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20화 (120/309)

120화. 하나만 잘 해요 (4)

“자!! 이제 하나만 잡자!!”

계속되는 전지훈련, 연습경기 4연승을 달리고 있는 성운 라이온즈는 UA 베어스와 맞붙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팀,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잡겠다고 잡혀주는 인간인가.’

내가 오늘 안타가 없다고 기세등등하다니, 눈치를 살피다 3루 쪽에 번트를 대버렸다.

깜짝 놀란 3루수 김재규는 허둥지둥 달렸지만 이미 늦은 송구, 번트 안타로 출루한 이인영은 풀어낸 보호대를 코치에게 건넸다.

“야, 네가 번트 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베어스의 1루수 김동환은 괜히 시비를 걸었다.

천하의 이인영이 번트 안타라니, 네가 그러고도 KBO를 대표하는 타자라며 속을 긁었다.

“3루가 구멍인 게 보이는데 그냥 놔둬요?”

구멍이라는 말에 김동환은 피식거렸다.

김재규는 좋은 타자지만 좋은 3루수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전성기 때는 그냥 저냥 괜찮은 수비를 했지만, 같은 팀원이 봐도 나이가 들면서 반응속도가 무뎌진 게 보였다.

그렇다고 좌익수로 돌리자니 용병 페르난데스가 들어서 있고, 1루는 김동환, 지명타자는 이종환, 베어스는 구역이 이미 정해져 있다.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방망이는 쓸 만한 선수, 감독 입장에서 쉽게 뺄 수 있을까.

구멍이라는 걸 알고도 3루에 박아둔 상황,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수는 손쉬운 사냥감을 공략했다.

“그럼 너 정규시즌에도 우리 팀 만나면 번트 댈 거냐?”

“아니요, 저도 번트 댈 수 있다는 것만 보여준 거예요.”

계속되는 대화, 이인영은 정규시즌에선 정석대로 할 거라고 예고했다.

솔직히 정식경기에서 중심타자가 번트 대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위기 상황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상대팀도 긴장할 거 아닌가.

연습경기라 할 수 있었던 플레이, 덕분에 무력시위는 확실히 했다.

따악~!!

후속 타자 돈 부머가 안타를 치면서 1사 주자 1 - 2루, 이인영은 이번엔 2루수 김환희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짜샤, 홈런 타자가 번트가 뭐냐 번트가?”

“걱정 마세요. 제가 아무리 번트 많이 대도 선배보다는 홈런 많이 칠거니까요.”

무안해진 김환희는 건방진 후배의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3년 차 시즌 만에 100홈런을 돌파한 후배, 반면 김환희는 9시즌 동안 80홈런도 못 때렸다(76개).

알고는 있었지만 확연히 비교되는 장타력, 김환희는 너 올 시즌 몇 홈런 칠거냐며 심문을 이어갔다.

“40개는 당연히 넘겨야죠.”

“우리 이기려면 그거보다 더 많이 쳐야 될 텐데?”

이인영은 작년 시즌 팀 공격력의 30%를 차지했다.

40홈런 120타점을 넘기고도 팀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 그렇다면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나.

도발에 욱한 이인영은 60개 넘기면 되는 거 아니냐고 큰 소리를 쳤다.

“너 정말 60개 칠 거냐?”

“못 칠 것도 없죠. 저 올 시즌 여기 많이 지나갈 테니까, 두고 보세요.”

이인영은 발끝으로 2루 베이스를 툭툭 쳤다.

베어스에 융단폭격을 가한 뒤 이곳을 유유히 지나가겠다는 예고, 김환희는 번트나 대는 자식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며 맞불을 놨다.

따악~!!

“그렇지!!”

“좋아!! 좋아!!”

후속타자 김상규까지 안타 행렬에 뛰어들면서 라이온즈는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2대 2).

연습경기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양 팀, 5회 초 성운 라이온즈는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내가 안타를 못 친다고 생각하는 건가.’

