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겨울잠 (2)
[딱~!!]
“이 타구는 2루수 정면!! 2루로!! 다시 유격수가 1루에 송구합니다!! 더블 플레이!! ST 위너스가 위기를 넘어갑니다!!”
홈런을 기대했던 팬들은 최악의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
어떤 타자든 매번 안타를 칠 수 없지만, 중요한 상황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선수였기에 기대가 컸던 게 사실, 슈퍼스타도 씁쓸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넌 잃을 게 많은 입장이다. 조심해라.’
속은 쓰렸지만 이인영은 아버지의 충고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 건가.
타격 삼관왕, 국가대표 선발에 리그 MVP, 고액 연봉, 팀을 대표하는 입지와 인기까지,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작은 돌부리에 걸려도 크게 넘어지는 게 인간, 인생이라고 다를 거 없다.
내가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훗날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 모르는 법, 그리고 그걸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있다.
실제로 라이온즈가 시즌 초반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여론은 이인영의 최근 성적을 들먹이며 그 책임을 한 선수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내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면 논란은 더욱 가중될 뿐, 병살 하나 쳤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면 ‘인성이 부족하다.’, ‘감정기복이 심하다.’ 이런 모함이 사방에서 날아들 거다.
그리고 젊은 선수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말이 앞서는 편, 그리고 실제로 최근 문제가 터진 적도 있다.
“우리 팀은 약하잖아요.”
지난 4월 7일, 전인규는 라이브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선화 이글스가 약체인 건 사실, 그런데 팀의 주축 선수라는 녀석이 대놓고 우린 약하다고 고백해 버렸다.
‘아차, 이거 생방송이었지?’
그제야 실수를 인정한 전인규는 농담이었다고 수습했지만 선화 이글스 팬들은 배신감을 느꼈다며 전인규를 깎아내렸다.
네가 아니라 이인영이 왔었다면 팀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라며 1년도 더 지난 논란을 다시 들먹였고, 결국 사죄 인터뷰까지 해야 했다.
[우리는 안 될 거야. 최약체니까.]
[개막전인데 또 졌어]
[올해도 포스트 시즌 진출 못하겠지?]
그런데 웃긴 건 팬들은 부정적인 말을 대놓고 한다는 거다.
팬이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선수인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게 앞뒤가 맞나.
“너희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건 우리야.”
이렇게 말하면 너희들이 못해서 우리가 분위기가 처진 거라고 반박하는 팬들도 있겠지,
하지만 전인규는 국가대표에 3번이나 뽑힐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은 선수, 실전에서 못했다면 국가대표에 뽑히지도 못했을 거다.
팀이 강해지길 바란다면 선수들을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도 팬들의 역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수도 의욕이 죽어버린다.
그렇다고 전인규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순 없지만, 어린 선수에게 의지해야 할 만큼 이글스의 상황이 막장이라는 건 사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수가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성운 라이온즈는 입장이 나은 편, 올 시즌 초반 성적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주고 있다.
만약 분위기까지 우울했다면 정말 야구하기 암울했겠지, 조금 어려운 시기지만 이겨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차 하는 사이 5대 0으로 끌려가는 경기,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지 않은가. 홈팬들은 타석에 들어선 얼굴에 희망을 품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2번째 타석을 맞이합니다. 오늘 1타수 무안타, 앞 선 타석에는 병살타를 기록했습니다.”
“타구 질은 나쁘지 않았거든요. 타격감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기대를 걸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초구를 잡아당겼지만 이번에도 우익수 글러브로 들어간 타구,
지금 뭐하는 거냐며 원망 섞인 말이 날아들었지만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고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안 맞으면 볼을 봐야 될 거 아냐?!!”
볼을 많이 봐야 팀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팬의 불만,
하지만 그게 팀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이성한 감독은 초구 타격에 아무 질책도 하지 않았다.
저 선수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게 선수의 운명, 성급한 팬을 탓할 마음도 없었다.
“아잉~ 이러면 안 되는데”
“꼭 내가 오면 못 치더라.”
한편, 좌측 관중석에 자리 잡은 여대생 팬들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희한하게 내가 직관을 오면 못 치는 선수, 역시 괜히 온 건가.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힘내라며 응원을 보냈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6회 말, 7대 0으로 뒤진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이 시작됐다.
오늘도 답이 안 보이는 타선, 패배를 직감한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많은 팬들은 최강 성운을 외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따악~!!
“이 타구는 유격수 옆을 빠져나갑니다!! 임완수 선수의 안타!! 오늘 멀티 히트를 기록합니다!!”
“이제 홍현구 - 이인영 선수로 이어지거든요. 여기서 2~ 3점내면 경기 모릅니다.”
하지만 또 병살이 나오면서 찬물을 맞은 관중석, 이제 정말 일어나야 되는 건가.
포기하면 편한데 다음 타자가 이인영이라는 게 문제, 지금 쳐도 뒷북이지만 영봉패를 면하는 게 어디인가.
몇 번이나 속았지만 팬들은 다시 기대를 걸었다.
‘공이 안 들어오는데’
바뀐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면서 카운트는 2볼 노 스트라이크, 누가 봐도 고의사구를 던질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볼을 따라가는 건 프로답지 못한 짓, 볼넷을 골라낸 이인영은 1루로 걸어 나갔다.
여기서 저 녀석을 빼면 팬들에게 경기를 포기한다는 인상을 줄 뿐, 이성한 감독은 아침부터 나와 훈련을 한 선수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날 경기도 성운 라이온즈는 8대 0으로 무기력하게 패배, 아침부터 고생한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조금 허무했지만 이인영은 내일을 기약하며 퇴근길에 올랐다.
