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완전체 (1)
“안녕하십니까.”
“오 ~ 그래, 반갑다. 실물이 훨씬 낫네.”
이곳은 전라남도 장흥군, 이인영은 수소문 끝에 도루의 대가를 찾았다.
조금 더 뛰는 야구를 하려면 가르침을 받는 게 좋겠지, 여러 전설이 후보군에 올랐지만 통산 493도루에 빛나는 이정준을 택했다.
도루의 기본 원칙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베테랑의 노하우라는 게 있겠지,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구했다.
“너는 장타 칠 줄 아니까, 2루타를 치고 3루 도루를 하면 된다.”
초반부터 알쏭달쏭한 비법, 그래도 일단 말없이 듣기만 했다.
“포수가 송구할 때 어떻게 하냐?”
“보통 이렇게 하지 않나요?”
이인영은 앉은 자세에서 오른 발을 살짝 뒤로 뺐다.
양발이 교차 된 상태에서 공을 받고 송구를 하는 게 정석인데, 이건 어깨가 받쳐주는 선수가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어깨가 강한 선수는 보통 어느 포지션을 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의 다 투수로 전직, 결국 어깨가 약한 선수들이 포수를 보게 된다.
그럼 어깨가 약한 포수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인영이 지금 한 것처럼 처음부터 오른쪽 발을 뒤로 약간 빼주고 일어나면서 전진스텝을 밟는다.
송구 거리가 짧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가는 것, 그런데 2루 주자가 3루로 뛰어버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타석에 우타자가 들어서 있으면 더욱 최악, 이인영은 그 외에도 3루 송구의 어려움을 짚어냈다.
“송구할 때 타자에 막히겠네요. 타자를 피하려면 여기서 스텝을 한 번 더 밟아야 되니까 송구도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가겠죠? 그럼 정확성은 더 떨어질 테고요.”
“그렇지!! 역시 이해가 빠르네. 사실 나는 3루 도루가 훨씬 편했는데, 장타력이 떨어져서 별로 못했어, 그런데 너는 아니잖아?”
이인영은 그제야 3루 도루를 아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2루에선 포수의 움직임이 더 잘 보이는 편, 포수 위치만 봐도 저 선수가 어깨가 약한지 아니면 도루를 신경 쓰고 있는지 대략 감이 온다.
그럼 안 뛸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
평소 3루 도루는 아마 이럴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해 보질 않았으니 감만 믿고 할 수는 없는 법, 도루의 대가도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깨가 강한 포수라면 어떻게 할 거냐?”
이때 이정준은 또 다른 숙제를 던졌다.
퀵 모션이 빠른 투수에 어깨가 강한 포수가 앉아 있다면 도루를 해야 하나, 이인영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원래 사자는 약한 사냥감을 공략하잖아요. 굳이 강한 놈을 사냥할 이유가 없나요? 약한 놈만 골라 패면 되는 거죠.”
“하하 ~ 이 녀석 웃기네.”
이정준은 그게 정답이라고 웃어넘겼다.
하긴 이 자식이 도루왕을 노릴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는 도루만 하면 그만 아닌가.
자기가 해야 하는 플레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선수,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는지 하루 자고 가라며 권했다.
“그런 말 하실 줄 알고 제가 술하고 안주 사왔죠.”
“오호 ~ 역시 센스가 있네. 이러니까 야구를 잘 할 수밖에 없지.”
그렇게 대낮부터 벌어진 연회, 이인영은 대선배가 따라준 대접술을 숨 한 번 안 쉬고 들이켰다.
“처음부터 그렇게 달려도 되냐?”
“원래 첫 잔은 원 샷 아닌가요?”
“하하 ~ 술 마실 줄 아네. 가득 따라 봐.”
어린놈에게 지기 싫었는지 이정준은 대접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라 떨어지는 체력, 술 몇 잔 마시고 혀가 꼬였다.
“니는 참 인생 멋지게 산다. 구단 상대로 떵떵거리고, 나는 평생 그렇게 굴렀는데도 은퇴할 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못 들었다.”
“그렇게 서운하셨어요?”
“말도 마라. 나가 깜이 없어서 여기서 이라고 있겠나.”
프로선수 중 명예롭게 은퇴하는 선수가 몇 명이나 있겠나.
이정준도 나이가 들자 은퇴 권유를 받았지만 현역연장 의지가 워낙 강해 말 그대로 벽에 뭐 칠 할 때까지 버텼다.
그러다 어느 날, 사구에 맞고 부상을 당한 타자를 대신해 타석에 섰는데, 얕은 타구에 2루까지 가는 투지를 선보였다.
타구가 좌익수 글러브를 맞고 굴러가긴 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중견수가 잡았고 2루수도 마침 2루 근처에 있었다.
“이래도 내가 주력이 떨어진 쓸모없는 선수냐?”
나이가 들어서 주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나이가 많다고 기회를 안 주니 실력 발휘할 기회가 없는 것, 그런데 그게 프로 마지막 타석될 줄은 몰랐다.
구단 관계자도 감독도, 저 선수는 늙어서 쓸모가 없다는 색안경을 끼고 있는데, 어떤 노력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500도루는 꼭 채우고 은퇴하고 싶었는데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그라운드, 상처가 컸는지 코치직 제의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유시인처럼 살고 있다.
“3루 도루가 2루 도루보다 쉽다.”
코치가 된다고 해도 내 말을 듣고 현장에서 적용시킬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요즘은 도루 자체를 금기하는 시대, 지금 이 시대는 내 야구 이론을 필요로 하는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택할 길은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하는 것 뿐,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준 후배가 내심 반가웠다.
