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06화 (106/309)

106화. 뛰어봤자 다 내 밥 (2)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냐.”

시즌은 어느덧 5월 말에 접어들었다.

더위로 악명이 높은 대구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럭저럭 살만한 환경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날 기온은 무려 33도, 기록적인 폭염에 선수들은 지친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었다.

위이잉 ~

“하아 ~ 살 것 같다.”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더그아웃에서 소소한 평화를 누렸다.

구단 규정 상, 7월부터 가동하기로 돼 있는 더그아웃 미스트, 냉각된 물방울 입자가 연기처럼 피어나오는데, 이인영은 수증기에 휩싸인 동료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흘렸다.

“쌈밥 집 냉장고인가.”

쌈밥 집에 가보면 아주머니들이 냉장고 채소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분무기로 가끔 물을 뿌려준다. 지금 우리도 물을 맞고 살아나는 중, 살 것 같다는 동료들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야,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뭐가요?”

“척 보면 알아 인마. 무슨 생각했어?”

임완수의 참견, 이인영은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우리가 쌈밥 집의 채소 같다니, 연기 속에서 낄낄거리던 선수들은 조금 무안했는지 조신하게 자리를 잡았다.

“야, 넌 쓸데없는 생각을 잘도 한다?”

“쓸데없는 게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거예요, 선배는 뭘 모르시네.”

사물이나 사람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거 아닐까. 그림에 약간 소질이 있는 이인영은 방금 전 떠오른 이미지를 종이 위에 그려냈다.

물을 맞고 살아나는 쌈 채소들, 작품을 감상한 이성한 감독은 잘 그렸다며 칭찬까지 해줬다.

역시 정신세계가 특이한 녀석, 혹시 경기 중에도 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조금은 궁금했다.

“자, 2021 KBO, 이곳은 성운 라이온즈와 선화 이글스의 경기가 열리는 대구 라이온즈 파크입니다. 오늘 시구는 배우 김경희 씨가 수고를 해주시겠습니다.”

“어이쿠 ~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시구자의 복장을 본 박한위 위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요즘 여성 시구자가 노출을 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좀 심한 편, 타석에 선 전인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창 신체 건강한 22살 청년, 공을 보긴 해야 되는데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자꾸 그것만 떠오르네.’

시구가 끝나고 시작된 경기, 전인규는 좀처럼 공에 집중하지 못했다.

왜 저런 복장을 하고 올라와서 남자 가슴을 뛰게 하는 건지, 평소와 다른 친구의 타격에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KBO리그 최다안타 2위를 달리는 녀석의 타격인가.

결국 이날 전인규는 4타수 무안타로 침묵, 그날 밤 이인영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는 문자를 보냈다.

[자꾸 그게 생각이 나서]

“뭐가?”

[너도 남자면 알 거 아냐]

그제야 이인영은 친구의 부진 원인을 알아냈다.

야구 선수라는 놈이 눈앞에 있는 볼보다 그게 크게 보였다니, 너는 야구 선수 실격이라며 불을 뿜었다.

[야,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반응이야.]

“야구선수라면 볼이 더 크게 보여야지, 너 일반인이냐?”

계속되는 친구의 잘난 척에 전인규는 발끈했다.

아니, 야구 선수도 선수이기 전에 남자인데 볼보다 가슴이 더 신경 쓰였다고 이런 욕을 들어야 하나, 너는 얼마나 잘 났냐고 하고 싶었지만 진짜 잘 하는 놈이라 할 말은 없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시험을 해 보자.’

다음 날 아침, 이인영은 밤사이 그린 그림을 들고 출근했다.

잘 빠진 여자의 몸과 야구공을 나란히 그린 그림, 동료들에게 어느 쪽이 더 눈에 들어 오냐는 질문을 던졌다.

“야,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 어디서 배웠냐?”

“그것보다 어느 쪽이 더 눈에 들어 오냐고요?”

“어 … 난 이 쪽”

“이제 보니 일반인이셨네요.”

뜬금없는 극딜에 당황한 홍현구, 이인영은 다른 선수들도 테스트를 했다.

일반인이 훨씬 많은 라커룸, 이인영은 왜 우리 팀이 올 시즌 중위권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겠다며 한숨을 내쉬웠다.

‘우리 팀이지만 진짜 이상한 자식이야.’

어이가 없다는 선수들의 얼굴, 저 자식은 정말 야구밖엔 눈에 안 보이는 건가? 임완수는 이 사연을 리포터 앞에 털어놨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조만간 치료를 받아봐야 될 것 같아요. 저 자식은 지금 야구에 단단히 미쳤어요.”

이 정도면 정말 걱정이 될 정도, 하지만 팬들은 그런 사연도 흥미 있게 받아들였다.

팬들 입장에선 선수가 야구에 미쳐주는 게 좋은 법, 슈퍼스타는 여느 때처럼 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에 나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57, 홈런 13개, 4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비하면 조금 심심해 보이는 기록이죠.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입니다.”

올 시즌 출루율은 0.463, 장타율 0.704, 이 정도 성적을 두고 누가 부진하다는 말을 하겠나.

다만 4할에 50홈런을 넘긴 작년 시즌 임팩트가 너무 강렬할 뿐, 위험한 맹수라는 건 여전했다.

‘오늘은 공이 유독 크게 보이는데’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선수로서 오늘은 가장 기쁜 날, 2구를 힘껏 걷어 올렸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오른쪽 멀리!!! 담장 위로 ~ ~ 오!! 넘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14호 홈런!! 첫 타석부터 불을 뿜고 있습니다!!”