초구부터 한 가운데로 들어온 공, 선두타자 이정길은 초구를 받아쳐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문제는 지금부터, 주자가 나가자 배터리의 투구 패턴이 달라졌다.

확연하게 높아진 변화구 비율, 프로 선수라면 이걸 구별해 내야 한다.

특히 커브라면 날아오면서 공의 회전과 속도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속임수에 따라 다니며 시청자의 웃음을 자아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라이온즈 신인들은 변화구에 약점을 보였다.

그리고 그게 1군과 2군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후배들을 위해 시범을 보였다.

‘잘 봐라. 너희들 보고 있지?’

변화구를 노릴 때는 양 발을 땅에 대고 있는 게 좋다.

타자는 보통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고 있기 때문에, 투구가 되기 전에도 앞발을 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면 너무 성급한 타격이 되면서 변화구에 대응할 수가 없다.

지금 저 투수가 구위로 날 윽박지를 수 있을까?

당연히 변화구가 들어오겠지, 발을 움직이기 전에 약간 멈칫하며 공을 조금 더 보는 여유를 부렸다.

‘안 쳐’

낮게 떨어지는 볼, 투수의 손을 떠난 순간 구종은 이미 눈치 챘다.

낮은 공은 거르고 높은 공을 때리는 게 변화구 공략의 기본, 2구도 낮게 들어왔지만 문제없이 골라냈다.

‘이 자식은 여전하구나. 올해도 애 좀 먹겠네.’

곁눈질로 타자를 살피던 오건무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이렇게 낮게 떨어트려도 방망이가 안 나오다니, 선구안이 얼마나 좋다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초구부터 빠른 볼을 던지는 거였는데, 볼 카운트가 몰리고 나서야 빠른 볼을 지시하는 코치가 원망스러웠다.

따아악~!!

“그렇지!!”

“왔구나!! 왔어!!”

힘껏 잡아당긴 타구, 타구를 확인한 이인영은 배트를 던지며 1루로 걸어갔다.

뒤이어 날아드는 동료들의 환호성, 역전 투런 홈런에 힘입은 라이온즈는 연습경기 5연승을 달렸다.

앞으로 2경기가 더 남았지만 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전지훈련에 동행한 차명석 단장은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소소한 연회를 준비했다.

“자, 올해는 반드시 우승하자!! 위하여!!”

“위하여~!!”

이성한 감독의 축사에 맞춰 선수들은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훈련 기간이라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여기저기서 캭캭대는 사운드에 월드스타도 동참했다.

“아~ 살 것 같다.”

“너도 이제 맥주 맛을 아는 거냐?”

“그냥 분위기에 편승하는 거죠. 이런 자리에서 술 못 마신다고 홀짝거리면 눈치 없다고 욕해요.”

그냥 안다고 할 것이지 여전히 솔직한 녀석,

어쨌든 그렇게 연회는 계속됐고, 선수들은 좋은 안주와 술을 두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친목을 쌓았다.

‘안 먹나?’

한편, 신인 투수 이동찬은 남아도는 안주에 눈길을 줬다.

보아하니 안주에 큰 관심 없는 선배들, 그럼 내가 먹어도 되는 건가. 눈치 한 번 살피고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야, 누가 그거 다 먹으래? 어?”

이때 잠자코 있던 이인영이 눈치를 줬다.

잠깐 방심한 사이 다 먹어치운 안주, 진심으로 당황한 이동찬은 안 드시는 거 아니었냐며 방어에 나섰다.

“야, 지금 선배님들이 말하고 있잖아. 그럼 내가 후배로서 들어드려야지 예의도 없이 안주만 먹냐?”

“저는 안 드시는 줄 알고…”

“그래도 먹기 전에 허락은 구할 수 있잖아?”

“야, 됐어, 그깟 안주 좀 먹었는데 뭘 그렇게 타박을 주냐”

보다 못한 임완수가 말리고 나섰다.

