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12화 (112/309)

112화. 뛰어봤자 다 내 밥 (8)

[뒤늦은 납량특집 - 그 앞엔 아무도 없었다]

시즌 종료를 앞두고 웹툰 작가는 프로야구 게시판에 만화 한편을 올렸다.

2021시즌 홈런 레이스 우승을 위해 달리는 수많은 선수들, 시간이 지나면서 뒤처지는 자들이 늘어났다.

원래 초반에 앞서나가는 선수는 뒤로 처지는 법, 초반에 뒤에 처졌던 박혁은 페이스를 끌어올리더니 6월 중순부터 1위로 치고나갔다.

“끄아아악~!!”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등 뒤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돌아보고 싶지만 무섭기도 하고 지금은 결승선 통과가 우선 아닌가, 만화 속의 박혁은 질주를 계속했다.

“끄아아악~!!”

“으아아~ 악!!”

계속되는 비명소리, 도대체 내 등 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겁을 먹은 박혁은 숨이 거칠어 질 때까지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가끔 뒤에서 육중한 발자국이 들려왔지만 철저히 무시, 그렇게 한참을 내달려 결승선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보였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올해의 승자는 바로 이 몸, 양팔을 활짝 벌린 박혁은 하늘을 향해 감격의 미소를 지었다.

“으윽~!!”

이어지는 컷은 흑백화면과 말풍선 속의 단말마, 만화는 유유히 결승선을 향해 들어가는 거대한 곰의 뒷모습으로 마무리 됐다.

[그 (맹수) 앞엔 아무도 없었다.]

시즌 내내 홈런 1위에 오르지 못한 이인영의 막판 뒤집기를 이렇게 표현한 것, 만화를 본 팬들은 이런저런 반응을 내놨다.

[곰에게 쫓기는 게 이런 기분 아닐까? 쫓기고 있는데 돌아보기가 … ]

-> 그런데 박혁 진짜 무서웠을 듯, 막판에 이렇게 뒤집힐 줄 예상이나 했을까?

-> 이인영은 진짜 후반기에 강한 것 같다. 작년에도 후반기에만 홈런 27개치지 않았나?

-> 더 무서운 건 작년엔 도쿄 올림픽이 끼어 있었다는 거다. 약 두 달 만에 홈런 27개를 쳤다는 거지, 올해도 후반기에만 17개다. 그리고 아직도 시즌은 20경기도 더 남았어. 도대체 어떻게 체력 유지를 하는 거지?

보통 후반기에는 체력이 떨어지면서 페이스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인영은 오히려 페이스를 끌어 올린다.

도대체 어떻게 체력을 유지하는 걸까. 이쯤 되면 정말 사람인지 의심이 될 정도, 이인영은 팬들의 궁금증에 나도 사람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저도 사람입니다. 후반기에 접어들면 지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후반기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는 건가요?”

“그건 제 독특한 타격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이인영은 약간 낮은 스탠스에서 임팩트 순간에 힘을 극대화 시키는, KBO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메커니즘을 보유하고 있다.

당연히 이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시즌 초반 홈런 레이스에서 치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시즌이 지나면서 몸이 풀리고 타격 폼에 점차 적응해 나가면서 홈런포가 늘어나는 것 뿐, 만약 발동이 시즌 초반에 걸렸다면 올 시즌도 50홈런을 가볍게 넘겼을 거다.

하지만 올해는 9경기 만에 시즌 첫 홈런을 날렸고, 한 번 걸린 시동을 길게 끌고 가질 못했다.

“많은 분들이 제가 2년 연속 40홈런을 넘겼다고 박수를 보내주고 있는데요. 사실 올해는 야구가 제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진한 편이었죠.”

“네?”

리포터는 할 말을 잃었다. 타율 0.367, 홈런 40개, 107타점을 올리고 있는 선수가 지금 부진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건가.

이 정도면 어지간한 선수 커리어 하이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게 부진한 시즌이라니, 하지만 작년 시즌 타율 4할에 55홈런을 달성한 선수라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경기는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앞으로 홈런을 얼마나 더 치려고 이러는 건가.

지난 8경기에서 홈런 6개를 날린 선수, 정말 50개 넘기는 거 아닐까.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정규시즌, 팬들은 이인영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 * *

“녹차 프라푸치노로 주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이곳은 성운 라이온즈의 홈구장, 아침 일찍 출근한 임완수는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해 구장 커피 숍에 들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주위에 아무도 없겠다, 귀엽게 생긴 여자 종업원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몇 시부터 나와서 준비하세요?”

“그건 왜요?”

“그래야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사 먹죠.”

요즘도 이런 고전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나, 종업원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저도 한 잔 사줘요.”

“엇!!”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목소리에 흠칫한 임완수는 어깨를 움츠렸다. 자세히 보니 그 녀석, 무안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야, 왜 기분 나쁘게 뒤에서 나타나?!!”

“그럼 앞에서 나타날까요? 이 형 은근히 겁쟁이야.”

만담이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는 종업원, 이인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선배 옆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한데 뜨거운 거 안 드세요?”

“저는 가슴이 뜨거운 남자라 좀 식혀줘야 돼요. 아이스로 주세요.”

별것도 아닌데 씩 웃는 종업원, 눈치 없는 후배 때문에 작업에 실패한 임완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라커룸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른 선수들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 모였냐?”

“예에~!!”

이성한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과 의논을 거듭했다.

ST 위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2승 1패를 수확한 성운 라이온즈는 조금이지만 포스트 시즌 진출 희망을 밝혔다.