“역시 야구선수라면 볼에 집중을 해야죠.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스럽습니다.”

이 와중에도 깨알 같은 칭찬을 하는 박한우 위원, 하지만 이인호 위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친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이 이성에 조금 관심을 보여도 나쁠 게 없다.

그런데 요즘 들려오는 소문은 아들이 야구에 미쳤다는 험담 아닌 험담 뿐,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

그 사이, 더그아웃에 입성한 이인영은 배팅 글러브를 관중석에 투척했다. 요즘 밀고 있는 새로운 세리머니, 후원을 받고 있는 스포츠 용품 회사도 있겠다 아낌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 * *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한편, 문제의 시구를 한 탤런트 김경희 씨는 이인영의 사연에 얼굴을 구겼다.

몸 팔아서 돈 번다는 악플러들이 있는데, 그렇게 욕하면서 관심을 주는 이유가 뭔가. 내가 돈 버는 게 질투 나서 주절거리는 벌레들, 그런 존재감 없는 것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인기 스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남에게 인정을 받아야 기분이 풀리는 성격, 김경희 씨는 SNS를 통해 슬쩍 관심을 보였다.

[이인영 선수, 다음에 만나면 사인 받고 싶어요. 올 시즌도 파이팅♡]

이 짧은 문장에 대구 팬들은 발끈했다.

김경희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유명 탤런트지만 뒷소문이 조금 안 좋은 편, 아직 무명이던 시절 스폰서를 통해 돈을 후원 받았다는 소문도 있고 뭣보다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선호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데 이젠 스포츠 계까지 마의 손을 뻗치는 건가. 절대 두 사람을 접촉시켜선 안 된다는 청원이 구단 게시판에 올라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요구사항을 접수한 차명석 단장은 곤란한 반응을 보였다.

프로야구 선수가 유명인과 스캔들이 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경희 씨는 나중에 사인을 받고 싶다는 말을 했을 뿐, 딱히 막을 이유는 없다. 뭣보다 이인영이 야구에 미쳐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괜한 걱정은 접어뒀다.

‘뭐래?’

슈퍼스타는 단장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사인을 받고 싶으면 직접 와서 받아 가면 그만,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그냥 무시했고 경기장과 집을 오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이인영 시즌 22호 홈런 작렬]

[통산 100호 홈런까지 앞으로 9개]

그렇게 묵묵히 전진하는 시즌, 여론은 통산 100호 홈런 달성에 주목했다.

KBO 역대 최연소 100호 홈런 기록은 ST 위너스의 박혁이 가지고 있다.

만 23세 8개월 만에 달성한 대기록, 그런데 이인영은 올해 만 21살에 불과하다. 최근 페이스만 따져보면 8월 안에 달성할 수 있는 기록, 성운 라이온즈 구단도 각종 이벤트를 준비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얘들아, 옆에 친구 있는지 확인해”

“네에 ~ 선생님 ~ ”

이인영과 연을 맺은 보육원의 아이들도 특별손님 자격으로 초대, 100홈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홈런을 연호했다.

‘저건 좀 신경 쓰이네.’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응원을 온 건 오늘이 처음,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지, 나는 일반인이 아니라 프로라고’

초구가 파울이 되자 집중력은 끌어 올리고 귀는 닫아뒀다.

오늘 상대할 투수는 NA 자이언츠의 용병 제임스 안토인, 195cm나 되는 큰 키에 KBO에 흔치 않은 좌완 선발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좋은 활약을 하고 있다.

하지만 평균 구속은 134 ~ 141km 수준, 기교파 투수 치고 볼넷 비율이 높아 이닝 당 출루율도 높은 편이다.

좌타를 상대할 땐 슬라이더를 자주 이용하는 편, 초구가 파울이 되자 슬라이더를 던지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줬다.

“음 … 다시 바깥쪽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는 밀어 쳐도 넘길 수 있는 파워가 있거든요. 어설픈 변화구는 위험합니다.”

다음 공도 볼이 되자 제임스 안토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도 볼넷이 조금 많다는 걸 의식하는 편, 그렇다고 정면승부를 들어가기엔 구위가 좋지 않다.

이런 속마음을 알고 있는지 어깨를 풀며 여유를 부리는 타자, 바로 승부를 들어갔다.

따악 ~ !!

“당긴 타구!! 1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장타 코스!!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파고듭니다!!!! 선취득점!! 그 사이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 2루타!! 라이온즈가 오늘도 앞서나갑니다!!”

“라이온즈가 최근 4연승을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리그 5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조금 더 힘을 내주면 3위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홈런은 아니지만 열렬한 환호로 반겨주는 팬들, 이인영은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를 부렸다.

역시 나는 이곳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 존재, 조금 더 잘해야겠다는 의욕을 끌어올렸다.

“야, 연락 온 거 없냐?”

“뭐가요?”

“너 얼마 전에 대시 받았잖아.”

홈을 밟고 돌아온 더그아웃, 홍현구는 후배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스타가 사인 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던졌는데 정말 거기서 끝났을까. 이인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며 돌아섰다.

“야, 그럼 네가 메시지를 줘 봐. 그럼 반응이 오겠지.”

“제가 왜요? 관심이 있으면 그 쪽에서 알아서 하겠죠.”

내가 먼저 추파를 보낸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나.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다가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 그리고 사인 받고 싶다는 게 무슨 대시인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착각을 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겠지.

뭣보다 지금은 야구 외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