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뛰어봤자 다 내 밥 (12)
딱~
담장에 던진 돌멩이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타구, 1루로 달려 나가던 이인영은 파울을 확인하고 타석으로 돌아왔다.
“후우~ ”
“끝나는 줄 알았네.”
희망과 절망의 줄타기 위에서 아찔한 숨소리를 내뱉는 팬들, 날씨는 제법 쌀쌀하지만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모두 더그아웃 밖으로 나와 후배의 활약을 응원했다.
안타를 치든 못 치든 그건 저 녀석의 책임이 아니다.
저 타석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숨어 있는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선수의 의지,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눈물, 그 모든 드라마가 저 자리에 녹아있다.
타석에 들어선 순간 관중의 관심은 한 선수에게 집중된다.
누군가는 역사에 남는 명장면을 남기고 누군가는 쓸쓸히 사람들의 기에서 사라지는 자리, 인생도 저 타석과 마찬가지 아닐까.
하지만 이인영은 팬들에게 잊힐 권리도 없었다.
쳐도 못 쳐도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 팬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기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줬다.
아웃이든 홈런이든 어차피 기억될 모습이라면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좋겠지,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바깥쪽 빠져나갑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뒤에 김상규 선수가 있거든요. 여기서 볼넷을 골라내고 찬스를 넘기는 것도 괜찮습니다. 만루 홈런 나오면 동점이에요.”
자이언츠의 이완기 포수는 다시 벤치 사인을 확인했다.
여차하면 거르더라도 좋은 공은 주지 않는 게 최선, 아예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하지만 이건 위험한 생각, 강타자들은 대부분 몸 쪽 볼보다는 가운데나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때려낸다. 어정쩡하게 들어온 바깥쪽 공은 좋은 먹잇감이 될 뿐, 겁을 먹은 기척에 이인영은 배트를 거뒀다.
‘하아~ 이런 전개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가 되자 포수는 완전히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차라리 병살을 때리고 욕을 먹는 게 낫지 이 중요한 상황에서 볼넷이 뭔가. 초구를 공략하지 못한 게 원인, 상대가 도망쳤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따악~!
“자 … 이 타구는 멀리 가지만 중견수가 잡아냅니다. 경기 종료, 성운 라이온즈가 끝내 경기를 뒤집지 못했습니다. 스코어 7대 3, 이렇게 되면 5위와의 격차는 4게임으로 벌어집니다.
“어렵게 됐네요. 앞으로 남은 일정을 고려하면 자력 진출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3루 파울 라인에 늘어선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준 팬들에게 사죄의 인사를 올렸다.
많은 기대를 받고도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한 이인영은 아예 석고대죄, 한참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퍼포먼스가 너무 거했던 탓일까, 그날 밤 이인영은 친분이 있는 기자의 전화 통화를 받았다.
[역시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까?]
“그런 것도 있긴 있는데요. 제 자신이 좀 창피했어요.”
[뭐가 말입니까?]
“사실 배터리가 승부를 피하는 전개도 생각은 했거든요. 그런데 초구에 빠른 볼이 슉~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걸 쳤어야 했는데 파울이 … 하아~ ”
결과는 볼넷이었지만 이인영은 그 타석을 아웃으로 받아들였다.
칠 수 있는 공을 놓쳤다는 것부터가 실패자,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솔직히 6회 즈음에 제가 멘탈이 좀 흔들렸거든요. 그때 집중력이 흔들린 게 제 스윙을 못한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열심히 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 ]
“아니요. 어제 저는 정말 최악이었어요. 제가 야구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력을 떠나서 정신력이 아직 미숙한 것 같습니다.”
석고대죄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니, 단순한 퍼포먼스인 줄 알았던 팬들은 다양한 반응을 내놨다.
[살다 보면 멘탈 붕괴될 때도 있는 거지, 7대 1로 뒤지고 있는데 나라도 속상했을 듯]
-> 솔직히 어린 선수에게 너무 많은 부담이 지워진 거지
-> 뭐가 부담이냐 연봉을 3억씩이나 받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짊어져야 되는 거지
-> 이인영 올 시즌 팀 전체 홈런 31%, 타점 20% 책임지고 있다. 뭘 어떻게 더 짊어져야 하는 건데?
[어떻게 매번 집중하고 매번 안타 치냐, 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데 굳이 저런 말 하는 거 보니 사람은 솔직한 것 같다.]
비난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이 위로의 말, 겨우 마음을 추스른 이인영은 남은 5경기에서 시즌 성적을 끌어올렸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67, 홈런 44개, 123타점,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달성해 냈다.
하지만 팀은 리그 6위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그렇게 시즌은 마무리 됐다.
“패배자들끼리 술 한 잔 할까요?”
[너 진짜 … ]
“선배님도 할 일 없으시잖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얼마 후, 이인영은 ST 위너스의 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즌 중,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올해 두 사람은 모두 플레이오프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강제 겨울잠 모드, 지금 아니면 언제 만나겠나.
마침 서로 할 말도 있고, 약속 장소와 날짜를 잡았다.
“결국 네가 이겼구나. 내가졌다.”
박혁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올 시즌 타율 0.356, 홈런 41개, 110타점을 올리며 활약했지만 모두 후배에게 밀렸다.
하지만 나도 패배자인데 그런 말 들어봤자 뭐 하나, 이인영은 됐다며 손을 저었다.
“너 나한테 이 말 듣고 싶어서 부른 거 아니었냐?”
