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뛰어봤자 다 내 밥 (9)
딱~!!
바깥쪽 공을 밀어 친 이인영은 배트를 집어던졌다.
한 눈에 봐도 틀려먹은 타구, 3루 주자 임완수가 홈으로 대시했지만 태그아웃이 되면서 순식간에 투 아웃이 됐다.
‘중심 타자가 득점권에서 못 치면 쓰레기지.’
이인영은 굳은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올 시즌 3할 6푼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득점권에서는 0.333, 득점권 타율은 길게 보면 평균 타율에 수렴한다는 말도 있지만 평균 타율과 3푼이나 차이가 있다는 건 우연으로 넘기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건 후속 타자 김상규의 2루타가 터지면서 1점은 건졌다는 것, 어쨌든 선취점을 올린 성운 라이온즈는 기분 좋게 2회 초를 맞이했다.
“자, 타석에는 피터 놀란 선수가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11, 홈런 21개, 8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진 타이거스가 올 시즌 용병 농사는 참 잘 지었죠. 특히 놀란 선수는 타이거스 역사상 최고의 용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조금 거품이 끼었습니다. 최고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는 아니에요.”
이인호 위원과 달리 박한우 위원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피터 놀란은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라는 게 한진 타이거스 관계자의 설명,
실제로 올 시즌 포수와 중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거쳐 갔다.
그렇다고 이 선수를 유틸리티 플레이어라고 할 수 없는 게, 3루수로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했다가 적응에 실패하면서 좌익수, 다시 2루수, 1루수로 정착하다보니 다양한 포지션을 섭렵한 것뿐이다.
밀리고 밀려서 1루에 정착했는데 이게 유틸리티 플레이어인가.
올 시즌 부상 선수가 유독 많았던 타이거스 사정 때문에 잠깐 외도를 했지만 놀란의 주 포지션은 1루수다.
그런데 1루수 실책 1위, 수비만 놓고 보면 좋은 평가를 주긴 어렵다.
그나마 평가를 만회한 게 타격인데, 피터 놀란은 득점권 상황에서 밀어치는 타격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많이 보여줬다.
올 시즌 득점권 타율은 무려 0.362, 하지만 득점권 타율은 평균 타율과 수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박한우 위원은 이것도 얼마 못가 꺼질 거품이라고 폄하했다.
따아악~!!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피터 놀란은 초구를 잡아당겨 동점 홈런을 만들었다.
이인영은 양아들 취급하면서 칭찬하더니, 우리 팀 선수는 깎아내리는 이유가 뭔가.
타이거스 팬들은 프로야구 게시판에 박한우 위원을 맹비난 했다.
[네 잘난 이인영은 무사 주자 1 - 3루에서 병살타 때렸다.]
-> 박한우 요즘 괜히 꼴 보기 싫음, 이인영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다른 선수들 깎아내려 가면서 띄워줄 이유는 없잖아?
-> 나도 동감, 피터 놀란은 위기에 강한 선수다. 1대 0에서 홈런 치는 거 안 보이냐?
놀란의 홈런을 시작으로 타이거스는 2회에 2득점을 올리며 경기를 뒤집었다.
오늘도 팀의 발목을 잡는 투수진, 시즌 내내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본 이성한 감독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다시 한 번 좌중간을 가르는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타이거스가 한 점을 더 추가합니다. 스코어 3대 1, 경기가 갑자기 급격히 기우는 분위긴데요.”
“라이온즈가 올 시즌 뒷심이 부족하네요. ST 위너스 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거둘 때만 해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했는데, 뭔가 힘이 빠진 느낌입니다.”
“지난 6월이었나요. 리그 5위 등극을 앞두고 라이온즈가 4연패를 당하면서 추락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될 듯 말 듯 한 경기를 하고 있는데, 이러면 지켜보는 팬들도 괴롭습니다.”
라이온즈는 4회 초까지 5대 1로 끌려가는 경기를 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준 팬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경기력, 4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선 이인영은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야, 너 최근 홈런 많이 쳤잖아. 오늘은 좀 쉬어라.”
타이거스의 1루수 진상우는 이인영을 툭 툭 건드렸다.
작년에 한 판 붙었지만 표면적으로 화해는 한 사이, 그런데 또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그냥 싸우자는 거 아닌가.
이인영은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
“그 쪽 투수들한테 전해두세요. 쳐 맞을 준비하라고.”
진상우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극을 해서 흔들어보려고 했는데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 부은 건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앞서고 있는 게임, 경계는 했지만 그렇다고 얼어붙지도 않았다.
“쳐 맞을 준비하라고 했다고?”
“어.”
“저 자식 웃기네. 우리가 무슨 동네북인 줄 아나.”
진상우를 통해 경고를 받은 타이거스 선수단은 코웃음을 쳤다.
자기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잘 나간다고 겁을 상실한 건 아닌지, 승리로 갚아주자며 결속을 다졌다.
‘화재는 조기 진압이 중요한 법.’
경기는 흘러 성운 라이온즈의 6회 말 공격,
선두타자 안타가 나오자 한진 타이거스의 김해수 감독은 투수를 교체했다.
상위 타선 4명을 제외하면 존재감이 없는 라이온즈의 타선, 이번 6회 말 공격은 7번 타자부터 시작됐다.
이 찬스를 하위 타선이 살려주면 복잡해지는 경기, 조기 진압을 위해 필승조 조현우를 투입했다.
[딱~!]
“아 … 이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박한수 선수는 2루수 뜬공으로 물러납니다.”
