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뛰어봤자 다 내 밥 (1)
[홈런 레이스 점입가경]
[상위 6명, 외국인 3명, 내국인 3명]
어느덧 4월 말에 접어든 시즌, 여론은 개인순위를 두고 이런저런 전망을 내놨다.
일단 현재 홈런 1위는 AU 베어스의 호세 페르난데스, 24경기에서 9개를 때려냈다.
그 뒤를 잇는 선수가 ST 위너스의 리차드 브라운, 역시 ST 위너스의 중심타자 박혁이 각각 7개로 뒤를 이었다.
작년 시즌 홈런 킹이었던 이인영은 개막 9경기 만에 3연타석 홈런을 때려냈지만 이후 15경기에서 홈런 2개에 그치면서 공동 6위, 그래도 타율 0.349, 홈런 5개, 15타점이라는 균형 잡힌 성적으로 가시권을 유지했다.
“이인영 선수, 초반 페이스가 살짝 저조하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토끼라 금방 따라 잡아요.”
인터뷰에서 이인영은 건방짐과 자신감 사이를 오고갔다.
지금 앞서 가고 있는 선수들은 거북이처럼 우직하게 앞서가고 있지만, 나는 기본 스피드가 있는 토끼라 살짝 뒤쳐져도 금방 따라 잡는다는 것, 살도 빠졌고 이제 귀여운 이미지로 밀고 나가고 싶은데, 리포터는 단호했다.
“곰이 살 빠지면 토끼 되는 건가요?”
이인영은 리포터에게 레이저 빔을 쐈다.
결국 나는 영원한 곰이라는 건가, 토라진 얼굴이 제법 귀여운 선수, 리포터는 곰도 충분히 귀엽다며 뒷수습에 나섰다.
“어쨌든 시즌이 끝났을 때 1위는 내 꺼라는 생각은 있으신 거네요?”
“그렇죠. 조만간 따라잡을 테니까, 다들 너무 우쭐해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인터뷰에 자극을 받았는지 베어스의 페르난데스는 다음 날 경기에서 시즌 10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작년 시즌도 초반에 앞서나가다가 이인영과 박혁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3위에 그쳤는데, 올해도 그런 굴욕을 반복할 건가.
뭣보다 날 거북이에 비유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1위인데 왜 그 자식이 관심을 받는 거야?’
홈런 1위는 나다. 그런데 저만큼 뒤쳐져 있는 이인영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불만, 결국 나는 외국인 용병이라는 건가.
완전히 차이를 벌려 놔야 여론도 내게 관심을 주겠지, 내친 김에 한국 신기록 55개도 뒤집어 버리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베어스와 라이온즈가 맞붙은 4월 30일 경기, 양 팀은 작년 시즌 베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고 자웅을 겨뤘다.
그때의 라이벌 의식은 지금도 남아 있는 편, 선수들은 경기 전부터 신경전을 주고받았다.
“오늘도 지면 너희들이 너무 비참해지니까 조금 봐주면서 할게”
“벌어져 있을 때 도망쳐 두세요. 하긴, 도망쳐 봤자 목덜미 물리는 건 마찬가지겠지만요.”
김환희는 후배와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난 WBC에선 동료였지만 지금은 서로 물고 뜯을 뿐, 어느 쪽이 먼저 목덜미를 보이고 도망칠 것인가.
상대는 베어스지만 나도 곰, 이인영은 곰끼리 한 번 붙어보자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 1회 초 라이온즈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올 시즌 타율 0.331, 홈런은 없고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적도 딱히 불만은 없는데 뭔가 조금 아쉽습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임완수 선수가 물론 거포는 아니거든요. 그래도 2루타는 제법 쳐줬고 올 시즌 3kg을 불렸다고 하는데 장타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거 다 물살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때 가만히 있던 이인호 위원이 강력한 한방을 날렸다.
3kg 늘었다고 그게 다 근육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냥 살이 쪘을 뿐일 지도, 박한우 위원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물살 타법이다.’
