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하나만 잘 해요 (11)
“얘들아~ 먹을 만큼만 담아야 돼. 알았지?”
“네에~”
이곳은 대구의 한 보육원, 얼마 전부터 이곳은 자율배식제를 실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편식을 할 까봐 교사들이 직접 배식을 도왔지만, 아이들이 싫어하는 음식을 남기면서 음식물 쓰레기만 많이 늘었다.
그리고 교사들 입장에선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게 편한 것도 사실, 이곳의 터줏대감이 된 이인영도 아이들 곁에 섰다.
‘모범? 난 그런 거 몰라.’
눈치 없이 채소는 안 담고 고기만 퍼 담다니, 뒤에 늘어선 아이들은 그 모습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오빠, 채소는 안 먹어요?”
“오늘은 먹기 싫어.”
“그래도 골고루 먹어야죠.”
“왜?”
“건강에 안 좋잖아요.”
이인영은 깐깐하게 구는 꼬마아가씨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채소 쪽으로 가는 손길, 드디어 아이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건가, 하지만 교사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자, 이건 너 많이 먹어.”
“오빠도 담아야죠. 그것만 먹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먹고 싶은 거 먹는데 몸에 나쁠 리가 없잖아?”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오빠, 저 인간 고집이 센 건 알고 있지만 혜진이는 오늘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 얼른 이거 담아요.”
“하아~ 너 진짜 왜 그러냐. 꼭 우리 엄마 같이…”
“얼른 먹으라구욧!! 애들도 보고 있잖아욧!!”
“아~ 엄마!! 나 이거 먹기 싫어~!!”
뜬금없이 말 안 듣는 아들과 엄마 놀이, 교사들과 다른 아이들도 폭소했지만 두 사람은 심각했다.
이 전쟁의 최종 승자는 혜진이, 기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빠 어렸을 때 말 엄청 안 들었죠?”
“지금도 말 안 듣는데 그 때는 말 들었겠니?”
“어휴~ 끔찍해~ 최악이야.”
“너 나중에 꼭 오빠 같은 아들 낳아라. 하루하루가 즐거울 거야.”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는 혜진이, 나잇값을 못하는 오빠는 그 앞에서 계속 촐랑거렸다.
그래도 누구보다 사이좋은 남매, 대판 싸워도 떨어지진 않았다.
“오빠는 언제부터 야구 잘했어요?”
“그건 왜 물어?”
“저도 나중에 돈 벌려면 지금부터 잘 하는 걸 찾아야 될 것 같아서요. 오빠는 어떻게 야구 시작했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이면 부모 품에서 어리광을 부려야 할 텐데, 벌써부터 독립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장난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줬다.
“글쎄…언제부터 잘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야구는 초등학교 때 시작했어.”
“잘 해서 했어요?”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다 보니까 잘하게 된 거지”
“으음~ 그렇구나. 그럼 공부는 안 했어요?”
눈치 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동생, 이인영은 먼 곳을 보며 답을 회피했다.
“오빠, 공부는 안 했냐고 묻잖아요.”
“운동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해.”
“거짓말, 못 해서 안 한 거죠?”
한 방 먹이고 재미있다며 낄낄거리는 녀석, 나는 왜 얘 앞에선 지기만 하는 걸까. 하긴 꼬맹이 이겨먹어 봤자 누가 알아주겠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넌 공부 잘 할 자신 있어?”
“네,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어요.”
“흥~ 그래 잘났다.”
“그런데 공부하면 돈 많이 벌을 수 있어요? 공부 잘 해도 조금 버는 건 싫은데…다른 걸 해 볼까요?”
이인영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여기서 무슨 답을 해줘야 하나. 공부는 못 했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줬다.
“이것저것 하는 것보다 하나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니? 하나만 잘 해도 인생 사는데 불편한 거 없어. 오빠를 봐, 야구만 잘 하는데도 먹고 살잖아.”
