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하나만 잘 해요 (9)
[이인영, 시즌 39호 홈런]
[세계 최소 경기 40홈런 달성하나?]
7월 25일, 후반기 첫 경기부터 이인영은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76경기만의 시즌 39호 홈런,
메이저리그 역대 최소 경기 40홈런은 84경기, 일본 프로야구는 89경기 만에 40홈런이 나왔다.
이인영은 올 시즌 경기 당 0.513개의 홈런을 치고 있는데 지금 페이스를 유지하면 무려 73개라는 결과가 나온다. 2년 전 본인 손으로 세운 KBO 최다 홈런 기록(55개)은 물론 아시아 역대 최고 홈런(60개)까지 갈아치울 수 있는 페이스, 국제대회에서 실력을 입증한 선수라 일본에서도 폄하하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기록 달성 시기, 전문가들은 이르면 이번 광주 3연전에서 대기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한진 타이거스 구단과 팬들은 발끈했다.
우리가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길 바란다는 건가. 그렇다고 승부를 안 하면 여론의 욕을 먹고 승부를 하기도 벅차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82경기까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김해수 감독은 도망을 택했다.
3연전 첫 경기에서 39호 홈런 맞았는데 우리가 추가 서비스까지 해 줘야 하나.
맞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헌납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이인영은 남은 시리즈에서 볼넷 4개를 적립했고 창원 레이더스에서 대기록 달성을 노렸다.
‘우리도 폭탄 맞기 싫어.’
창원 레이더스도 폭탄 돌리기에 나섰다.
시리즈 첫 경기부터 볼넷 3개 헌납, 팬들의 불만이 폭주하면서 창원 레이더스 구단엔 겁쟁이라는 낙인이 붙었다.
“이인영 선수, 최근 볼넷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못 치는 건데, 왜 레이더스가 비난을 받는지 모르겠네요.”
경기 전, 이인영은 인터뷰를 통해 소감을 밝혔다.
후반기 4경기에서 얻어낸 볼넷은 무려 9개, 하지만 잘 보면 투수들만 탓할 수도 없다.
볼넷을 제외하면 8타석에서 2안타(1홈런), 본인이 못 친 게 더 많다.
그리고 대기록이 급하다고 이 공 저 공 쫓아다니는 게 프로의 자세인가,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혹시 쇼핑하다 예쁜 게 보이면 일단 사시나요?”
“어…네, 저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인터뷰, 그래도 김지영 아나운서는 선수의 질문에 성실히 응했다.
쇼핑을 하다 보면 당연히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인다.
이런 때 별 생각 없이 일단 사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인영은 볼을 고르는 건 현명한 쇼핑과 다를 게 없다며 대화를 이어갔다.
“쇼핑도 야구와 똑같습니다. 현명한 구매자는 쇼핑을 하기 전에 뭘 사야 할지 미리 정해두잖아요. 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 내가 쳐야하는 공이 뭔지 계획이 있어야 되요. 이 공 저 공 다 쫓아 다니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죠.”
“그렇겠네요. 그럼 이인영 선수는 타석에서 아!! 이거다 라는 공이 눈에 보이나요?”
“보이긴 보이는데 바로 이별한다는 게 문제죠.”
쇼핑은 이거 다 싶으면 물건을 사면 그만이다.
하지만 홈런은 아니다. 잡았다 하는 순간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홈런,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끈질기게 인내하며 기다린 공인데 한 순간에 담장 밖으로 날아가 버리다니, 조금 허무하지 않은가.
널 정말 만나고 싶었다며 인사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눈앞까지 다가온 첫사랑을 날려버리는 느낌이랄까.
이상한 비유에 김지영 아나운서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럼, 이인영 선수는 지금 운명의 그분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고 이 분 저 분 집적거리진 않을 겁니다. 그건 나쁜 공을 따라다니는 타자와 다를 게 없으니까요. 물론 그런 분이 나타났을 때는 담장 밖이 아니라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아야겠죠.”
김지영 아나운서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애를 야구에 빗댈 수 있다니, 역시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진 선수라는 걸 다시 확인 했다.
“그럼 오늘은 운명의 공을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한 이인영은 평소처럼 몸을 풀며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오늘은 그 운명의 공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첫 타석부터 차분하게 볼을 골랐다.
‘당신은 아니군요. 당신도 아니에요.’
하루에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냥 지나치는 인생, 이 사람이다 잡아도 아닌 경우가 있다.
퇴근 8타석에서 때려낸 안타는 겨우 2개, 이건 공을 보는 내 눈에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투수들이 승부를 피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일 뿐, 운명의 그 공을 끝까지 기다렸다.
“이번에는 잡아둡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글쎄요. 지금은 나가봐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 봐야 운명의 상대도 만날 수 있는 건데 말이죠. 상대를 너무 가리네요.”
자칭 양아버지 박한우 위원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구안이 아무리 좋아도 볼과 스트라이크를 완벽히 구별할 순 없다.
이거다 싶으면 확 잡아채는 것도 남자다움인데 올 시즌 유독 까다롭게 볼을 보는 녀석, 최근 스윙을 너무 아끼고 있는 것 같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답답했다.
‘당신도 아닙니다.’
그러건 말건 바깥쪽 볼을 골라내는 월드 스타, 볼 카운트도 불리해졌고 배터리는 미련 없이 승부를 피했다.
“다음 맞선은 언제 보냐?”
“몰라요.”