임완수는 초구를 받아쳐 좌중간을 가르는 장타를 뿜어냈다.
살이 찐 건 맞지만 운동신경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키는 작아도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며 2루까지 진출, 2번 타자 홍현구에게 타점 기회를 안겨줬다.
‘나는 원래 공격형 유격수였어.’
홍현구는 재활을 끝낸 후에도 수비를 보완하는 훈련보다 타격에 집중했다.
요즘은 KBO도 팬 그래프를 활용하고 있는데, 수비 지표를 나타내는 Def와 공격 지표를 나타내는 Off로 나뉜다.
작년 시즌 홍현구의 Off는 98.2, Def에서 마이너스 63.4를 기록했다.
이 정도면 유격수를 안 보는 게 정상, 전 감독이었던 한승규도 홍현구를 유격수로 쓰다가 가끔 중견수로 보냈다.
그런데 올 시즌은 주전 유격수로 정착, 이성한 감독은 홍현구가 수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팀에 저만한 선수도 없는 게 사실, 뭣보다 홍현구는 유격수라는 포지션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플러스에 마이너스해도 플러스다.’
수비가 안 좋아도 공격에서 만회할 수 있는 선수, 그렇다면 그냥 유격수에 두는 게 좋지 않겠나.
실제로 올 시즌 홍현구는 타율 0.330, 홈런 4개, 11타점 대활약을 펼치고 있는 중, 작년보다 물이 오른 공격력을 과시하고 있다.
뒤에 이인영이 버티고 있으니 투수들이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된 것도 상승세의 원인, 초구부터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자!! 이 타구는 다시 한 번 좌중간을 가릅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홍현구 선수의 적시 2루타!! 라이온즈가 선취점을 올립니다!!”
“역시 라이온즈의 상위 타선은 어느 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인데 여기서 한 방 터지면 초반에 승기가 갈릴 수 있겠네요.”
느릿느릿 동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곰 한 마리,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하품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베어스 배터리는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도쿄 올림픽 2021 WBC를 함께 국가대표에 올랐던 오건무 포수의 경계심은 최고조, 저 녀석이 국내 타자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저는 토끼라 금방 따라 잡아요 = 너희들은 뛰어봤자 내 밥이다.]
이인영이 인터뷰에서 건방진 말을 쏟아냈을 때도 오건무는 그러려니 했다.
말이 토끼지, 저 자식은 그냥 배고픈 곰이다.
곰이 느려 터졌다는 생각은 오해, 마음먹고 뛰면 어느 동물도 도망칠 수 없다.
나무 위로 올라가도 기어 올라가 잡아먹는 공포의 맹수, 부지런히 도망치지 않으면 다 잡아먹힐 운명, 정신을 바짝 차렸다.
‘1단계, 겁을 줘서 도망치게 한다.’
일단 몸 쪽 깊숙한 공으로 겁을 줬다. 하지만 반응이 없는 녀석, 이 정도 패턴은 예상했다는 건가.
역시 지능도 높은 곰, 2단계 작전에 돌입했다.
“바깥쪽, 떨어지는 볼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히팅 포인트를 조금 앞에 두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요. 빠른 볼에 대비하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는 건드리지 않고 있어요.”
박한우 위원은 조금 무서운 정보를 풀어냈다.
이인영은 이미 메이저리그 진출로 목표를 잡은 선수다. 빠른 볼을 조금 더 힘 있게 치려면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겠지, 지금 치르는 경기는 그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일 뿐이다.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는 선수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일, 하지만 이인영은 허풍 따윈 하지 않았다.
따악~!!!!
“당긴 타구가!! 뒤로!! 뒤로~ 오!! 우익수 키를 넘어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지나 홈으로!! 타자 주자는 1루에 멈춰섭니다!! 이인영 선수의 추가 적시타!! 성운 라이온즈가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지금 타이밍은 좋았는데 너무 잘 맞았어요. 타구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2루까지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차원이 다른 타구 스피드에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스탯 캐스트에 따르면 이번 타구는 발사각도 7도에 속도 203km, 이 정도면 그냥 총알이다.
