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뛰어봤자 다 내 밥 (6)
‘오늘도 이러네.’
어느새 9월을 앞둔 시즌, 이인영은 더그아웃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경기를 관망했다.
좀처럼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순위경쟁, 오늘도 8회까지 6대 5로 아슬아슬하게 앞서 나가고 있다.
문제는 역시 투수진,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차라리 내가 던지는 게 낫겠다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다.
‘하아 ~ 누굴 올리나.’
성운 라이온즈의 이성한 감독은 투수 교체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명단에 선수는 있는데 올릴 투수가 없다니, 이때 성큼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꼈다.
“저 고등학교 때 에이스였어요.”
아무리 투수가 없다고 해도 중심타자를 마운드에 올리나, 이성한 감독은 무시했지만 이인영은 그 옆에서 자기소개를 계속 했다.
“저라면 일단 빠른 볼을 바깥쪽으로 던져 초구를 잡을 거예요. 그리고 몸 쪽으로 붙여 파울이 나오면 바깥쪽으로 변화구를 떨어뜨려서 삼진을 잡을 거예요.”
“야, 넌 아까부터 왜 거기서 구시렁거리고 있냐?”
“아니, 저 고등학교 때 에이스였다고요. 감독님이 모르신 것 같아서 알려드린 거예요.”
“저기 … 한 번 올려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감독과 선수의 기싸움, 이때 투수코치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녀석이 마운드에 오르는 게 뭘 의미하는지 투수들이 모르지 않겠지, 못 던지는 건 자기들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여기서 충격 요법을 주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중심타자를 빼고 중간계투로 넣는 건 누가 봐도 손해 보는 짓, 이성한 감독이 고민하는 사이, 볼넷이 나오면서 1사 주자 1 - 2루가 됐다.
더는 고민할 수 없는 상황, 눈을 깜빡깜빡 거리는 흑곰과 마지막 협상에 나섰다.
“너 몸 안 풀어도 투구 할 수 있냐?”
“그럼요. 그리고 볼 배합은 제가 알아서 할 게요.”
“ … 좋아, 한 번 해 봐.”
그렇게 이인영은 마운드에 올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 관중석이 들썩거렸지만 이인영은 태연한 얼굴로 연습투구에 나섰다.
“스트라이크!!”
예고대로 초구는 빠른 볼, 전광판에 찍힌 구속에 중계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 ~ 지금 144km가 나왔습니다.”
“상당히 묵직한데요. 지상규 선수도 약간 놀란 것 같습니다.”
이인영은 예고대로 빠른 볼을 몸 쪽에 붙여 파울을 유도해 냈다. 볼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정말 바깥쪽 유인구로 삼진을 잡아낼까. 이성한 감독도 설마 하는 눈으로 투구를 지켜봤다.
‘맙소사’
제대로 떨어트린 커브, 따라 나오는 방망이, 투구도 훌륭했지만 본인이 한 말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는 게 무엇보다 놀라웠다.
예전부터 저 자식은 천재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제는 무서울 정도, 이인영은 다음 타자 이정홍도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이닝을 마무리 했다.
‘아 ~ 이건 아닌데’
하지만 월드스타는 못마땅한 얼굴로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지상규는 의도한 투구대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는 내가 잘 던져서 잡아낸 게 아니다. 그냥 타자가 못 쳤을 뿐, 뭐든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뭐가 문제인지 고민을 거듭했다.
“야, 나랑 얘기 좀 하자.”
이때, 포수 이상민이 대화를 요구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마운드에 올라온 이인영, 거기다 벤치에서 이렇다 할 지시도 없이 투구가 이뤄졌다. 보아하니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갈 녀석, 대화를 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다.
“너 아까보다 더 빠르게 던질 수 있냐?”
“그런데요?”
“그럼 그렇게 던져. 내가 다 받아줄게”
“싫어요.”
이상민은 강속구를 앞세우자고 했지만 이인영은 퇴짜를 놨다.