“그럼 저도 운동할까요?”
“네가? 뛰지도 못하면서 뭘…”
“저 잘 뛰거든요?!! 오빠가 몰라서 그런 거예요!!”
톡톡 튀는 반응에 이인영은 폭소를 터뜨렸다.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반응이 오는데 얼마나 재미있나. 집에서 데려가서 예쁘게 키워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녀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너 우리 집에 올래?”
“네?”
“우리 집엔 여자가 엄마 밖에 없거든. 네가 오면 집이 더 즐거워질 것 같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혜진이는 생각에 잠겼다.
엄마 아빠가 조만간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그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건 이미 눈치 챘다.
부모님 얘기만 꺼내면 당황하는 선생님, 나이는 어리지만 철이 일찍 들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안 갈래요.”
“왜? 오빠랑 진짜 친남매 되면 좋잖아.”
“제가 가면 여기 있는 애들은 어떻게 해요?”
혜진이는 친구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집에 입양된다는 건 다른 아이들의 기회를 뺏는 것 아닐까. 솔직히 오빠와 같이 사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온 아이들을 배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효~ 철이 너무 일찍 들었네.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이인영은 말없이 동생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마음이 예쁘긴 한데 안타까운 것도 사실, 이 아이의 부모가 어떻게 됐는지 이미 알고 있다.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은데, 앞으로 이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핏줄이 이어진 건 아니지만 독립할 때까지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어쨌든 인생은 하나만 잘해도 충분해. 공부든 운동이든 열심히 해 봐. 오빠가 도와줄 테니까.”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하나도 멋없어요.”
“너도 하나도 안 귀여워, 무슨 애가 벌써부터 엄마처럼 구니?”
약이 오른 혜진이는 오빠 등에 소심한 복수를 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옆으로 쓰러지며 엄살을 부리는 오빠, 기분이 풀렸는지 혜진이는 얼굴을 돌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또 올 게~ ”
“네에~ 다녀오세요~ ”
어느새 헤어질 시간, 아이들은 이제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언젠간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 덕분에 이인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동차에 올랐다.
‘하나만 잘 해도 된다고?’
이날부터 혜진이는 오빠 말대로 공부만 열심히 했다.
불확실한 미래지만 뭐든 하나만 잘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 * *
[이인영 시즌 55호 홈런 작렬]
[KBO 역대 최다 홈런까지 하나 남아]
8월 21일, 이인영은 커리어 하이와 동률을 이루는 홈런을 쏘아 올렸다.
114경기 만에 달성한 기록, 기자들은 지난 3년의 홈런 페이스를 분석한 기사를 올렸다.
■ 2020년(124경기) : 55홈런
= 10.6 타수 당 1개
■ 2021년(144경기) : 44홈런
= 14.59 타수 당 1개
■ 2022년(114경기) : 55홈런(현재 진행 중)
= 9.30 타수 당 1개(69.47홈런 페이스)
한 눈에 봐도 말이 안 나오는 페이스, 조금만 힘내면 70홈런도 가능하지 않을까.
70홈런은 미국에서도 약물 시대를 제외하면 나온 적이 없는 대기록, 저 선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대구의 살인적인 더위도 팬들의 관심을 꺾을 수 없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59, 홈런 55개, 11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홈런보다 타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KBO 역대 어느 선수도 경기 수보다 많은 타점을 기록하진 못했거든요. 메이저리그만 봐도 1999년 이후, 경기 수보다 많은 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없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에요.”
“그럼 70홈런에 150타점 둘 다 하면 되겠네요. 간단한 거 아닙니까?”
오늘도 허세로 시작하는 박한우 위원의 해설, 본인이 타석에 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잘난 척을 하는 건가.
중계석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사이 초구가 들어왔다.
“솔직히 그게 사람이냐?”
“피한다고 부끄러운 게 아니야.”
오늘 성운 라이온즈의 상대 팀은 한진 타이거스, 경기 전 타이거스 배터리는 철저하게 도망치기로 합의를 봤다.