비거리 130m 이상을 내려면 타구속도가 120마일(192km)을 넘겨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가 있는데, 지금 타구는 그 기준을 가볍게 넘어섰다.
이러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것, 우익수 김사경도 순간 3루 강습 타구가 날아오는 줄 알았다.
내야수비가 떨어져 우익수로 전향했는데 3루수로 굴렀던 악몽이 되살아날 정도, 잠에서 깬 곰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생태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뭐 괜찮아, 원하던 결과니까. 아임 쏘 쿨~ ’
한편, 타구를 확인한 이인영은 풀어낸 보호대를 1루 코치에게 전했다.
지금 같은 타구 질을 유지한다면 홈런이 쏟아져 나오는 건 시간문제, 후속 타자 김상규의 추가타에 3루까지 들어갔다.
“저 왔어요.”
“안 와도 돼 인마”
UA 베어스의 3루수 김재규는 징그러운 후배를 밀어냈다.
함께 국가대표로 뛰면서 많이 친해졌지만 적응이 안 되는 녀석, 뭣보다 경기를 즐기고 있다는 게 엄청ㄴ난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 즐기면서 경기를 한 적이 있는가. 프로 12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단 한 번도 마음을 풀고 경기를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자식은 설렁설렁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만큼 레벨의 차이가 있다는 건가. 타구 하나에도 긴장하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딱~!!
“또 올 게요!!”
김재규에게 인사를 건넨 이인영은 바로 홈으로 뛰쳐나갔다.
유격수가 잡았지만 홈 송구는 엄두도 못 냈고, 타자 주자만 잡아내면서 원 아웃이 올라갔다.
아차 하는 사이 스코어는 3대 0,
베어스는 1회 말 반격에 나섰지만 1점만 만회, 여기에 병살타로 기회를 끊어먹으면서 분위기 전환에 실패했다.
2회는 양 팀 모두 별 소득 없이 종료, 성운 라이온즈의 3회 초 공격이 시작됐다.
따악~!!
“이 타구는 …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에 떨어집니다!! 홍현구 선수는 오늘 일찌감치 멀티 히트를 적립하는군요.”
“이제 선수가 문제네요. 주린 배를 채우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다시 등장한 굶주린 맹수,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피하자니 작년 한국시리즈의 치욕이 떠오르고, 방망이가 안 나오는 바깥쪽 유인구를 택했다.
바깥쪽 변화구를 밀어 쳐서 담장을 넘길 선수가 몇이나 될까. 볼배합을 읽은 페르난데스는 수비위치를 평소보다 조금 앞당겼다.
‘어지간하면 안 쓰려고 했지만’
이인영은 밀어치기로 변화구를 걷어 올렸다.
생각보다 멀리 가는 타구, 좌익수 페르난데스가 끝까지 추격에 나섰지만 타구는 담장 위를 넘어갔다.
수비 위치를 조정한 페르난데스를 바보로 만든 일격, 그 사이 유유히 베이스를 돈 이인영은 홈으로 들어왔다.
‘내가 말했지, 지금부터 열심히 도망치라고’
이인영은 더그아웃으로 향하기 전 외야를 흘끗 쳐다봤다.
홈런 10개 치고 있다고 기세등등한 페르난데스, 하지만 작년에도 이인영은 앞서가고 있던 페르난데스를 가볍게 제쳤다.
시즌이 끝났을 때 격차는 무려 20개,
단숨에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도망치는 먹잇감을 따라가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도 재미가 있겠지, 페르난데스가 좀 더 힘을 내주길 바랐다.
“아~ 이 공에 따라 나오는 군요. 페르난데스는 오늘 두 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납니다.”
“작년의 그 못 된 버릇이 또 나오네요. 바깥쪽 유인구에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 페르난데스는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삼진만 2개를 당하면서 침묵, 뒤쳐져 있던 맹수가 점차 치고 올라오면서 홈런 레이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은 공포에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