“타선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죠. 안타를 못 치면 진루타를 치고 그것도 안 되면 맞고라도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되는데, 라이온즈는 지금 그런 게 없어요.”
“박한위 위원님 말씀대로 출루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출루가 되면 1번 타자 임완수 선수부터 시작되거든요. 집중 있는 타격이 필요합니다.”
이성한 감독은 여기서 대타 정익환을 내보냈다.
무슨 수를 써도 출루가 필요한 상황, 하지만 정익환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을 무리하게 잡아당겼다.
바운드가 크게 튀면서 병살은 면했지만 선행 주자가 아웃되면서 2사 주자 1루,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대타요원은 풀이 죽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이제 타석에는 임완수, 2구를 잡아당겼지만 이번에도 유격수 정면으로 갔다.
‘살아야 한다!!’
1루 주자 정익환은 다소 깊은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주자의 다리에 걸린 2루수 박상호는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깜짝 놀란 정익환은 박상호에게 사과를 표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아니요. 괜찮아요.”
정익환은 그저 그런 대타요원이지만 태클을 당한 박상호는 국가대표급 수비 실력을 갖춘 선수, 그래도 나이는 정익환 쪽이 3살이나 더 많다.
선배라는 놈이 후배 다리에 태클을 했으니 사과는 해야겠지,
양 팀 모두 포스트 시즌을 노리는 상황이라 불꽃이 튈 뻔 했지만 박상호가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벤치 클리어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박상호, 그런데 2루심이 세이프 판정을 내리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아니 이게 왜 아웃이 아니야?!!”
김해수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와 거친 항의를 이어갔다.
주자가 루상을 이탈한 건 아니지만, 슬라이딩이 필요 이상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슬라이딩 깊게 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주심은 정익환의 슬라이딩이 야수와의 접촉을 노리고 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의욕이 앞서다보니 오버 슬라이딩이 됐을 뿐이라고 판단, 김해수 감독은 거듭 항의 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2사에 주자는 1 - 2루, 죽다 살아난 성운 라이온즈는 다음 타자 홍현구에게 기대를 걸었다.
[따악~!!]
“자 … 이 타구는 유격수!! 좌익수!! 사이에 떨어집니다!! 홍현구 선수의 행운의 안타!! 2루 주자는 일단 3루에 멈춰섭니다!! 2사 주자 만루!! 여기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말 그대로 임자를 만났네요. 여기서 한 방 나오면 동점입니다.”
비상사태가 걸린 타이거스 내야진은 마운드에 집결했다.
2아웃이라 병살을 유도할 상황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최근 8경기에서 6홈런을 퍼붓고 있는 이인영이라는 게 문제, 2루를 비워두는 건 너무 극단적인가.
김해수 감독은 심각한 표정을 코치와 대화를 나눴다.
“그냥 거를까?”
“그것도 방법이겠네요.”
타이거스는 지금 1승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 여기서 거르면 욕은 먹겠지만 당당한 패자보다 비겁한 승자를 택했다.
“우우~ 우~ ”
“사내새끼들이 XX 달고 창피하지도 않냐?!!”
조익현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중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 조현우는 예정대로 바깥쪽으로 볼을 뺐다.
“어~ 어~!! 공이 빠졌어요!! 빠졌어요!!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5대 2!! 성운 라이온즈가 한 점을 만회합니다!!”
“아~ 조현우 선수가 이런 실수를 하나요? 김해수 감독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타이거스는 명분도 실리도 다 잃었네요. 여기서 고의사구를 밀어붙인다면 정말 비참해집니다.”
타이거스는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독였다.
이제 2사에 주자 2 - 3루, 고의사구를 택할 명분마저 사라졌다. 예정대로 대놓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승부하는 척 하면서 걸러낼 것인가.
김해수 감독은 후자를 택했다.
‘체면은 지키면서 도망치시겠다?’
2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작년 준 플레이오프에서도 타이거스 배터리는 이런 식으로 도망치다 날벼락을 맞았다.
그렇게 당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적극적인 스윙으로 도발을 걸었다.
‘이걸 나와?’
파울이 되면서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조익현 포수는 곁눈질로 타자를 살폈다.
역시 이 녀석도 영웅이 되고 싶은 건가, 벤치에서 내린 사인은 도망이지만 비슷한 코스로 스윙을 유도했다.
‘어라?’
2구도 파울이 되자 김해수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이인영이라면 저런 공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역시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승부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깥쪽!! 참아냅니다!! 풀 카운트!!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승부가 나겠죠. 1루가 비어있기 때문에 타이거스는 볼넷을 감수하고 떨어지는 볼을 던질 수도 있거든요. 힘과 힘의 대결이 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마음을 정한 조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 하나로 결정되는 양 팀의 운명, 라이온즈 팬들은 다음 공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따아악~!!
‘뭐라고?!!’
타격이 되는 순간, 조현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대로 떨어트린 공이었는데 이걸 뒷발을 빼면서 걷어 올리다니, 조현우가 좌절에 휩싸인 사이, 배트를 집어던진 이인영은 멀어지는 타구를 감상하며 1루로 향했다.
“자!! 이 타구는!! 우측!!!! 담자~ 앙!!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동점 쓰리 런 홈런!!!! 시즌 41호 홈런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득점권 타율은 평균에 수렴하거든요!!!! 1회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지금은 카메라가 타구를 잠시 놓쳤어요. 변화구를 이렇게 때려버리면 투수 입장에선 정말 … 할 말이 없네요.”
중계석에서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이인영은 1루수 진상우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본인도 느끼는 게 있는지 피해버리는데, 이인영은 그 옆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