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뛰어봤자 다 내 밥 (11)
[이인영 선수 힘내세요.]
[우리는 마지막까지 응원할 거예요.]
시즌 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성운 라이온즈 라커룸은 팬들이 보낸 위문품에 휩싸였다.
나름대로 노력해봤지만 5위와의 격차는 여전히 3게임 차, 남은 경기는 6게임뿐이다.
정말 막판 뒤집기라는 게 가능할까, 그동안 팬서비스를 확실히 해 둔 덕분에 많은 격려를 받았지만 슈퍼스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야, 너 이거 다 어떻게 할 거냐?”
“드세요. 전 과자 별로 안 좋아해요.”
요즘 방망이도 잘 안 맞고 이래저래 풀이 죽은 녀석, 동료들은 힘 좀 내라며 위로했지만 곰무룩 시위는 계속됐다.
“야, 여기 꿀 과자 있다. 얼른 먹어”
“아~ 됐어요.”
농담도 기분 좋을 때 해야지 지금 분위기에서 곰 취급하는 건가, 산더미 같은 선물을 뒤로하고 이인영은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늘도 1회부터 실점을 하는 투수진, 해탈한 이성한 감독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지만 본능적으로 패배를 거부하는 이인영은 발악에 나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1사 주자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60, 홈런 43개, 11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즌 막판에 살짝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죠. 이인영 선수가 힘을 내야 반등의 기회가 있습니다.”
[딱~!!]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최근 이렇게 파울이 되면서 카운트가 몰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박한우 위원께서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인영 선수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두드러졌던 부분이, 밀어 쳐서 홈런을 만들 수 있는 장타력이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당겨 치는 스윙을 하다 보니 지금처럼 밀어 쳐야 할 공에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도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라는 거군요?”
“예, 예전의 감각을 떠올려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이지만 박한우 위원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3할 6푼에 43홈런을 치고 있는 선수를 부진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니, 팬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 버린 건가.
하지만 최근 타격을 보면 예전 같은 모습이 안 나오는 것도 사실, 친 아들처럼 아끼는 선수라 안타까운 마음은 깊어졌다.
딱~!!
“아 … ”
3구를 때렸지만 좌익수가 파울 라인 근처에서 잡은 타구, 결과를 확인한 이인영은 헬멧을 눌러쓰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중심 타자가 이런데 어떻게 팀이 페이스를 끌어올리겠나,
슈퍼스타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이 NA 자이언츠는 2, 3회에 추가점을 내면서 4대 0으로 앞서나갔다.
‘아니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이인영은 무너진 멘탈을 수습했다.
오늘 아침에도 팬들의 정성이 담긴 메시지를 받지 않았나, 팬이 포기를 안 했는데 내가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을까.
인생은 칠전칠기, 7번 아웃 되도 3번 치면 잘 하는 게 타자 아닌가. 못 한 것 만 생각하다보니 기분도 다운되는 거겠지, 3회 말 두 번 째 타석에서 매서운 타구를 날렸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타자 주자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이인영 선수가 안타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되면 올 시즌 50번 째 2루타죠. KBO 역대 최초 기록입니다.”
“작년 시즌 55홈런을 쳤으니 50홈런 50 2루타를 모두 기록한 선수가 되는 거죠.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이 기록을 세운 선수는 한 명 뿐입니다.”
올 시즌 KBO는 홈런 수가 급감했다.
작년 시즌에 비해 무려 369개가 줄었는데 당연히 10개 구단 타자들의 장타율도 0.442에서 0.387로 5푼 이상 떨어졌다.
2루타도 200개 이상 줄어들 정도로 장타 가뭄에 시달리는 올 시즌, 그런데도 이인영은 장타 97개를 때려냈다.
3개만 더 추가하면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100장타 시즌, 하지만 팀이 갈 길이 바쁜 상황이라 개인 기록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도 선수 입장에선 그리 기쁘지 않았다.
따악~!!
“와아아~!!”
후속타자 김상규의 적시타가 터지면서 드디어 득점, 홈을 밟은 이인영은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마치고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야, 너도 좀 먹어라. 그래도 너한테 보내준 건데 … ”
“왜요? 진짜 다 먹었어요?”
“그건 아닌데 우리만 먹는 게 미안해서 그렇지”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과자 하나보다 달콤한 1득점, 오늘 경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동료들이 다 먹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성운 라이온즈의 추격은 여기서 멈췄고, 7회 초에 접어들었을 때 스코어는 7대 1까지 벌어졌다.
이제 정말 안 되는 건가.
이인영은 옆자리에 앉은 임완수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라커룸 가서 과자나 먹을 까요?”
“야!! 정신 차려,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니야.”
“꿀 과자 아직 있죠? 저 사실 그거 좋아하는데”
“야… 너… 장난하지 마.”
임완수는 흠칫했다.
흐리멍덩한 눈에 반 쯤 넋이 나간 얼굴, 장난이 아니라 진짜 멘탈이 붕괴된 건가. 정신 차리라며 어깨를 붙잡았다.
‘말만 하면 뭐 하나, 성과가 있어야지.’
그제야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오늘 지면 5위와의 경기 차는 4게임으로 벌어진다. 이게 뭘 뜻하는 지모를 사람이 있을까. 시즌 내내 솔선수범하며 팀을 이끈 후배, 그런 녀석이 지금 포스트 시즌 탈락을 앞두고 무너지려 하고 있다.