우리도 후배 안 괴롭혔는데 이 자식은 뭘 그렇게 군기를 잡는 건지, 하지만 이인영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앞세웠다.

“얘들을 괴롭혀야 제가 편해져요.”

“그건 또 뭔 소리냐?”

“선배님들은 후배 군기 못 잡아서 잔소리 듣고 사시잖아요. 오늘도 제가 한 마디 할까요?”

이인영은 마음에 담아뒀던 서운함을 털어놨다.

오늘 상대한 베어스의 3루수 김재규가 수비에 문제가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다.

안타를 못 치겠으면 그 곳으로 번트를 대는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중심 타자인 내가 번트를 대게 하다니, 그것 때문이 1루수 김동환에게 온갖 조롱은 다 들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제가 명색이 3번인데 번트나 대야겠습니까? 네? 안 그래요?”

“와아~ 이 자식 또 시작이네. 이제라도 군기 잡아야 되나.”

“그러기엔 제가 너무 커버렸어요. 다들 알면서 왜 이러시나.”

선배들은 마음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긴 우리가 건들기엔 너무 커버린 자식, 그건 이성한 감독도 마찬가지라 침묵을 지켰다.

“저기 감독님도 보세요. 위로는 단장님 눈치 보지~ 성적 안 나오면 팬들이 뭐라고 하지~ 선수들은 하라는 대로 안 하지~ 저게 다 감독으로서 위엄을 못 세워서 그런 거라니까요. 단장 앞에서도 할 말 있으면 하고, 선수가 못하면 호통도 치고 그래야 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잠자코 있던 이성한 감독 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마침 단장도 이 자리에 있는데 하필이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차명석 단장은 껄껄 웃으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당황한 이성한 감독은 진압작전에 나섰다.

“야, 너 술 취했냐? 갑자기 왜 그렇게 막 나가냐?”

“저 원래 술 취하면 막 나가요. 술 마시고 박한우 위원님한테 전화 걸고 소리 친 적도 있고요.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도 윗사람들한테 대들고 후배들은 괴롭힐 거예요. 그래야 제가 편해져요.”

계속되는 술주정에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방지다 못해 이젠 괘씸한 녀석,

여기저기서 저 자식은 앞으로 술 먹이면 안 되겠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야, 너 그만 가서 자라. 더 마시면 안 되겠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한 잔 더!!”

이날 월드스타는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다음 날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기록, 일본 전지훈련에서 타율 0.566, 홈런 2개, 6타점을 거두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범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는 다들 집에서 휴식, 이인영도 집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선배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배님, 저 이동찬입니다. 식사 하셨어요?]

그런데 후배들이 이상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얘들이 왜 날 이렇게 깍듯이 대하는 걸까, 기분 나쁘니까 보내지 말라고 문자를 넣었다.

[선배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뭐? 내가 언제?”

후배들의 모함에 이인영은 발끈했다.

내가 술자리에서 정말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었지만 다른 선수들을 통해 교차 검증을 받으면서 그날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 마이 갓~ 나 미쳤나봐.’

단장이 버젓이 보고 있는데, 감독님한테 단장한테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했다니, 이런 하극상이 어디에 있나.

수습하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 그냥 모른 첫 하기로 했다.

“너 술 마시고 실수했냐?”

“네…”

“하하~ 어떻게 그런 것까지 날 닮았냐?”

이인호는 아들의 고해성사에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술자리에서 실수해서 선배들에게 미움을 샀는데, 아들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될 줄이야. 그래도 너는 괜찮을 거라며 위로해 줬다.

“솔직히 네가 못 할 소리 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력 없는 선수가 그런 말 했다면 매장 당하겠지만, 넌 실력이 있으니까 괜찮아.”

“하아~ 앞으로 술 마시면 안 되겠어요.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이인영은 이날부터 술과 절교를 선언했다.

술이 들어가면 지나치게 용감해지는데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발칙한 반란은 한 번이면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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