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뛰어봤자 다 내 밥 (5)
[이인영, 외톨이가 되선 안 된다]
올스타전이 끝나고 야구 전문가들은 각 팀의 후반기 전망을 예상했다.
성운 라이온즈는 4위 한진 타이거스에 2경기 뒤진 리그 5위를 기록 중, NA 자이언츠가 1경기 뒤진 6위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투수진은 원래 그랬고 기대를 걸어야 하는 쪽은 타선, 이인영은 공격 지표만 놓고 보면 팀 그 자체라고 봐도 좋다.
최근 2년 동안 치른 200경기를 기준으로 라이온즈는 187홈런을 쳤는데, 그 중 78개가 이인영이 때린 홈런이다.
무려 41.7%의 비율, 타점도 30.2%를 차지한다.
누가 봐도 한 선수에게 너무 많은 공격지표가 쏠려 있는데, 왜 성운은 이런 선수를 받쳐줄 용병 타자를 영입하지 못하는 건가.
일부 팬들은 성운 라이온즈 구단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이 정도로 못 뽑으면 스카우터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물갈이 한 번 해야 할 듯]
성운 라이온즈는 수준급 용병 타자와는 이상할 정도로 인연이 없다.
가장 성공적인 선수라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활약한 패트릭 그로스, 그로스는 당시 메이저리그 통산 1012안타 157홈런을 기록한 선수로 그가 한국에서 뛸 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소속팀과 재계약에 실패하자 앨런 그로스는 재도약을 위해 성운 라이온즈와 계약, 모든 야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2000년 성적은 타율 0.333, 홈런 29개, 94타점,
2001년 성적은 타율 0.327, 홈런 34개, 102타점,
이런 훌륭한 선수를 어디에서 데려오겠나. 모든 팬들은 그로스가 당연히 재계약을 할 거라고 믿었지만, 구단은 그로스를 포기했다.
“그로스는 수비가 좋지 않다. 다른 선수를 물색해 보겠다.”
라이온즈 구단은 당시 이런 변명을 늘어놨다.
평생을 유격수와 3루로 뛴 선수가 돌연 외야수로 갔으니 적응을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거기다 당시 성운 라이온즈 코치진은 그로스가 수비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노골적으로 면박을 줬다.
‘건방지게 우리를 무시해?’
당시 코치들은 고참 선수가 코치를 거치지 않고 어린 선수에게 조언을 해주는 걸 굉장히 안 좋게 봤다.
코치인 자신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000안타를 때린 선수가 조언을 해주는 게 그렇게 나쁜 건가.
지금 기준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코치진은 그로스를 이상한 선수 취급했다.
“도저히 여기서는 야구 못하겠다.”
심판의 도 넘은 편파판정과 코치진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질려버린 그로스는 자진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는 구단이 재계약을 포기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던 것, 2년 동안 한국에서 쌓인 게 많았는지 그로스는 훗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불만을 쏟아냈다.
“그들은 이상했다. 평생 내야수로 뛰었던 날 좌익수로 뛰게 했고 심지어 내게 한국 야구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손님이 음식이 맛이 없다고 하면 그냥 맛이 없는 거다.
그걸 두고 ‘손님은 뭘 모르시네요. 그건 원래 그런 겁니다.’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는 것, 그런데 당시 성운 라이온즈 코치진은 그로스에게 한국 야구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주자가 나가면 번트를 대고, 비상식적으로 밀어치기를 강조하는 코치진, 하지만 선진야구를 접한 그로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적을 냈다.
그런데 그게 코치들 눈에는 보기 싫었던 것, 이런 사람들 밑에서 어떻게 선수들이 성장하고 외국인 선수가 팀에 녹아들 수 있을까.
그로스는 이런 식이라면 성운 라이온즈에서 수준급 타자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는데, 이게 기자들의 입을 거치면서 내용이 약간 와전 됐다.
[성운은 앞으로 좋은 용병 타자를 영입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로스 이후, 성운 라이온즈는 제대로 된 용병 타자를 영입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영입은 했는데 성적이 안 나와서 방출, 부상으로 방출, 그 외 갖가지 이유로 방출 된 것 뿐, 타자 용병을 안 뽑은 아니다.
언제야 그로스의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
팬들의 원성에 떠밀린 차명석 단장은 시즌 내내 제 역할을 못하는 용병들을 정리하고 대체자원을 물색했다.
‘나는 지금도 불만 없는데’
하지만 이인영은 팬들의 원성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한 게 수준급 타자인가. 리드오프가 원활히 돌아간다면 대포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대포에 집착하는 팬들, 이건 성운 라이온즈의 역사를 들춰봐야 이해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성운 라이온즈는 3번 박승우, 4번 패트릭 그로스, 5번 강서균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심 타선을 확보했다.
세 선수가 때려낸 홈런은 무려 90개, 살인 타선은 패트릭 그로스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2년 만에 해체됐지만 당시 세 선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화끈한 공격력은 팬들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추억에 붙잡혀 있는 팬들, 차명석 단장이 타자 친화적 구장을 중심으로 거포 육성이 집중한 게 우연일까.
그 정책을 4년 동안 거부하던 박한우 전 감독이 물러난 것도 성운 라이온즈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거함거포주의에 사로잡힌 팬들,
이인영이라는 초특급 거함이 등장하면서 팬들은 그 위에 장착할 더욱 강한 대포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거함거포는 나 하나면 충분, 이인영은 인터뷰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앞세웠다.