“제도 제가 무례한 건 알고 있는데, 사람 불러 놓고 그런 말 할 인간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네도 네가 버릇없는 건 알고 있구나?”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맞부딪쳤다.
오늘 따라 술이 왜 이렇게 달달한 걸까, 패배자의 술은 써야 마땅한데, 한 잔 두 잔 넙죽하다보니 취기가 달아올랐다.
“야, 내가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넌 진짜 야구 잘한다.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 하거든? 그런데 너는 진짜 잘해”
“그래봤자 우물 안의 개구리죠. 메이저리그에는 저보다 잘 하는 선수들이 한 트럭 있을 걸요?”
박혁은 마음에 담아둔 말을 쏟아냈지만 이인영은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에서나 일인자 취급을 받지 거기서는 어떻게 될지 누가 아나, 아니, 세계 최강이란 어떤 존재일까.
너희들은 모두 약해 빠졌으니 내 발 밑에 무릎을 꿇으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존재일까? 이인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는 세계 최강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스스로 부족함을 안다면 채워나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지 않을까요? 결국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가 세계 최강이겠죠. 내가 짱이라고 건방 떠는 놈은 결국 죽더라고요.”
“어디에서?”
“제가 보는 만화에서요.”
박혁은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뿜어낼 뻔 했다.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는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런 태도가 이 녀석을 최강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엔 부족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부족함을 만들어 내고 채워가는 녀석,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니까 선배도 겸손해지세요. 그래야 사람이 발전하죠.”
“1절만 해라.”
후배를 째려본 박혁은 마시다 만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부족함을 알고 노력하는 자가 세계최강이라, 나는 그 개념에 부합되는 사람인가. 스스로를 되돌아 봤다.
“시즌 끝나면 메이저리그 진출 하실 거죠?”
“그래야지, 이번에는 무조건 가려고”
박혁은 시즌이 끝나자마자 마음을 정했다.
작년 시즌은 노예 계약이다 뭐다 하며 LA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제 FA 자격을 얻었으니 어느 구단과도 자유롭게 논의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2인자였으니 그곳에서는 한 25인자 쯤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솔직히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고도 선택한 길, 한 잔의 술로 각오를 다졌다.
“그럼 25인자의 인생을 위하여~ ”
“야!! 너는 꼭 말을 해도 … ”
이 와중에도 이인영은 선배의 앞길에 행운이 깃들길 기원했다.
그 많은 선수들 중에서 25등 하면 대단한 거 아닌가, 순간 기분이 팍 상했지만 박혁은 얼떨결에 술잔을 부딪쳤다.
“야, 솔직히 말해 봐, 너는 거기서 몇 인자 할 자신 있냐?”
“글쎄요. 가보기 전에는 모르죠.”
“WBC에서 붙어봤으니까 알 거 아냐, 네 실력이 거기서 얼마나 통할 거라고 생각 하냐?”
“모른다니까요.”
선배의 질문에 이인영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WBC에서 상대한 선수들은 냉정히 따지면 2진, 거기서 좀 잘 했다고 우쭐거리는 건 최강자의 태도가 아니다.
부족함을 알고 끊임없이 노력할 뿐,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 * *
[내일 아침 사무실로 오세요.]
해가 지난 1월 2일, 이인영은 구단 사무실 호출을 받았다.
작년 시즌에 비해 성적이 떨어졌지만, 리그 전체적으로 장타력이 하락했다. 그런 환경에서 44홈런을 때린 선수, 연봉 인상은 당연했다.
“그 친구는 달라는 대로 주게”
“알겠습니다.”
연봉 협상을 앞두고, 성운 그룹의 회장 김태성은 차명석 단장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KBO는 올해부터 3년 차 이상 선수에 등급을 매기고 연봉 협상에 반영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성운 라이온즈의 작년 시즌 총 연봉은 63억, A등급을 받은 이인영은 팀 총 연봉의 10% 안에서 연봉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
최대 6억 3천만 원 인상이 가능하다는 건데, 그걸 진짜 실현해 줄 팀이 있을까. 구단과 선수협이 협의한 사항이지만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는 건 양쪽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달라는 대로 주는 건 아니지.’
차명석 단장은 긴장한 얼굴로 선수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6억 3천만 원 인상은 무리, 그래도 2~ 3억 정도의 인상은 생각해 뒀다.
“우리는 5억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5억 인상 해주시게요?”
“아 … 아니 그게 아니라 … 연봉이 … ”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놀라세요.”
이젠 단장까지 들었다 놨다하는 선수, 제대로 낚인 차명석 단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하고 제 성적을 비교 해봤거든요. 6억 5천 정도는 주셔도 될 것 같은데… ”
이인영은 초반부터 강수를 뒀다.
오프 시즌 동안 비(非) FA 선수의 성적과 연봉을 비교, 그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합당한 연봉을 측정해 봤다.
5억은 솔직히 너무 적고 6억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구단이 격려 차원에서 5천 만 원 더 준다면 땡큐, 안 줘도 그만이지만 봉사활동으로 팀 이미지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게 있으니 그 정도는 서비스로 줘도 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차명석 단장은 백기를 들었다.
회장님이 9억 3천 꽉 채워서 주라고 했는데 그래도 3억 정도 깎은 게 어딘가. 6억 5천 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이 ‧ 인 ‧ 영 님 계좌로 5천 만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일단 구단에서 봉사활동에 쓰라고 5천 만 원을 선금으로 지급, 돈이 들어온 걸 확인한 이인영은 내년 시즌을 위한 몸만들기에 나섰다.
올해는 패배자로 끝났지만 내년에야 말로 우승,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