팬들도 대패한 날은 어지간하면 선수에게 사인을 요구하지 않는 편, 응원을 온 여대생 팬들도 그냥 갈까 했지만 마침 눈에 띈 곰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저기 … 정말 죄송한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예상 외로 친절하게 응해주는 선수, 그제야 눈치를 살피던 다른 친구들도 줄을 섰다.
“일행이세요?”
“네, 오늘 다 같이 이인영 선수 응원 왔어요.”
“아, 그러세요?”
관심을 주고 다시 사인에 응하는 선수, 이때 한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전 다음부터 오면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전에도 몇 번 왔었는데 그때마다 이인영 선수 홈런 못 치셨거든요.”
“그럼 제 홈런 보러 내일 또 오셔야겠네요?”
고단수의 장사에 여학생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거 나한테 작업 거는 건가. 눈치를 살피던 친구들도 확 물어버리라는 눈치를 줬다.
“제가 내일 직관 오면 정말 홈런 치는 건가요?”
“홈런 칠 때까지 오시면 되잖아요.”
최근 타격감을 고려하면 그냥 계속 오라는 거 아닌가.
이어지는 밀당에 여학생은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내일 직관을 오기로 약속, 다른 친구들도 줄줄이 미끼를 물었다.
‘후우~ 연기하는 것도 쉽지 않구나.’
팬서비스를 마친 이인영은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솔직히 마음에서 우러나와 해 준 서비스는 아니다. 이런 나를 위선자라고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위선도 못 떠는 선수들이 더 많다.
그리고 나는 잃을 게 많은 입장, 패배를 당한 날이라도 팬들에게 불친절하게 행동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유명인은 가면을 쓰고 사는 법, 집에 오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엄마가 경기 봐서 못 쳤나?”
“아~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오늘도 쓸데없는 말을 하는 어머니, 따지고 보면 홈런을 치는 날보다 못 치는 날이 훨씬 많다.
그런데 왜 그걸 자꾸 본인의 탓으로 돌리는 건가.
아들이 기죽을 까봐 그러는 것 같은데 이인영은 그런 친절이 불편했다.
“그렇잖아도 오늘 팬들한테 똑같은 소리 들었어요.”
“무슨 소리?”
“자기가 직관 오는 날마다 홈런 못 친다고 그러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예요? 제가 매일 홈런 칠 순 없는 거잖아요. 네? 안 그래요?”
아들의 푸념에 어머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탓이라고 하면 위로가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게 신경을 자극했다니, 다시는 그런 말 안 하겠다고 약속했다.
‘진짜 내가 오늘은 친다.’
다음 날, 슈퍼스타는 독기를 가득 품고 출근했다.
한 방을 때려야 끊어지는 위로의 고리, 차라리 욕을 할 것이지 그런 어설픈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
‘저 자식 최근 컨디션 별로인데 승부하자.’
1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최근 장타가 없는 이인영, 곰이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무슨 위협이 되겠나. 어디 한 번 쳐보라며 약을 올렸다.
따아악~!!
“자!! 이 타구의 종착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1호 홈런!! 잠들어 있던 곰이 드디어 눈을 떴습니다!!!!”
“다들 조심하기 바랍니다.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서 배가 많이 고프거든요.”
제대로 곰 앞발에 채인 투수의 자존심은 걸레가 됐다.
어디까지 갔는지 가늠 할 수 없는 대형홈런, 반면 어제 약속대로 직관을 온 여대생들은 진짜 쳤다며 괴성을 내질렀다.
“이인영 파이팅!!”
“어제 못 친 홈런 오늘 보여줘요!!”
팬들의 요구를 들었는지 이인영은 다음 타석에서도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시즌 2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조금은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랐던 슬럼프 극복, 아직 1홈런에 그치고 있는 ST 위너스의 박혁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경기는 6회 말로 접어듭니다. 타석에는 이인영 선수!! 오늘 연타석 홈런을 쏘아 올리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지금 4대 1인데, 최근 라이온즈 불펜을 고려하면 불안하거든요. 여기서 하나 더 보여줘야 됩니다.”
ST 위너스는 승부를 택했다.
연타석 홈런을 맞았지만 지금이 포스트 시즌도 아니고, 뭣보다 1차전에서 김성수 감독이 고의사구를 지시했다가 철회한 사건 때문에 팀을 바라보는 여론이 별로 좋지 않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뿐, 바뀐 투수 신성호는 각오를 다져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그냥 지켜보는 곰, 이제 배가 불렀다고 먹잇감에 흥미를 잃은 건가. 그래도 ST 위너스 배터리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너 겨우 이거 먹고 배부르냐?’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이인영은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 했다.
안타는 못 칠 수도 있지만 치기 좋은 공을 흘려보내는 건 프로로서 용납이 안 되는 짓, 폭포를 기어오르는 연어를 유심히 지켜보는 곰처럼 집중력을 유지했다.
따아악~!!
“어~ 어~!! 이 타구는!!!! 다시 한 번!! 우측 스탠스에 꽂힙니다!!!! 3연타석 홈런!!!! 잠자는 곰을 깨운 건 ST 위너스였습니다!!”
“너무 늦었죠.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먹이 활동하길 바랍니다.”
“딱히 늦은 것도 아닙니다. 이제 겨우 9경기 했을 뿐이니까요.”
“40홈런 정도로 만족할 선수가 아니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올해는 60홈런 넘겨야죠.”
박한우 위원이 이인호 위원과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 이성한 감독은 더그아웃 보호 펜스까지 나와 깨어난 곰을 반겼다.
언젠간 일어날 거라고 믿었지만 깨어나니 정말 듬직한 선수, 다른 선수들이 조금 받쳐주면 올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