“사람들은 크고 웅장한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거 같아요.”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작년에 팀에서 20홈런을 넘긴 선수는 저와 김상규 선배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55홈런을 치긴 했지만 팀 전체 홈런은 적은 편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저희 팀이 홈런이 적다고 한 팬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올 시즌도 공격력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 진짜 문제는 투수진이다.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큰 거에 집착하는 건지, 이인영은 무조건 크다고 좋은 건 아니라며 팬들의 불만을 꼬집었다.
“팀 공격이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홈런을 치면 당장 결과가 나오니까 많은 분들이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같은데요, 하나하나 베이스를 밟아 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남녀관계도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거잖아요.”
리포터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남자가 데이트에서 여자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뭘까,
드라마를 봐도 반드시 신체접촉으로 끝나는 남녀 관계, 하지만 여자가 원하는 교류는 그게 아니다.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거든?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건 걔가 너무하네.”
남자들은 여자가 말이 많다고 하는데 그건 여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만나서 즐기고 놀다가 헤어지면 끝?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나누고 가슴 아픈 일이 있으면 위로도 해주는 게 친구이자 연인이다. 야구도 마찬가지, 득점을 가장 올리기 쉬운 방법은 홈런이지만 그런 극적인 연출은 매번 반복될 수 없다.
주자가 득점권에 나갔다가 후속 타자가 범타로 물러날 수도 있고, 때로는 목표를 눈앞에 뒀다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일도 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고 야구의 일부분, 그런데 팬들은 그걸 발암이라고 욕하며 당장의 결과만을 요구한다.
홈런만 뻥뻥 나오면 그게 야구이고 우리의 인생인가?
득점이 나오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인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팬들, 리포터는 그게 안타깝다는 소감을 밝혔다.
“야구 볼 줄 아시네요?”
“그건 이인영 선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리포터의 반응에 이인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커트해 냈다.
“아예 데이트 신청을 하지 그러냐?”
인터뷰를 살피던 동료들은 돌아온 흑 곰을 툭툭 건드렸다.
잘 좀 해보라며 몰아세우는데, 이인영은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자, 성운 라이온즈의 1회 초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올 시즌 타율 0.311, 홈런 2개, 21타점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반기 막판에 약간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거든요. 올스타전 휴식이 반전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따악~!!]
“잘 맞은 타구가!! 아~ 유격수 글러브에 걸리는군요!! 임완수 선수는 첫 타석에서 직선타로 물러납니다.”
“안 풀리네요. 잘 맞은 타구가 이렇게 아웃이 되면 선수는 참 허탈하죠.”
임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야구가 잘 될 때는 빗맞은 타구도 안타가 됐는데 요즘은 정 반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내 맘대로 안 되는 야구 때문에 속이 상했다.
‘나는 요즘 운이 따라주는 것 같아.’
반면, 후속타자 홍현구는 좌익수와 유격수 사이에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를 날렸다.
작년 시즌, 준 플레이오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홍현구는 병원에서 팀의 한국 시리즈 진출과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그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놈 같았는데, 올해는 타율 0.307, 홈런 13개, 43타점으로 순항하고 있다.
인생이란 원래 롤러코스터 같은 것, 마음을 비우면서 인생도 야구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으음 ··· 그래도 ··· 결과는 중요하겠지?’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자기도 모르게 1루에 있는 주자에 눈길이 갔다.
방금 전 인터뷰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떠벌렸는데, 이제 와서 이런 번뇌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뭔가.
난 너무 가식적인 인터뷰를 한 건가.
역시 인생은 결과, 언행 불일치는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젠장, 역시 인생은 결과야. 연애? 어차피 여자 손 한 번 잡아보려고 하는 거 아냐?’
찬스에서 범타로 물러났으니 속은 부글부글, 역시 나는 속세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인가.
과정을 논하기엔 욕망이 너무 앞서는 성격, 다음 타석은 반드시 결과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기회를 살리지 못한 성운 라이온즈는 GM 가디언즈에게 2회까지 2대 0으로 끌려가는 경기를 했고, 경기는 이제 3회 초로 접어들었다.
“자, 타석에는 이인영 선수가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타구가 너무 떴죠. 이인영 선수는 타구 속도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라 타구를 띄워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인영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오늘 따라 약간 씩 빗나가는 타격, 2구도 때렸지만 파울이 되면서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다.
딱~!
딱~!
딱~!
이후 파울 3개를 더 때려내면서 승부는 6구로 넘어갔다.
남들이 보면 끈질긴 승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 타이밍이 안 맞은 것뿐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 그딴 게 무슨 소용인가. 구단은 파울에 돈을 주지 않는 법, 철저하게 결과만 바라봤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오늘 적극적으로 달려드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평소 이런 공은 골라내는 편인데, 카운트가 몰려 있다고 해도 상당히 공격적이네요.”
길어지는 승부에 배터리의 얼굴은 굳어졌다.
이인영은 자기만의 스윙 존을 정하고 그 밖의 공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유형, 그런데 이런 공까지 다 쳐낸다면 심리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악~!!
“됐어!! 아자앗~!!”
타구를 확인한 이인영은 1루에 자리를 잡았다.
우중간 사이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 다음 타석도 결과만 바라보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