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솔직한 사람 (16)
“지금부터 2021 시즌 미디어 데이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감독과 각 팀을 대표하는 선수들은 한 자리에 모여 시즌 공약을 발표했다.
2021 WBC 우승으로 한껏 달아오른 개막전 분위기, 여론의 관심은 선감독과 선수들의 말에 집중됐다.
“자, 이번에는 성운 라이온즈의 이성한 감독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
“작년 시즌 팀이 준우승에 그쳤는데요. 설욕을 위해서라도 올 시즌은 조금 센 공약을 거시는 게 어떠십니까?”
도대체 뭘 걸라는 건지, 이성한 감독은 선수들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다들 눈만 깜빡거렸다.
“선수들하고 같이 귀여운 척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귀여운 척이라고요? 그게 뭡니까?”
“뭐든 좋습니다. 율동에 맞춰 걸 그룹 댄스를 춘다든가 …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보다 못해 직접 미션을 제공하는 사회자, 이성한 감독은 아무리 우승이 고파도 그런 공약은 못 걸겠다며 몸서리를 쳤다.
“까짓 거 공약으로 걸죠.”
이때 눈치 없이 포문을 여는 월드 스타, 주위 동료들이 너 왜 그러냐며 말렸지만 이인영은 막무가내였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여자분들 심장 다 터뜨릴 수 있어요.”
“하하~ 정말입니까?”
다들 못 믿겠다는 눈치, 자리에서 일어난 이인영은 맛보기만 보여주겠다며 시동을 걸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㰁Ԡ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㰁֢
선수들은 물론 관중석은 경악했다.
뭔가 넘지 말아야 할 금기를 넘어선 기분, 선수들은 차마 보기 어려웠는지 눈을 가려버렸고, 같은 팀 동료 임완수는 창피하다며 감독 뒤로 숨어버렸다.
“꺄아악~!!”
“어머 어떻게 해!! 귀여워!!”
반면 장담대로 여성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 저 큰 덩치로 깜찍한 율동까지 해내는데 너무 끔찍해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드러낸 압도적인 존재감, 깜짝 놀란 사회자는 그 정도면 됐다며 뜯어말렸다.
“아~ 2절도 해야 되는데 … 눈치가 없으시네.”
숨이 막히는 매력을 발산한 슈퍼스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착석, 옆에 있기 창피했는지 동료들은 의자를 저쪽으로 옮겼다.
“저기 이인영 선수, 원래 애니메이션 … 그런 거 자주 보십니까?”
“아니요. 보육원에 있는 여자애들이 이러고 노는데, 같이 놀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보육원에 남자애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축구나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여자애들 입맛에 맞춰 주다보니 물들어버린 귀여움, 솔직히 창피했지만 팬들의 반응도 좋았으니 후회는 없었다.
“저는 우승 공약으로 귀여운 척 하기 하겠습니다.”
“야, 인마 그러지 마. 왜 그래?”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기왕 걸거면 세게 걸어야죠.”
동료들이 말려도 막무가내, 이인영이 고집을 부리면서 성운 라이온즈의 공약은 귀여운 척으로 결정됐다.
우승하면 그 깜찍한 율동을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라이온즈 여성 팬들은 격렬한 환호를 보냈다.
“자, 이번에는 선수 각자의 목표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일단 ST 위너스의 박혁 선수”
“예”
“작년 시즌 부상을 당하면서 개인기록에서 손해를 보셨는데, 홈런왕 재탈환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박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작년 시즌 부상을 당했다고 쳐도 30개를 겨우 넘긴 홈런, 반면 이인영은 55개를 때려냈다.
국제대회에서도 확인했지만 차원이 다른 수준의 실력,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위해서라도 올 시즌 일을 내긴 해야 되는데, 이인영보다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까?
최소 40개는 넘기겠다며 직답을 피했다.
“그럼 이인영 선수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작년 시즌 55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하셨는데, 올 시즌은 어디까지 목표를 잡고 계십니까?”
“적어도 박혁 선배보다는 홈런 많이 때릴 겁니다.”
대놓고 도발하는 건방진 애송이, 한 방 먹은 박혁은 얼굴을 붉혔다.
“박혁 선수, 도발을 당하셨는데 그냥 가만히 계실 겁니까?”
“말보다는 실력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저분이 실력은 있는데 말빨이 못 따라주거든요.”
마지막까지 까불거리는 녀석, 박혁은 너 올 시즌 두고 보자는 눈빛을 보냈고, 이인영도 어디 한 번 해보자며 전쟁을 예고했다.
어쨌든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 행사를 마친 이인영은 하루 남은 휴가를 아이들에게 투자했다.
열렬한 환호로 맞이해주는 아이들, 하지만 혜진이는 살짝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오빠 반성할 거 없어요?”
“뭐가?”
“지난번에 사람 다치게 했잖아요. 반성하고 있냐고요.”
얘는 뭘 그렇게 따지고 있는 건지, 장난기가 발동한 이인영은 잘 모르겠다며 약을 올렸다.
“진짜 모르겠어요?”
“응”
“그럼 여기서 손 들고 있어요.”
보육원의 아이들이라고 혼 안 나는 거 아니다. 그래도 체벌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아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벌을 세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보육원 생활에 익숙해진 혜진이는 이곳의 법도를 앞세웠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이인영은 그 뜻에 어울려 줬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 잘못한 거 없는데?”
마지막까지 뺀질거리는 오빠, 약이 오른 혜진이는 그럼 여기서 계속 벌 서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저쪽으로 가 버렸다.
“내가 내리라고 할 때까지 내리면 안 돼요.”
