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겨울잠 (1)
[열심히 일한 나는 잔다.]
[주의, 깨우지 마시오. 건드리면 뭅니다.]
시즌 개막 후 어느덧 일주일, 웹툰 작가는 지난 일주일을 정리하는 만화를 올렸다.
성운 라이온즈의 중심화제는 당연 이인영, 작가는 월드스타를 겨울잠에 빠진 곰으로 묘사했다.
“야!! 얼른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어 나!!”
감독과 선수들은 얼른 일어나라고 난리지만 그러건 말건 푹 숙면 중인 곰, 그도 그럴 것이 이인영은 최근 바쁜 나날을 보냈다.
2020 시즌 전 경기 출장, 도쿄 올림픽, 포스트 시즌, 2021 WBC, 봉사활동,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시작된 2021 시즌, 이 정도면 일 정말 열심히 한 거다.
기계가 아닌 이상 지치는 건 당연, 지난 일주일 동안 타율 0.263, 홈런 없이 2타점에 그치면서 팬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조금 쉬게 하는 게 어떨까요?”
“으음 … 일리가 있는 말이군.”
성운 라이온즈의 이성한 감독은 진지하게 휴식을 고민했다.
아무리 강한 활도 물에 젖으면 쓸모없는 법, 피로에 젖은 선수를 내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요. 나갈래요.”
“무리하지 마라. 가끔은 쉬어가야 할 때도 있는 거야.”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이인영은 출장을 강행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중계석 해설을 맡은 고토부키는 이인영의 스타일을 정확히 분석했다.
하체에서 상체로 파워를 끌어올리는 유형이라 엔진에 시동이 늦게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타격 폼이다.
시동이 잘 안 걸려서 그렇지 제대로 걸리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선수, 이인영은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휴식을 할 때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 엔진에 불을 붙여야 하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또 아침부터 훈련인가.’
이성한 감독은 평소보다 2시간 일찍 경기장에 나왔다.
지난 포스트 시즌에서 이인영이 아침 일찍 훈련을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녀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잠을 잔다는 거야? 저렇게 부지런한데’
이성한 감독은 그런 태도를 높게 평가했다.
요즘 젊은 선수들은 너무 노는 걸 좋아해서 야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작년에 성공했고 연봉도 3억이나 받게 됐으니 게으름을 부릴 법도 한데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훈련을 거듭하는 선수, 성적을 내든 못 내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기다리자. 기다리면 올라 올 선수다.’
오늘도 믿고 3번 타순에 배치, 팬들도 함성을 내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비바람 몰아쳐도 ~ 이겨내고 ~ ”
“일곱 번 ~ 넘어져도 ~ 이일 ~ 어나라!!”
이때 관중석에서 들려온 응원가가 흑곰의 신경을 건드렸다.
홈런포가 침묵하고 있는 슈퍼스타를 위한 맞춤형 응원가, 관중석을 한 번 쳐다본 이인영은 뚱한 표정으로 투수와 얼굴을 맞댔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63, 홈런 없이 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하 ~ 삐쳤나요? 그럼 보란 듯이 한 방 날려주면 됩니다.”
ST 위너스 배터리는 신중한 볼 배합을 택했다.
지금은 겨울잠에 빠져들었지만 깨어나면 생태계를 파괴시킬 정도의 괴수, 얌전히 걸어 나가겠다면 그렇게 해 줄 생각도 있었다.
따악 ~ !!
“자!! 밀어 친 타구가!!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까지!! 성운 라이온즈가 1사 주자 1 - 2루 기회를 맞이합니다!!”
“폼이 점 점 올라오고 있네요. 타구 질이 괜찮습니다.”
안타가 나왔지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쉬움, 이인영은 그런 관중석을 향해 불만을 포했다.
‘내가 겨울잠이면 저 선배는 사망 아냐? 나는 언 데드라고“
이제 타석에는 4번 김상규, 김상규는 작년 시즌 20홈런을 넘기면서 성운 라이온즈 타선의 한 축을 책임졌다.
덕분에 연봉도 크게 올랐지만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150, 홈런 없이 1타점,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1루에서 멀어졌지만 내야 플라이가 나오면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딱콩 ~
딱콩 ~
이날 이인영은 단타 3개를 찍어내며 시즌 타율을 0.333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팬들이 원하던 한 방은 나오지 않았고, 팀의 패배도 막지 못했다.
“왜 홈런을 못 치는 거예요!!”
“힘 좀 내 봐요!!”
씁쓸한 마음으로 오른 퇴근 길, 사방에서 장난과 응원이 섞인 팬들의 참견이 쏟아졌다.
“아 ~ !! 진짜 왜 이래요?!! 저 3할 치고 있잖아요!!”
“어? 지금 팬들한테 화내신 거예요?”
한 눈에 봐도 얄밉게 생긴 팬, 이인영은 화를 가라앉히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낸 게 아니라 목소리가 높아진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쪽 속마음은 모르고 깔깔 거리며 재미있다고 웃는 팬들, 월드 스타는 마지막까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에 올랐다.
“어휴 ~ 진짜 팬만 아니었으면 … ”
마침 떨어진 대기 신호, 이인영은 신호가 바뀔 때까지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웃음거리가 되는 건 상관없는데 그건 나와 팀이 잘 나갈 때 받아줄 수 있는 무례다.
이쪽은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겨울잠을 잔다느니, 왜 안타 밖에 못 친 다느니 그런 말을 하면 곱게 들리지가 않는다.
하지만 야구가 안 될수록 조금해해선 안 된다는 게 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조언,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향하는 길을 서둘렀다.
* * *
“야, 얘 귀엽지 않냐?”
“그러게, 딱 내 이상형이야.”