“그럼 제가 도루왕 해서 선배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할 게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이정준은 이제 와서 세상이 날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벗과 술 한 잔만 있으면 그만, 가끔 와서 술친구만 해주면 된다며 돌려보냈다.
‘원래 유행은 돌고 도는 법, 지금부터 달린다.’
대구로 돌아온 이인영은 하체 운동과 유연성 강화 훈련에 집중했다.
1루에서 2루까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다 뛰면 된다. 하지만 2루와 3루 사이의 거리는 짧은 편,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려면 하체와 유연성을 동시에 끌어올려야 했다.
도루가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하향된 포수 기량, 이제는 그냥저냥 블로킹만 해줘도 주전포수를 본다.
작년에 얻어낸 볼넷은 무려 133개, 그렇게 많이 루를 밟고도 도루는 5개 밖에 못 했다는 게 말이 되나.
진정한 완전체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의 나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염려됐다.
“얘, 운동 너무 무리해서 하는 거 아니에요?”
“확실히 … .”
이인호도 아들을 걱정했다.
시즌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조금 더 휴식에 집중해도 될 텐데, 요즘 들어 집에서 얼굴 보기가 어렵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까지 야구만 보고 걸어온 아들은 인생의 여유를 너무 모른다.
억지로 권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오랜만에 가족여행이라도 가는 게 어떨까. 열혈야구 청년도 이것만은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 저 ~ 기에 가는 거죠?”
“그래.”
“그럼 저 갔다 올게요. 엄마 아빠는 천천히 오세요.”
하지만 이인영은 여기서도 훈련을 자처했다.
한 눈에 봐도 꽤 먼 거리, 그냥 천천히 같이 가면 안 되나? 하지만 힘이 넘치는 아들은 목적지를 찍고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천천히 오세요?”
“네가 너무 빠른 거야 인마.”
“그럼 한 번 더 갔다 올게요.”
“야!! 야!!”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시 시작된 역주행, 그 열정 앞에 부모님은 할 말을 잃었다.
“너 취미 하나 만들어 보는 거 어떠냐?”
“취미요?”
“그래, 지금은 괜찮겠지만 그렇게 구르면 나이 먹어서 고생한다. 조금 여유를 가져, 다음 시즌까지 많이 남았잖아.”
“그런데 딱히 할 게 없어요. 집에서 있어 봤자 뒹굴거리기 밖에 더 하겠어요?”
그날 밤, 이인호는 펜션에서 아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정도가 지나친 아들, 얼마 전엔 광고 제의까지 거절하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60홈런 타자가 도루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신인 시절 펜스 플레이를 하다 발목 부상을 입은 아들, 그날을 떠올리면 아버지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런데 덩치도 큰 녀석이 도루를 하겠다니, 솔직히 말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현역 시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셨어요?”
“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셨냐고요.”
아들의 역습에 이인호는 입을 다물었다.
통산 1500안타에 나름대로 괜찮은 커리어를 보냈지만 원하는 걸 모두 해 봤냐고 묻는다면 누가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겠나.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기억, 그때 이렇게 했으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흘러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는 법, 어느 선수든 은퇴할 땐 아쉬움이 남는 법이라며 자위했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론에선 절 슈퍼스타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했을 뿐이에요. 그만큼 갈 길도 멀고요. 솔직히 저는 은퇴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요.”
통산 493도루에 1517안타라는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야구의 대도도 되돌아보면 후회뿐이라는 말을 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커리어를 쌓아야 후회가 없는 은퇴가 되는 건가.
이인영은 고심 끝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봐야 미련이 남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어린 나이에 많은 걸 이루긴 했죠. 하지만 그게 전부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원하는 걸 모두 얻는다고 해도 미국에선 그렇게 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 … 그건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아버지나 엄마가 절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아는데요, 그래도 지금은 달려보고 싶어요. 절 믿는다면 그냥 지켜봐주세요.”
이인호는 이날부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는 현역시절 저 정도 노력을 했는가.
저만큼 해 본 적이 없으니 그 이상을 하면 독이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들은 이미 아버지가 평생 동안 닿지도 못한 곳까지 가버렸다.
그런 내가 더 먼 곳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경고할 자격이 되나, 아들을 �아갈 순 없지만 먼 곳에서 지켜봐 줄 수는 있겠지.
이날부터 이인호는 전지적 작가가 된 것처럼 아들을 담담히 지켜봤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월 10일, 이인영은 연봉협상을 위해 구단 사무실을 찾았다.
작년 시즌 연봉은 6억 5천 만 원, 62홈런을 친 선수에게 올해는 얼마를 줘야 하나.
김태성 회장은 이번에도 달라는 대로 주라는 입장, 차명석 단장은 시작부터 크게 불렀다.
“10억 딱 채워주겠네.”
“당첨!!”
무슨 복권도 아니고 뜬금없이 웬 당첨인가, 겨우 4초 만에 끝난 연봉 협상, 차명석 단장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10억 받은 기분이 어떤가?”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아니, 그만큼 받으면 어떤 기분인가 궁금해서 그러네.”
차명석 단장은 작년에 연봉 2억, 여기에 계약금과 이런저런 인센티브를 포함해 4억 정도를 수령했다.
작년부터 날 추월하더니 이제는 까마득한 곳으로 날아간 선수, 연봉이 저 정도 되면 어떤 기분일까? 단장이라도 궁금했다.
“평생 먹고 살 돈도 못 되잖아요. 노력해서 더 벌어야죠.”
“아니, 그 많은 돈 벌어서 뭐 하려고 그러나?”
“좋은 일이요.”
이인영은 자기가 뱉은 말을 지켰다.
평소 자신이 돌보던 보육원에 5천 만 원 기부하고, 5천 만 원은 다시 국내 소아암 재단에 기부, 사방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지만 운동에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