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솔직한 사람 (15)
‘그렇게 나온다면 더 때리고.’
어느 정도 기울어진 승부, 그래도 미국 대표 팀은 가드를 내리지 않았다. 7회에 2점을 만회하면서 스코어는 6대 2, 마지막까지 해보자는 발악에 한국 팀은 늘어진 긴장감을 다시 끌어올렸다.
“자, 대한민국의 8회 초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전인규 선수, 오늘은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자기 스윙만 하면 됩니다. 타격이란 이런 때도 저런 때도 있는 거니까요. 초구부터 나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무안타로 침묵 중인 전인규의 등장, 박한우 위원은 그 입장을 나름대로 변호했다.
안타를 못 치면 공을 보면서 투구 수를 늘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커트가 나온 건 안타를 노렸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거나 정확히 타격이 안 됐다는 뜻, 그리고 볼을 무리하게 쳐서 파울이 됐다는 증거다.
다만 예외의 경우도 있는데, 타자는 기본적으로 빠른 볼에 초점을 맞추고 타격을 한다.
그러다 브레이킹 볼이 들어오면 어쩔 건가? 이에 대한 대응능력으로 타자의 실력이 갈리는 법, 수준급 타자들은 본인이 원하는 타이밍이 아니더라도 투수가 던진 공을 안타나 파울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즉, 커트를 하는 건 의도적인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으로 이해하면 정확하다.
전인규는 그 능력이 되는 선수, 부진하더라도 쉽게 물러나진 않았다.
‘내 한계를 시험하네.’
맞추기는 하는데 앞으로 뻗질 않는 타구, 전인규는 생각을 정리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구속은 어떻게든 따라가겠는데 생각보다 더러운 무브먼트, 특히 마지막에 살짝 변화는 궤적에 정확한 타격이 안 되고 있다.
투구 궤적을 정확히 예상하고 때려내야 한다는 것, 한 차원 높은 공을 던지는 투수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카운트는 불리하지만 컨택은 되고 있거든요. 좋은 현상입니다.”
전인규는 4구도 커트해 냈다.
몸 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이걸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아든 레니 잉글턴은 로진 백을 들었다 놨다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고 변화구를 던졌는데 이게 커트가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변화구? 이런 때는 빠른 볼로 밀어붙이는 게 효과적, 몸 쪽 높은 코스로 밀어붙였다.
딱~!!
“뭐?!!”
결과는 또 파울, 길어지는 승부에 잉글턴은 약간 당황했다.
생각보다 빠른 볼에 잘 대응하고 있는 타자, 던질 공은 다 던졌고 써 먹을 패도 마땅치 않았다.
딱~!!
“다시 파울!! 이제 승부는 7구로 이어집니다!!”
“그래도 안타를 쳐야합니다. 아웃이 되면 의미가 없어요.”
이인호 위원은 이런 시간끌기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말 상대 투수의 투구수를 늘리면 팀에 도움이 될까? 작년 시즌 가장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팀은 베어스, 타석 당 평균 투구 수는 3.74개에 불과했지만 출루율은 0.358로 가장 높았다.
공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면 굳이 길게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뜻, 이젠 공을 많이 보는 게 팀 성적과 큰 상광관계가 없다는 게 정론이다.
전인규는 정말 옳은 타격을 하고 있는 걸까. 빠른 카운트에 안타를 펑펑 때려내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야구 잘하는구나.’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잘나게 낳지 않았나? 마음껏 자랑하고 싶었지만 국민들이 알아서 칭찬을 해주고 있으니 비교질은 하지 않았다.
딱~!!
드디어 인 플레이 타구, 약간 빗맞았지만 전인규를 빠른 발을 이용해 1루로 튀어나갔다.
유격수가 송구를 했지만 내야안타, 드디어 안타를 만들어 냈지만 전인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치질 못했으니 이건 운이 따라준 결과,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었지만 이제 8회 초라 기회가 또 올지 확신은 들지 않았다.
‘한 점만 더 내면 이긴다.’
신명철 감독은 김환희에게 보내기 번트를 지시했다.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난 특공대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악마는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저 자식은 진짜 무서운데.’
미국 대표 팀 데이빗 토마스 감독은 고의사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국산 4할이라고 얕봤다가 얼마나 많은 팀이 피눈물을 흘렸나. 미국 대표 팀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다 말아 먹은 결승전, 매서운 발톱 맛을 봤으니 또 덤비기가 애매했다.