사람은 사람과 싸워야 하는 법, 세계최강을 증명하겠다고 맹수가 있는 케이지로 들어가는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
홈런 2위, 3위 기록을 합쳐도 54개 밖에 안 되는데, 혼자서 55홈런을 치고 있는 저 자식이 사람인가.
도망쳐도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합리화 했다.
‘오늘 심판이나 봐야겠네.’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노골적으로 도망치는 투수, 첫 타석 두 번째 타석 모두 볼넷이 나오자 사방에서 홈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가 저런 시시한 볼 질을 보겠다고 돈을 낸 게 아니지 않은가.
어느 팬은 타이거스 벤치에 폭언을 퍼붓다 퇴장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뭐라도 해야 되나?’
세 번 째 타석을 앞둔 이인영은 생각을 정리했다.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장난치지 않기로 했는데, 팬들의 노여움이 심상치 않다. 홈런을 못 치면 즐거움이라도 줘야 하겠지, 한동안 삐쳐 있었지만 풀어버렸다.
“볼~ ”
“스트라이크!!”
공 하나에 두 개의 판정, 깜짝 놀란 심판은 타자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봐, 이거 볼이야.”
“저는 스트라이크로 봤는데요?”
“그럼 스트라이크 줘?”
“아니요. 심판의 권위는 존중돼야 하잖아요.”
뻔뻔한 태도에 김문호 심판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올 시즌 심판들하고 한 판 붙었던 그 녀석이 맞나.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는 선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줬다.
‘저 자식, 완전 우릴 얕보고 있네.’
한편, 타이거스의 김해수 감독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상황에서 심판과 농담을 주고받다니, 이번 타석도 볼넷이다 이건가.
그리고 어깨에 배트를 걸친 채 엉덩이만 씰룩거리는 저 자세는 뭔가. 괜히 약이 올랐다.
“야!! 김해수!! 나는 겁쟁이다!! 해 봐!! 얼른 하라고!! 안 들려?!!”
“야구계의 암적인 자식!! 흥행 다 말아먹을 거냐?!! 70홈런 지금 아니면 언제 나와?!! 네가 다 망치고 있는 거라고!!”
“이럴 거면 경기 포기하고 집에 가!! 이 패배자 자식아!!”
“전 감독은 너처럼 경기 안 했어!! 그 따위로 하니까 우승을 못 하지!!”
여기에 또 날아드는 관중의 폭언, 주심이 주의를 줬지만 야유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도 김해수 감독은 볼넷을 지시, 하지만 6회부터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조상민은 승부를 하고 싶었다.
프로 3년 차에 접어든 어린 선수지만 승부욕은 대단한 편,
한국 야구 최고의 선수와 붙어봐야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될 거 아닌가. 사인과 달리 스트라이크를 밀어 넣었다.
‘저게 미쳤나?’
가운데 약간 낮게 들어온 공에 조익현 포수는 흠칫했다.
안 쳤기에 망정이지 걸렸으면 대형사고, 바로 마운드로 올라가 주의를 줬다.
“너사인 못 봤어? 이게 장난이야? 왜 멋대로 해?”
“…죄송합니다.”
“됐고, 똑바로 던져. 맞으면 너만 깨지는 거 아니니까.”
방금 전 공이 홈런으로 이어졌다면 나까지 감독에게 박살났겠지, 조익현은 나는 지시대로 따랐다는 걸 벤치에 보여줬다.
‘분하다. 나는 왜 이런 야구를 해야 되지?’
조상민은 눈물을 머금고 볼넷을 택했다.
내가 볼 질이나 하겠다고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프로가 됐나.
그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야구를 마음껏 하고 있는 이인영, 저 선수가 감독 눈치 보겠나?
같은 야구선순데 왜 이렇게 입지가 차이가 나는 건지, 자신감 빼면 시체인데 그것마저 잃어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