이곳은 대구의 한 대학교, 여학생들은 동영상을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연예인도 좋지만 매번 보다보면 신선함이 떨어지는 법, 대구를 넘어 월드 스타로 떠오른 이인영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나도 이인영 좋아해.”
“너도?”
“응,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위 0.1%지”
한 여학생은 진지하게 본심을 털어놨다.
남자 뭐 있겠나, 경제적 능력 있고 여자한테 잘해주면 그만, 나머지 것들은 세트로 딸려오는 부수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인영은 젊은 나이에 성공한데다 기럭지도 길고 유머 센스도 있다. 생긴 것도 제법 귀여운 편, 뜻을 모은 여학생들은 홈경기 티켓을 예약했다.
다른 구장은 그날 직관을 가도 티켓을 구하기 쉽지만 성운 라이온즈는 작년 시즌 평균 관중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차 하면 놓치는 티켓, 응원군단은 좌측 외야에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보니까 훨씬 날씬한데’
곰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잘 빠진 몸매, TV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늘씬해 보여서 조금은 놀랐다.
아니, 미적효과를 위해 어설프게 근육을 붙인 연예인들보다 훨씬 더 진한 수컷냄새를 풍기는 등빨까지, 뒷모습만으로도 아찔한 매력을 선사했다.
‘오늘은 이겨야지.’
반면 슈퍼스타는 쏟아지는 주위 시선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기지 못하면 팬들의 관심도 식기 마련, 어제 3안타를 때렸지만 솔직히 영양가는 없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최근 활약, 캡을 깊게 눌러쓰고 주심의 콜을 기다렸다.
“자, 1회 초 ST 위너스의 선공으로 시작합니다. 선두 타자는 리차드 브라운, 올 시즌 타율 0.333, 홈런 1개,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ST 위너스가 김성현 선수라는 걸출한 선발 투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팀 컬러는 투구보다 타격에 가깝거든요. 그런 점에서 브라운 선수의 영입은 팀에 맞는 행보였다고 봐야겠죠.”
[따아악 ~ !!]
“자!! 말씀 드리는 차이!! 잡아당긴 타구가!! 우측 펜스를 넘어 갑니다!! 리파드 브라운의 시즌 2호 홈런!! ST 위너스가 오늘도 선취점을 올립니다!!”
“너무 똑같은 패턴인데요. 성운 라이온즈도 공격을 중시하는 팀이지만, 투수력이 이래서야 의미가 없습니다.”
경기는 오늘도 ST 위너스의 강세로 시작됐다.
작년 시즌, 라이온즈의 에이스 노릇을 해줬던 존 워커는 KBO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일본 무대에 재진출했다.
2년 간 3억 엔(옵션 1억)을 보장하는 계약, 아무리 많이 줘도 150만 달러 주기 힘든 KBO에 머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떠나간 에이스, 성운 라이온즈는 대체자 윌 클락을 영입했지만 지금까지 성적은 신통치 않은 편, 그래도 2번 박세경을 범타 처리하고 3번 타자 박혁을 맞이했다.
박혁도 올 시즌 타율 0.222, 홈런 0개로 출발은 좋지 않은 편, 언제든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타자라 야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를 따라 나갔네요. 원래 박혁 선수가 배드 볼 히터 기질이 있지만 이런 공에 반응을 하는 건 곤란합니다.”
“새로운 얼굴이 치고 나오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래도 기존에 있던 선수들도 활약을 해주는 게 좋죠. 집중 있는 타격 기대하겠습니다.”
이인호 위원은 박혁을 슬쩍 밀어줬다.
경쟁자가 치고 나가질 못하니 아들도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겨우 1 ~ 2개 차이지만 다른 선수가 앞서나가면 그 꼴을 못 보는 게 승부욕, 프로 무대를 겪어봤으니 선수의 마음가짐도 잘 알고 있었다.
따아악 ~ !!
“낮은 공을 끌어 당겼고!! 이 타구는!! 좌측 담장!! 위로 날아갑니다!!!! 박혁 선수의 시즌 1호 홈런이 여기서 터지는 군요!! 스코어 2대 0!! ST 위너스가 홈런 2방으로 앞서 나갑니다!!”
“이 타이밍에 이인영 선수를 비춰주는 이유가 뭔가요? 오늘 따라 PD가 조금 짓궂은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인영의 얼굴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인호는 아들이 지는 건 용납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겨우 마무리 된 1회 초, 이인영은 단숨에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가능하면 이 쪽에서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는데, 뒤늦은 반격에 나섰다.
“자, 1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올 시즌 타율 0.333, 홈런 없이 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완수 선수는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 확실히 타격에 눈을 떴죠. 수비만 조금 가다듬는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2루수가 될 선수입니다.”
임완수는 보란 듯이 초구를 받아쳐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를 뽑아냈다.
다음 타자는 홍현구, 아직 초반이지만 팀에서 타격감(타율 0.357, 홈런 1개)이 가장 좋은 선수라 기대를 걸었다.
따악 ~ !!
“아!! 이게!!”
무심하게도 좌익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타구, 아쉬움이 컸는지 홍현구는 외야를 한동안 노려보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제는 이인영의 손에 걸린 공격, 홈 팬들은 얼른 일어나라는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아 ~ 여기서 거르나요?!!”
“김상규 선수가 지금 타율이 1할이 안 되거든요. 거기다 작년 시즌 병살 20개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작전은 아닌데 … 이런 식이라면 오늘 ST 위너스 선수단은 무사히 인천으로 가기 힘들겠네요.”
관중석은 엄청난 야유에 시달렸다.
우리는 투수들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고 있는데 이게 그 답인가. 분위기를 살피던 김성수 감독은 배터리에 승부를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