 성운 라이온즈 팬들, 물론 이인영은 시즌에 집중하느라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보니 더 아름다우시네요.”

“정말요? 그런데 왜 그때는 그런 말 하셨어요?”

“뭐가요?”

“공이 아니라 여자에 더 눈길이 가면 프로 실격이라고 하셨잖아요?”

김경희는 당시 이인영이 했던 발언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렇게 칭찬을 할 거면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월드스타는 씩 웃으며 받아쳤다.

“여기는 야구장이 아니잖아요. 야구장에선 야구공에만 집중해야죠.”

“그럼 오늘은 저한테 집중해주시는 건가요?”

“곁눈질은 해 볼 게요. 대놓고 쳐다보면 불편하시잖아요.”

김경희 씨는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서둘러 내렸다.

별로 웃긴 농담도 아닌데 내가 왜 피식거렸을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간만에 부모님 모시고 외식이나 할까.’

립 서비스를 마친 이인영은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마침 집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모시고 가는 것도 좋겠지, 행사도 앞으로 1시간 안에 끝날 분위기라 아버지에게 문자를 넣었다.

‘곁눈질 전혀 안 하잖아.’

반면 김경희 씨는 약간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곁눈질 한다더니 전혀 반응이 없는 남자, 참 다 못해 한 마디 했다.

“곁눈질 한다면서 왜 안 하세요?”

“관심이 있어도 없는 척 하는 게 제 일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도루를 할 때, 2루에 간다고 인기척을 낼 필요는 없잖아요. 2루에 관심이 있어도 없는 척 하는 게 야구 선수에요.”

밑도 끝도 없는 말장난에 김경희 씨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은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건가, 그런데 시답잖은 농담에 계속 웃고 있는 나는 뭔가.

가만히 보면 기럭지도 길고 괜찮은 남자, 한 번 꼬셔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 저 한가한데 술 한 잔 하실래요?”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어머…혹시 애인 있으세요?”

“그렇다고 해두죠 뭐,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뵐 게요.”

이인영은 그렇게 영화계의 대스타를 걷어차고 부모님과 외식을 하러 갔다.

아직 시즌 전이지만 프로가 술이 웬 말인가, 술이라면 누구보다 잘 마시지만 내 돈 주고 사 먹는 타입도 아니고, 대신 식당에서 아버지와 형식적인 건배는 했다.

“너 술 마시면 안 된다.”

“저 시즌 중엔 술 안 마시는 거 아시잖아요.”

아들이 걱정됐는지 어머니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음주운전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야구선수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프로의식이 철저히 박힌 아들은 쓸데없는 걱정 마시라며 손을 저었다.

“너 오늘 행사장에서 만난 유명인 있냐?”

“네, 많이 왔더라고요.”

“누가 왔는데?”

그 사이 이인호는 아들의 일과에 관심을 보였다.

대한민국에서도 톱을 유지하고 있는 성운 그룹의 행사장, 유명인사들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굴 만났는지 캐물었다.

“김경희도 왔더라고요.”

“김경희?!! 정말이냐?”

“뭘 그렇게 놀라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선수랑 같이 사시면서?”

“야, 그래도 그 사람 엄청 유명하잖아? 서로 인사는 했냐?”

“그렇잖아도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했는데, 나중에 보자고 했어요.”

“아이고~!! 이 녀석아!!”

이인호는 눈치 없는 아들의 나무랐다.

여자 쪽에서 술 한 잔 하자는 게 뭘 뜻하겠나. 야구만 잘하지 눈치가 없는 녀석, 하지만 이인영은 그게 뭐가 대수냐며 콧대를 높였다.

“아버지는 제가 그렇게 가벼운 남자로 보이세요? 제가 인기가 없어서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 양반은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당신은 여자가 술 마시자고 하면 따라갈 거예요?”

아내의 협공까지 이어지자 이인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에 아내가 앉아 있었지, 잘못하면 몇 달이 피곤해질 일이라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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