고등학교 시절 때도 150km 이상을 던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투구에서 정말 중요한 건 제구, 메이저리그 통계를 봐도 가운데로 던진 공은 피안타율이 0.330이 넘지만 구석으로 던졌을 땐 0.231로 급격히 떨어진다.
150km를 한 가운데로 밀어 넣을 바엔 130km 똥 볼을 구석에 찔러 넣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선수, 그게 바로 이인영의 철학이었다.
딱 ~ !!
이어지는 9회 말, 월드스타는 투구를 계속했다.
초구는 142km 빠른 볼,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다음 투구에 집중했다.
구속은 매력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투수들에 비해 뒤지는 편도 아니다. 뭣보다 구석을 찌르는 제구가 매력적, 볼이 나와도 계속 구석을 찔러댔다.
딱 ~ !
“2루수가 잡아서 2루에서 송구!! 다시 1루로 ~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이인영 선수가 병살타로 위기를 넘어갑니다!!!!”
“아주 큰 뱀이 마운드에 똬리를 틀고 있네요. 고등학교 때 상당히 빠른 볼을 던졌던 선수로 알고 있는데, 지금 투구는 프로 10년 차에 접어든 노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벼랑 끝에 몰린 상대팀, 이인영은 느린 커브로 타자의 스윙을 이끌어 냈다.
빠른 볼 제구가 된다는 걸 보여줬기에 가능한 투구, 다음 공은 몸 쪽으로 바짝 붙여서 타자의 시선을 교란시켰다.
이제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다음은 어떤 투구를 보여줄 것인가. 팬들의 관심은 다음 공에 집중됐다.
‘바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
3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 방송을 아는 투구에 중계석은 잠시 한 숨을 돌렸다.
“한 번 쉬어가는 군요.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글쎄요. 바깥쪽을 던졌다는 건 몸 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인가요?”
“그런데 제가 아는 이인영 선수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바깥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요.”
이인호는 아들의 고교시절 경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챙겨봤다.
구위가 좋다고 삼진이 따라오는 건 아니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땅볼 유도에 집중, 지금 투구 스타일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다음공도 바깥쪽으로 던지겠지, 아버지의 예상은 얼추 맞아들었다.
‘엇?!!’
그런데 바깥쪽 높게 들어간 건 예상 밖, 140km 초반에 타이밍을 맞춰두고 있던 타자는 148km 빠른 볼에 헛스윙을 돌렸다.
1과 2/3이닝 동안 삼진 2개를 곁들인 완벽한 투구,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인영은 이상민 포수와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하나 둘 마운드로 모이기 시작한 야수들, 이성한 감독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너 야구 잘한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어린 선수는 저 자리에 오르면 벌벌 떠느라 머리를 굴릴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코치진이 볼 배합을 짜주면 거기에 맞춰 던지는 것, 그런데 이인영은 그게 아니다.
스스로 볼 배합을 짜고 거기에 포수가 맞추도록 한 녀석, 이게 천재가 아니면 뭔가.
마운드에서도 빛난 천재성, 수훈선수 인터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인영 선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등판이었는데요. 혹시 본인이 자원하신 건가요?”
“어 … 아니요. 감독님에게 제가 고등학교 시절 에이스였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리포터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자원이지 뭔가, 이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시청자 댓글을 확인한 PD가 리포터에게 사인을 줬다.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오늘 투구에서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일단 좋았던 점은 투구가 대부분 제 뜻대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아쉬웠던 점은 실투가 하나 나왔다는 것 정도일까요?”
“실투요?”
“네, 이정홍 선수에게 던졌던 공이 가운데로 몰렸는데요. 그 점은 조금 아쉽게 생각합니다.”
댓글창은 폭발했다.
그게 실투였다면 좌익수 플라이를 친 이정홍의 입장은 뭐가 되나, 하지만 이인영은 실투는 실투였다고 인정했다.
“저는 실투를 던진 거고 타자가 못 친 것뿐입니다. 이건 서로 반성해야 할 일이지,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를 인정해야 발전하는 법이죠. 이정홍 선수도 제가 이런 말 한다고 딱히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더 웃긴 일은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 벌어졌다.
