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하나만 잘 해요 (3)
[박혁, 시범경기 첫 홈런 쏘아 올렸다.]
3월 2일, 한국 여론은 태평양을 건넌 박혁의 소식에 집중했다.
올 1월 14일, 필라델피아와 4년 2600만 달러에 합의한 박혁은 선발 좌익수로 출전,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 좌중간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날렸다.
한국에서는 주로 유격수를 봤고 수비 능력도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메이저리그의 시선은 냉정했다.
좌익수는 막말로 지명타자와 다를 게 없는 자리다.
수비가 애매해서 어디에도 놓기 어려운 선수가 차지하는 포지션, 이건 타격이 안 되면 방출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4년 2600만 달러를 제시했다면 필라델피아가 박혁의 타격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뜻, 시범경기지만 팬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 이인영은?]
이때 한 팬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메이저리거가 유력한 이인영의 포지션은 좌익수, 수비에서 그렇게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인영은 나름대로 허슬 플레이를 보여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빠른 발과 넓은 수비 범위가 인상적인 선수, 그렇다면 중견수로 뛰게 해 몸값을 높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성한 감독은 이인영을 중견수로 쓸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공격이 우선입니다. 수비는 그 다음이죠.”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수비보다 공격이 팀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확인 됐다.
그래서 수비 능력은 떨어져도 공격이 되는 선수가 좌 - 우익수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구멍을 채워주는 게 바로 중견수의 몫이다.
공격이 가장 중요한 야구에서 3할 40홈런을 치는 타자를 중견수로 옮기라고? 이건 팀 말아먹자는 뜻 아닌가.
비전문가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바보 짓, 이성한 감독은 한 가지만 잘 하면 된다고 선을 그었다.
“제가 이인영 선수에게 기대하는 건 공격입니다. 수비는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뜻, 그렇다면 선수의 입장은 어떨까.
이인영은 기자의 질문에 담담한 소감을 밝혔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타격입니다. 수비는 그 다음이죠.”
“그래도 메이저리그는 수비를 중시하지 않나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가끔 중견수로 활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계속되는 참견에 이인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짱이니까 다 잘할 수 있다고 하면 되는 건가. 인생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소감을 내놨다.
“우리는 언제나 지름길을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빨리 출세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이죠. 하지만 저는 인생의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A지점에서 D 지점까지 가려면 B와 C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죠. 물론 그 과정을 뛰어넘는 선수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천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B와 C를 거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중견수 연습을 한다?
물론 그 팬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인영은 지름길만 보고 달려오지 않았다. 정도를 묵묵히 걷다보면 보이는 게 지름 길, 메이저리그 진출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절 천재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A에서 D로 건너뛰는 마법 따윈 모릅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저는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그걸 귀찮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의미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면 일단 KBO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게 우선이고, 포스팅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죠. 저는 순리대로 나아갈 겁니다.”
얼른 메이저리그로 가라고 소리 질러 봤자 달라질 건 없다.
나 하나 때문에 포스팅 시스템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메이저리그를 논하는 건지, 올해도 KBO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게 목표일 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오늘의 미션, 안타를 많이 친다. 팀 승리에 보탬이 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치르는 연습게임,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차분한 자세로 공을 기다렸다.
상대 팀은 미요시 호크스의 에드윈 마이릭스, 빠른 볼 최고 속도는 155km지만 평속은 145km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제구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무브먼트가 뛰어난 빠른 볼 덕분에 일본 야구는 문제없이 평정한 선수,
메이저리그 투수의 평균 속구 수직 움직임은 25cm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이릭스의 수직 무브먼트는 무려 30cm, 여기에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던지는데, 체인지업을 던진 뒤, 체인지업과 반대 방향으로 휘는 슬라이더를 던져 삼진을 잡는 능력도 뛰어나다.
결국 제구보다 구위를 앞세우는 선수라는 뜻, 간결한 스윙으로 대응했다.
따악~!!
‘오호~ 이걸?’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타구, 미요시 호크스의 감독 존 포터는 이인영의 타격에 주목했다.
마이릭스의 빠른 볼은 타자의 눈보다 더 떨어지는 공이라 스윙 각을 만들기 쉽지 않다.
거기다 특유의 무브먼트 덕분에 체인지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뛰어난 편, 초구를 공략 못하면 체인지업에 당하고, 체인지업을 골라도 슬라이더에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타자들은 초구를 노리고 들어온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 계속 당하는 것, 그런데 저 타자는 처음 만난 투수 공을 너무도 당연하게 때려냈다.
‘본능이 있군. 타고난 본능 말이야.’
사냥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사슴이 사자를 잡을 수 있나.
타격도 마찬가지, 기술을 전수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사냥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맹수가 자신이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생태계는 공포에 빠지는 법, 왜 저 선수 때문에 KBO가 공포의 무대가 됐는지 대략 이해가 됐다.
따악~!!
‘어라?’
이인영은 두 번째 타석에서도 마이릭스의 빠른 볼을 받아쳐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내 공을 이렇게 쉽게 치는 선수가 있었던가. 자기 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마이릭스는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치는 건가?’
후속 타자 돈 부머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석에 섰다.
나는 전혀 감을 못 잡겠는데 저 녀석은 어떻게 안타를 치는 걸까. 일단 어설프게 흉내는 내봤다.