우리가 기회를 만들어 줘야 저 녀석이 정신을 차리겠지, 7회 말부터 뒤늦은 추격에 나섰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좌익수 옆에 떨어집니다!! 박한수 선수의 안타!!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두 타자가 출루하는 성운 라이온즈입니다!!”
“아직 3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죠. 일단 한 점 따라 붙겠다는 각오를 보여줘야 합니다.”
후속 타자의 진루타와 볼넷이 이어지며 1사 주자 1 - 2루, 타석에 들어선 임완수는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여기서 내가 병살이라도 치면 끝장,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선수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잘 가라~ 2021 시즌,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요~ ’
하지만 결과는 6 - 4 - 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이인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라운드에 발을 들였다.
6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희망고문을 당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해야 할까.
호흡기를 뗐으니 올해는 미련 없이 보내줘야겠지, 포기하니까 편해졌다.
“자, 이제 8회 초 NA 자이언츠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랜디 번스, 오늘 4타수 3안타 2타점 대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홈런 하나만 추가하면 힛 포더 사이클이죠. 본인도 아마 의식을 하고 있을 겁니다.”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멀리 가는 타구!! 좌익수는 계속 뒷걸음질!! 펜스 앞에서~!! 잡아냅니다!!!! 이인영 선수의 호수비!! 한 점을 막아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네요. 저런 플레이를 보고 선수들도 뭔가 느끼는 게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이인영의 멘탈 붕괴를 전혀 모르는 박한우 위원은 칭찬을 이어갔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 눈물이 앞을 가릴 뿐, 반면 부담감에서 해방된 이인영은 8회 말 타석에서 좋은 타격을 선보였다.
따악~!!
“와아아~!!”
1루수 옆을 지나 파울 라인 안 쪽에 떨어진 타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팬들은 2루를 지나 3루까지 질주하는 모습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단숨에 무사 주자 3루, 후속 타자 김상규가 희생플라이를 날려주면서 스코어는 7대 2로 좁혀졌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먼 게임, 더그아웃에 입성한 이인영은 라커룸에서 먹다 남은 과자 한 봉지를 입수했다.
‘또 질소를 샀더니 과자를 서비스로 줬네.’
과자를 다 먹은 곰은 텅 빈 봉지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리고 이걸 집중 조명하고 있는 중계카메라, 그라운드에서는 분명 진지했는데 시청자는 저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그아웃에서 뭘 먹는다는 건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짓, 하지만 월드 스타의 진지한 플레이를 지켜 본 팬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못나 보였으면 저런 행동을 할까.’
이성한 감독도 이인영의 행동을 곁눈질로 살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누구도 지적할 수 없는 입장, 사실 이성한 감독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지만 저런 태도를 보니 괜히 오기가 끓어올랐다.
못난 어른은 아이를 질책할 자격이 없는 법, 한소리 하고 싶다면 여기서 뭔가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8회 말 공격은 추가 득점 없이 종료, 마지막 9회에 희망을 걸었다.
“자, 이제 성운 라이온즈의 9회 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7번 타자 박한수부터 시작되는 공격, 앞선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아직 많은 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거든요.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따악~!!]
“자!! 여기서!!!!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안타입니다!! 박한수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들어갑니다!! 지금은 홈런보다 귀한 2루타라고 봐도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병살 위험도 사라졌고, 여기서 상위타순으로 이어지면 또 모릅니다.”
NA 자이언츠는 여기서 투수를 교체했다.
리그 7위를 달리고 있으니 플레이오프 진출은 물 건너 간 입장, 그래도 라이온즈가 우리를 밟고 올라가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다.
우리가 못 가니까 너희도 못 가게 하겠다는 물귀신 작전, 점수도 5점 차로 넉넉하겠다 1루를 채우더라도 좋은 볼을 주지 않았다.
‘그럼 나가면 되지.’
볼넷을 얻어낸 정익호는 1루로 걸어 나갔다.
이성한 감독은 타자들에게 강공을 지시, 9번 타자 신익호가 2루 쪽 느린 땅볼을 굴렸고 1루 주자만 2루에서 포스 아웃되며 1사 주자 1 - 3루가 됐다.
‘하아~ 포기했는데 인공호흡기 들이대네.’
높아지는 팬들의 목소리에 이인영은 엉덩이를 일으켰다.
여기서 임완수가 안타를 때리면 스코어는 7대 3, 홍현구가 살아나가고 내가 만루 홈런 치면 동점 아닌가.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시나리오지만, 몸을 풀며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따악~!!]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 중견수가!! 달려와서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태그 업!! 홈으로 들어옵니다!! 1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군요. 스코어 7대 3!! 성운 라이온즈가 다시 한 점을 만회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너무 부족하네요. 여기서 홍현구 선수가 나가고 이인영 선수가 홈런을 쳐도 7대 6이란 말이에요 … 너무 뒤늦은 추격입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게 야구입니다. 팬 여러분들도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홍현구는 6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평소 볼넷 거의 못 얻어 내는 사람이 여기서 이런 집중력을 발휘하다니,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씩 웃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웃어?’
자이언츠의 포수 이완기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제정신인가, 여기서 홈런을 맞아도 7대 6, 승부하라는 벤치 사인을 확인한 이완기는 미트를 한껏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