이성한 감독은 첫 타석을 마치고 돌아온 이인영에게 농담을 건넸다
얼마 전 나한테 소리를 지른 적도 있고, 틈이 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고 있는 중, 감독이라는 놈이 이래선 안 되는데 다음 맞선도 은근 실패하길 기대했다.
“자 이제 1대 0으로 앞선 성운 라이온즈의 3회 초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홍현구 선수, 오늘 첫 타석에서는 범타로 물러났습니다.”
“그래도 최근 타격감이 좋죠. 기대를 해 볼만 합니다.”
[따아악~!!]
“말씀 드리는 사이!! 밀어 친 타구가 계속 뒤로!! 뒤로~!! 우익수 글러브 위를 넘어갑니다!! 타자 주자는 1루를 지나 여유 있게 2루까지!! 라이온즈가 득점권 기회를 잡습니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이거든요. 여기서는 기대를 해 봐도 되겠네요.”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타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속 타자 돈 부머는 올 시즌 13홈런에 그치고 있지만, 최근 20경기만 따져보면 타율 0.315, 홈런 4개, 13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야구에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 여기서 이인영을 거르고 병살타를 유도하는 작전도 녹록치는 않았다.
‘응? 진짜 걸러?’
하지만 포수는 벤치의 지시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에 나왔는데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맞선을 취소한 상황이랄까. 좀 허무했지만 이인영은 보호대를 풀며 1루로 걸어 나갔다.
‘이거 안 되겠다, 조금은 집적대야겠어.’
너무 가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상황, 다음 타석은 내가 먼저 치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5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1사 주자 1루에서 세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도 가릴 건 가리는 남자라고’
초구는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지는 볼, 눈길도 안 주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다시 높게 들어옵니다. 어? 잡아주네요.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그런데 이 공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올 시즌 이인영 선수가 몸 쪽에 타율 0.357, 가운데 코스에 0.375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바깥쪽에 조금 약점이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0.316을 치고 있지만, 낮은 코스에 0.286, 높은 코스는 올해 아직 안타가 없어요. 이러니까 투수들이 계속 바깥쪽으로 던지는 겁니다.”
풀 히팅으로 바뀌면서 바깥쪽 공은 깐깐하게 가려 치게 됐다.
타율은 조금 떨어졌지만 덕분에 훨씬 많아진 홈런, 지나치게 눈이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드디어 만난 운명의 공, 힘찬 풀 스윙으로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마주한 시간은 짧았지만 우리가 격렬하게 맞부딪친 흔적은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겠지, 손을 들어 잘 가라고 인사는 해줬다.
어쨌든 이렇게 80경기 만에 40홈런을 돌파, 먼저 홈을 밟은 임완수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돈 부머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공 잡은 사람 찾았습니까?”
[아니요. 아직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운 라이온즈 관계자는 관중석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구단 박물관에 고이 모셔둬야 할 귀한 공, KBO 위원회에서 기증하라고 압력을 넣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찾아내는 게 우선 아닌가.
경기 전에도 창원 레이더스 구단에 협조를 구했지만, 차명석 단장은 만일을 대비해 이번 원정경기에 구단 직원을 동행시켰다.
그런데 행방을 알 수가 없는 공, 혹시 구장 밖으로 나간 건가.
숨바꼭질은 계속 됐고, 그 사이 이인영은 4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7회 초 현재 성운 라이온즈의 5대 2 리드, 아직 경기를 포기할 단계는 아니라 창원 레이더스도 최선을 다했다.
[따아악~!!]
“초구 타격!! 이번에는 우측 담장 너머로오오~!! 사라집니다!!!! 시즌 41호 홈런!! 연타석 홈런을 뿜어내는 이인영 선수입니다!! 스코어 7대 2!! 승부에 쐐기를 박는 일격입니다!!!!”
“이거라는 확신이 있었나요? 초구 타격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라이온즈 구단 관계자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40홈런도 못 찾았는데 41호 홈런이라니,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이제 겨우 전환점을 지난 시즌, 앞으로도 저 선수가 칠 홈런은 많이 남았다.
원정경기에서 공 하나 찾자고 이 난리라니, 자신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에 있나 그 공이 어떤 공인데, 좀 더 찾아 봐]
보고를 받은 차명석 단장은 직원들을 닦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라고 난리,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직원들의 사정을 알게 된 이인영은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이 급하게 굴수록 공 소유자는 여유를 부릴 거 아닌가.
며칠 전부터 성운 라이온즈는 최단기간 40호 홈런 주인에게 소소한 답례를 지불한다고 했다.
다급한 쪽은 구단이니 시간을 끌면서 가치를 올리겠다는 건가. 이인영은 이런 때일수록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거 못 찾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홈에서 최단 기간 50호 홈런 때려버리면 되는 거죠. 떠나간 공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하아~ 그래도 조금 아쉬운데…]
차명석 단장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차명석 단장의 취미는 수집, 수집을 할 때 한 두 가지가 빠져 있으면 그 분야는 괜히 쳐다보기도 싫다.
50홈런, 60 홈런 볼은 있는데 40호 홈런 볼이 없다면 그 꼴을 어떻게 보나.
차명석 단장은 그러지 말고 자네도 좀 협조해 달라며 설득에 나섰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찾아주는 팬에게 이렇게 보답을 하겠다고 홍보를 하게. 구단에서도 노력은 하겠지만 자네도 뭔가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나,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월드스타는 단장의 지시대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