하지만 높게 뜨면서 내야 플라이, 성운 라이온즈는 3회 초 공격에서도 득점을 내지 못했다.
“넌 도대체 어떻게 치는 거냐?”
“뭐가?”
“난 저 자식 공 못 치겠어. 뭔가 비결이 있는 거냐?”
타격의 비결을 묻는 부머, 잠시 눈알을 굴린 이인영은 답을 줬다.
“공이 날아와서 내 방망이에 붙는다고 생각해 봐.”
“뭐?”
“배트를 넓게 생각하라고, 배드민턴 채처럼”
요즘 타자들은 공을 띄운다며 온갖 기술을 선보이는데, 이인영은 그 이론에 동조하지 못했다.
배드민턴 채를 휘두를 때 다들 어떻게 하나, 최대한 정확하게 치려고 노력할 거다.
그럼 타격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들 다운 스윙이니 어퍼 스윙이 하는데, 이인영은 지금까지 그런 건 의식해 본 적 없다.
정확하게 치면 만사 오케이, 평소 타구를 약간 띄우는 부머는 3번 째 타석부터 정확한 타격에 집중했다.
‘나는 안 되겠어.’
나름 심혈을 기울였는데 2루 정면으로 굴러간 타구,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부머는 대타와 교체됐다.
야구를 하다 보면 이런 저런 날도 있는 법, 별로 마음에 두진 않았다.
“왜 자꾸 어깨를 만져?”
“그냥 이러고 싶어서”
교체된 건 이인영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 옆에 앉은 부머는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며 잡담을 이어갔다.
“내가 재미있는 일 알려줄까?”
“뭔데?”
“어느 날 지하철을 탔거든? 마침 내릴 때라 일어났는데, 뒤를 돌아보니 까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아가씨 3명이 앉아 있는 거야.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어.”
결국 내 엉덩이가 크다는 자학개그 아닌가,
어떻게든 날 웃기고 싶은 건가, 솔직히 별로 웃기진 않은데 노력이 가상해서 어울려줬다.
“그럼 너와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이 자리엔 숙녀 몇 명이 앉을 수 있을까?”
“으음~ 글쎄…여섯 명이 되려면 조금은 더 기다려야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아직 덜 컸잖아. 나중에 크면 너도 숙녀 셋을 품을 수 있는 남자가 될 거야.”
이인영은 어이가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엉덩이가 그만큼 커질 거라는 건가. 아니면 진짜 여자 셋을 품는 남자가 된다는 건가.
적어도 엉덩이가 커지는 쪽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아빠 곰이고, 저 녀석은 아기 곰이다.”
돈 부머의 재미없는 개그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다른 선수들과도 잘 지내지만 유독 이인영과 붙어 다니는 돈 부머, 기자들은 이인영 선수와 당신은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이인영이 한국에서 곰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부머는 아빠 곰을 자처, 덕분에 이인영은 팔자에도 없는 아기 곰 별명을 획득했다.
“너 왜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왜? 아기 곰 귀엽잖아.”
“됐어. 넌 앞으로 내 옆에 오지 마.”
괜히 같이 있다간 곰 가족으로 불릴 기세, 하지만 성운 라이온즈 응원단은 이 기세에 올라탔다.
응원가를 정하는 건 중요한 일, 이인영은 작년 시즌 걸 그룹 노래를 응원가로 사용했지만 저작권 문제가 걸리면서 올 시즌부터 응원가를 교체하게 됐다.
마침 아기 곰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니, 곰 세 마리 동요를 개작해서 응원가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인영은 그런 응원은 내 사기를 떨어뜨릴 분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1년 동안 그 응원가를 듣느니, 차라리 욕을 먹겠습니다.”
“왜요? 아빠~ 곰~ 엄마~ 곰~ 이인~ 영~ 노래 귀엽던데요?”
“아~ 진짜 하지 마세요. 창피하니까”
장난에 발끈하는 월드스타, 목적을 완수한 리포터는 PD의 사인대로 화제를 바꿨다.
“이인영 선수, 얼마 전 보육원에 5천만 원을 기부하셨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기부를 하셨는데, 앞으로도 계속 하실 건가요? 하신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그걸 왜 하냐는 질문은 제가 답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에 이유를 붙여야 하나? 이인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소감을 밝혔다.
“그렇잖아도 친하게 지내는 아이가 어느 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오빠는 왜 이렇게 우리한테 잘해 주냐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하셨는데요?”
“사랑에 이유를 붙인다는 건 좀 그렇잖아요. 부모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자식에게 사랑을 주나요? 그건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일이죠. 그런데 그 아이들은 그런 당연한 사랑을 못 받고 있으니까…제가 조금이라도…그냥 그런 게 있어요.”
부끄러운지 자체 편집을 해 버린 월드스타, 리포터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인영 선수는 의외로 마음이 여리신 것 같네요.”
“저는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그걸 이제 아셨나요?”
이 인터뷰로 이인영은 더 많은 팬을 확보했다.
어린 나이에 슈퍼스타에 올랐으니 조금 거만한 면도 있을 줄 알았는데, 까면 깔수록 속이 부드러운 남자, 이런 선수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성운 라이온즈 팬들은 하루라도 빨리 시즌이 개막되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