투수진은 어차피 기대할 게 없고, 공격에서 조금 더 힘을 내줘야 하는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성운 라이온즈는 1번부터 3번 타자가 모두 3할을 넘기는 강한 타선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득점이 안 나오는 편, 뭐가 문제일까.

이성한 감독은 연속성을 문제 삼았다.

“현구 너한테 하는 말이다. 잘 새겨들어. 네가 하기에 달렸다.”

“예 … ”

감독의 지적에 홍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현구는 올 시즌 타율 0.310, 홈런 17개, 68타점,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문제는 상황에 따라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 특히 리드오프 임완수가 출루했을 때 타율이 0.272로 떨어진다.

나쁜 편은 아니지만 평균 타율에 비해 조금 아쉬운 편, 홍현구가 선두타자 출루 기회를 살렸다면 후속타자 이인영은 좀 더 좋은 기회에서 타격을 했을 거다.

최근 KBO도 강한 2번 타자를 중시하는 흐름,

선두타자가 출루 했을 때 내 성적이 저렇게 떨어졌었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에 홍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쳐야 되나? 아니면 신중하게?’

문제는 감독의 지적 때문에 머릿속이 뒤섞였다는 것, 홍현구는 안타를 쳐서 출루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공격적인 성향을 역이용해 볼을 던지는 배터리도 많은데, 너무 신중히 볼을 고르다보면 내 색깔을 잃어버리고 부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부담 없이 칠 수 있는 1번에 서고, 출루율이 높은 임완수가 2번을 치는 게 낫지 않을까.

이성한 감독은 그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일찍 팀 미팅을 연 것, 선수들과 의견을 나눠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책임감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그건 또 뭔 소리냐?”

“주자가 쌓일수록 뒤에서 치는 사람이 부담스럽잖아요. 홍현구 선배가 주자가 있는 상황에 약하다면 1번에 배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이때 이인영이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 자식 논리대로라면 1번으로 나가는 내가 책임감이 제일 없다는 거 아닌가. 홍현구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저 그냥 2번 칠래요.”

“진심이냐?”

“네, 저 자식이 너무 건방져서 안 되겠어요.”

결국 성운 라이온즈는 오늘도 임완수 - 홍현구 - 이인영으로 이어지는 상위 타선을 유지했다.

포스트 시즌 진출 희망이 걸린 중요한 경기, 선수들은 진지한 얼굴로 수비 훈련에 나섰다.

‘뭐? 책임감 순으로 타순을 짜자고?’

홍현구는 틈틈이 이인영 쪽에 눈길을 줬다.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일 수도 있는데 괜히 기분 나쁜 발언, 상대 팀에 도발을 하는 건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팀 동료들까지 건드리는 건가.

하지만 내가 2번에서 찬스를 살리지 못한 건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분하면 결과로 보여주면 그만,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유지했다.

1회 초, 한진 타이거스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성운 라이온즈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자, 임완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시즌 타율은 0.309, 홈런 3개, 33타점, 타율은 리그 7위, 출루율은 공동 1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볼넷을 많이 골라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공격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죠. 초구를 조심해야 됩니다.”

[따악~!!]

“말씀 드리는 사이 초구 타격!! 유격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임완수 선수의 안타!!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여기서 부터가 문제네요. 홍현구 선수가 올 시즌 주자 1루에서 타율이 그리 높지 않거든요. 이인영 선수로 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홍현구의 공격성을 알고 있는 배터리는 초구부터 바깥쪽 떨어지는 유인구를 던졌다.

1루 주자 임완수는 출루율이 높지만 도루 능력은 떨어지는 편, 당연히 투수 입장에선 별 부담 없이 변화구를 던질 수 있다.

발 보다는 방망이로 득점을 만들어 내야 하는 라이온즈, 홍현구는 바깥쪽으로 들어온 빠른 볼을 가볍게 밀어 쳤다.

따악~!!

“됐어!! 됐어!!”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일찍 스타트를 끊은 임완수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진출했다.

‘그래, 네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자.’

드디어 이인영의 타석, 홍현구는 건방진 후배에게 눈빛 레이저를 날렸다.

3번으로 나서는 몸이니 그만큼 책임감이 대단하겠지? 여기서 못 치면 구박을 해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초구,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최근 이인영 선수가 타격감이 아주 좋거든요. 투수 입장에선 함부로 들어가긴 어려울 겁니다.”

이인영은 다음 공도 신중하게 골라냈다.

최근 타격감이 좋으니 한 번 나가볼만 한데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녀석, 하긴 저 자리가 한순간의 판단에 운명이 갈리는 위치 아닌가.

저돌성과 신중함을 동시에 갖춘 녀석, 홍현구는 어느새 승부에 빠져들었다.

[따악~!!]

“좌측!!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은 마음먹고 휘둘렀는데 선수들이 움찔움찔 하네요. 공격하는 쪽이나 막는 쪽이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인 교환이 길어지자 투수는 발을 풀며 타자의 흐름을 끊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다시 투구에 집중하는 타자, 다음 투구는 너무 옆으로 빠지면서 포수 몸을 맞고 튀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생각보다 멀리 튀지 않은 타구, 여차하면 홈으로 뛰려 했던 3루 주자 임완수는 이인영의 저지를 받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나이는 어려도 선수단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녀석,

평소 선배들을 가지고 노는 건방진 놈이지만 실전에서만큼은 진지한 녀석이다. 팀의 주축 선수로서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면 절로 마음이 경건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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