[실투였는데 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더 발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네, 그건 선배님의 실수였습니다. 우리 다음에는 실수 하지 말자고요. - 이인영 올림
경기가 끝난 후, 이정홍은 SNS에 실투를 못 친 거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여기에 댓글을 단 월드스타, 우리는 그냥 웃으면 되는 건가. 이런 게 바로 프로의 자세겠지.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이인영과 이정홍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타석에서도 실수하면 안 되지.’
다음 날, 이인영은 평소처럼 타석에서 집중력을 유지했다.
현재 성적은 타율 0.356, 홈런 31개, 92타점,
8월 들어 타율 0.333, 홈런 5개를 기록하고 있는데, 작년 8월에 타율 0.414, 9홈런을 퍼부은 것과 비교하면 페이스가 조금 떨어져 있다.
후반기에 강해야 진짜 슈퍼스타, 오늘은 최소 3안타는 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타자 주자는 1루에 멈춰섭니다!! 이인영 선수의 안타!! 성운 라이온즈가 1회부터 득점권 기회를 잡습니다!!”
“초구부터 방망이가 나왔거든요. 이인영 선수가 컨디션이 좋을 때 초구 타격 비율이 높아지는데, 오늘은 기대를 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한우 위원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저 선수의 양아버지라고 커밍아웃 해버렸으니 좋을 때와 나쁠 때의 특성은 훤히 꿰뚫고 있다.
이인영은 두 번 째 타석에서도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로 기대에 보답, 타선의 활약에 힘입은 성운 라이온즈는 5회까지 5대 2로 앞서나갔다.
‘오늘 3안타 친다. 아무도 나 못 말려’
5회 초, 2사 주자 만루에서 이인영은 세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여기서 하나치면 나도 좋고 팀 승리도 확정, 힘껏 스윙을 돌렸고 높게 뜬 타구는 외야로 뻗어나갔다.
“짜증나아 ~ !!!!”
타구를 0.5초 정도 지켜본 이인영은 배트를 거칠게 내던졌다.
수 백, 수 천 번도 더 쳐 본 공, 배트에 맞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대략 느낌이 온다.
얼핏 보면 잘 맞은 것 같지만 너무 떠버린 타구,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2사 만루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다.
“야, 괜찮아.”
“그 정도면 잘 친 거야.”
동료들의 위로가 날아들었지만 월드스타는 못 들은 척 하고 벤치 구석에 처 박혔다.
그날 멀티 히트 쳤으면 내 역할은 다 한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2안타를 쳤으면 3안타를 노리고, 3안타를 쳤으면 4안타를 노리는 게 프로, 앞 타석에서 친 안타보다 이번 아웃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나 이대로는 집에 못 가. 아니, 안가’
당장이라도 공을 씹어 먹을 눈빛, 그 성질머리를 알고 있는 동료들은 말 없이 먼 곳을 응시했다.
“자, 이제 경기는 7회 초로 접어드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4번 째 타석을 맞이합니다.”
“앞선 타석에서 굉장히 흥분한 모습을 보였거든요. 그래도 타석에 들어서면 냉정해지는 성격입니다.”
GM 가디언즈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8대 2로 뒤지고 있는 경기, 뒤집기 어려운 게임이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따아악 ~ !!
“오오 ~ !!”
“간다!!!!”
호쾌한 스윙, 그리고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시즌 32호 홈런, 성운 라이온즈 선수들은 보호 펜스 밖에 일렬로 늘어섰다.
슈퍼스타라고 해도 아직은 어린애, 감정 컨트롤이 조금 부족하다.
우리가 위로를 해줘야 기분이 풀리겠지, 하지만 앞선 타석의 실수가 가슴에 남아 있는 후배는 심드렁한 얼굴로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야, 좀 웃어라.”
“후배 기분에 맞춰주는 우리 입장도 생각하라고”
그제야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승부욕이 너무 강한 건가.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지고는 못 사는 이 더러운 성깔 덕분, 유니폼을 벗는 그날까지 고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