“그래, 까짓 거 그러지 뭐”
무한농성에 들어간 월드 스타, 몇 몇 아이들이 나가서 놀자고 보챘지만 이인영은 침묵시위를 이어갔다.
“얘들아, 잠깐 선생님 좀 도와줄래?”
“네에~ ”
마침 도움을 청하러 온 선생님들, 언제나 앞으로 나서길 좋아하는 혜진이는 선생님을 돕기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인영 씨도 좀 도와주실래요?”
“오빠는 안 돼요. 저기서 벌 서야 돼요.”
은근슬쩍 도망치려 했더니 그것마저 막아버리는 영악한 녀석, 약이 오른 악마는 어디 한 번 해보자는 눈빛을 보냈다.
‘잠깐, 내가 뭘 잊어버린 것 같은데.’
선생님을 돕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린 오빠, 그렇게 혜진이는 한참을 밖에 있다가 교실로 돌아왔다.
그제야 알아챈 벌세우기, 도망쳐도 됐을 텐데 오빠는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조금 미안해진 마음, 그래도 내가 없는 사이 팔을 내리거나 그러진 않았을까. 교실에 있던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오빠 내가 없을 때 반성 안 했지?”
“아니, 계속 저러고 있었는데”
요령도 없지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는 오빠, 조금 무안해진 혜진이는 죄인 쪽으로 다가왔다.
“오빠 이제 잘못한 거 알았어요?”
“아~~ 니”
굽힐 줄 모르는 고집에 혜진이는 백기를 들었다. 솔직히 이번은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언제까지 벌세우기를 하는 것도 미안한 일, 이쯤에서 용서해주기로 했다.
“얘들아, 맛있니?”
“네에~ ”
“얼른 먹어, 여기 또 있으니까.”
벌세우기를 마친 이인영은 아이들을 위해 고기 굽는 기계를 자처했다.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열심히 놀고 자고 먹는 것, 제대로 고기 한 번 먹기도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오빠는 안 먹어요?”
“응, 너희들 다 먹고 나면”
혜진이는 슬쩍 오빠에게 화해를 권했다. 하지만 모른 척 하고 계속 고기만 굽는 오빠, 눈치를 살피던 혜진이는 직접 싼 쌈을 가져왔다.
“오빠, 이거 먹어요.”
“아니, 나중에 먹는다니까.”
“이것 좀 먹어보라구욧!!”
무안한 마음에 높아진 목소리, 이인영은 그런 소녀의 마음을 무참히 농락했다.
“너 솔직히 말해, 오빠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지?”
“아 … 아니에요.”
“쯧~ 쯧~ 얘가 솔직하지 못하네. 그래 얼른 이리 줘”
겨우 한 쌈 받아먹은 오빠,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혜진이는 씩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배 터지게 먹은 하루, 간식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은 아이들은 각자 무리를 이뤄 놀이에 빠졌다.
“오빠 이거 알아요? 맞춰 봐요.”
“뭔데?”
혜진이는 오빠 앞에 영어단어를 제시했다. 아늑하다, 친밀하다를 뜻하는 형용사 Cosy, 하지만 배움이 짧은 이인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너는 어린 애가 무슨 이런 단어를 알고 있니?”
“빨리 말해 봐요. 무슨 뜻이에요?”
“알고 있지만 말 안 할래.”
“오빠,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그런 자세는 솔직하지 못한 거예요.”
계속되는 구박에 이인영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얘는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평소 말빨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너 영어를 그렇게 잘 해?”
“네, 오늘도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요.”
“그럼 오빠 가르쳐 줘. 나중에 미국 가야 되거든”
혜진이는 답을 망설였다. 가르쳐 줄 순 있는데 오빠가 미국으로 가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 나중에 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너 오빠가 미국 가는 거 싫어서 이러는 거지?”
“아니에요.”
“얘가 솔직하지 못하네. 싫으면 싫다고 해”
“뿌우~!!!!”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유치한 전쟁, 그래도 이런 전개가 싫진 않았는지 혜진이는 이후에도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혜진아, 너 오빠 미국 가는 거 싫어?”
“네에 … ”
드디어 솔직하게 풀어낸 속마음, 이인영은 풀이 죽은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오빠 미국 가야 돼.”
“왜요?”
“앞으로 너희들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공부도 시켜주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 여기 있으면 돈 많이 못 벌어.”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예요.”
오늘 따라 애교가 많은 녀석, 이인영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장난을 쳤다.
“그렇게 오빠랑 같이 있는 게 좋으면 나중에 시집오던가.”
“음 …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진지한 답에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 이 아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고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너 오빠한테 시집 안 올 거야?”
“그러니까 생각을 좀 해본다고요.”
“얘가 솔직하지 못하네. 좋으면 좋다고 해.”
“흥~ 몰라요.”
오늘 따라 귀엽게 구는 녀석,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올 시즌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며칠 후 시작된 개막전, 이인영은 홈팬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입성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그 춤 한 번 더 보여줘요!!”
“귀여웠어요!!”
이때 관중석에서 이상한 요구가 날아왔다. 홈런왕을 한 번 더 해달라는 건가, 하지만 관중들의 요구는 그게 아니었다.
‘재방송은 안 합니다.’
이인영은 도도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다시 보고 싶다면 성운 라이온즈가 정규 시즌 우승을 달성했을 때 뿐, 그날을 위해서라도 퍼포먼스는 최대한 아껴뒀다.
“자, 이인영 선수가 시즌 첫 타석에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보시는 그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한국 야구의 기둥이자 미래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올해도 좋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1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슈퍼스타의 등장에 관중석은 다시 달아올랐다.
존재만으로도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선수, 사랑을 받는 만큼 베풀어야 하는 것도 있겠지. 이렇게 월드 스타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