‘교체, 이건 아니다.’
고민 끝에 잉글턴을 내리고 스캇 폴슨을 올렸다.
빠른 볼 평균 구속이 91마일 밖에 안 되는 투수, 하지만 구속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타자들이 왜 당신 공을 못 치는 건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폴슨이 기자들 앞에서 했던 인터뷰, 투수들은 자기가 던지는 공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고 있을까? 의외로 잘 모른다.
전문가들은 구위를 두고 수직 무브먼트 몇 인치, 수평 무브먼트 몇 인치, 이렇게 통계화 해서 분석하지만, 던지는 입장에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겉보기엔 그냥 똑바로 날아가는 공, 폴슨도 포수가 알려주고 나서야 자기 공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이해했다.
회전이 덜 걸려서 생각보다 많이 떨어지는데, 공을 옆으로 채는 스타일이라 빠른 볼이 투심처럼 휘기까지 한다.
무브먼트만 보면 메이저리그 최상급, 다른 제구파 불펜 투수들이 피하는 승부를 하는 반면, 폴슨은 그냥 밀어 넣는 편이다.
다만 홈런은 좀 많이 맞는 편, 작년 시즌 47이닝을 소화하면서 홈런을 9개나 허용했다. 반면 볼넷은 3개 밖에 주지 않은 극도의 짠물 피칭, 여러모로 특이한 선수라는 건 분명했다.
'나비가 날아오네?’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많이 움직이는 빠른 볼, 이런 공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다. 실밥이 보일 정도로 회전이 없는데 너클 볼이라고 하기엔 너무 빠르고, 그렇다고 제구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신세계를 경험한 아이처럼 마음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메이저리그에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투수들도 많이 있겠지, 나비를 쫓아다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타격!! 아~ 이게 우익수 정면으로 향하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4번 째 타석에선 범타로 물러납니다.”
“아~ 아깝네요. 이게 좌중간을 갈랐다면 그대로 승리 확정인데 ··· ”
아쉬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는 박한우 위원, 이인영도 쓴웃음을 지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나비를 잡긴 잡았는데 통에 넣다가 놓친 기분이랄까, 물러나더라도 한 번 짖고 갔다.
“유!! 럭키 가이!!”
어설픈 영어지만 대략 이해한 폴슨은 피식거렸다.
맞는 순간 흠칫했는데 운이 따라준 타구, 한국산 4할도 쓸 만하다는 걸 인정했다.
폴슨은 후속 타자 박혁까지 범타로 처리하고 퇴장, 미국은 8회 말 공
격에서 한 점을 더 만회했지만 초반에 벌어진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딱~!!]
“됐어요!! 됐어요!! 그렇죠!!!! 그렇지!!!! 이야아~!!!!”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갑니다!!!! 2021WBC!! 정상에 등극한 팀은 대한민국입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박한우 위원은 자신의 입장도 망각하고 난리를 쳤다. 이 구장에 태극기 하나 걸고 가야겠다며 난리법석, 그 사이 그라운드에선 광란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인영은 한인 팬이 던져준 태극기를 목에 건채 순회공연에 나섰고, 마운드에서 얼싸안고 좋아하던 선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태극기 투척, 게양대를 자처한 선수들 덕분에 마운드 위엔 30여개의 태극기가 휘날렸다.
보기만 해도 벅차오르는 가슴, 박한우 위원은 얼굴을 감싸 안고 흐느끼기까지 했다. 그걸 또 옆에서 다독이는 이인호 위원, 이명한 캐스터도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해설을 이어갔다.
“자, 이인영 선수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요. 역시 이번 대회 최고의 선수는 이인영 선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9경기 모두 출장!! 29타수 17안타!! 5할 8푼 6리!! 홈런!! ··· 콜록~!! 콜록~!!”
“저기 너무 흥분하신 것 같은데 숨 좀 들이키시죠.”
감격에 겨워 해설도 못하는 상황, 그 사이 이인영은 현지 리포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Congratulations on Korea's victory”
“아~ 아~ 땡큐 배리 머치”
고맙다며 태연하게 악수를 건네는 선수, 리포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 악수에 응해줬다.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선수, 통역을 통해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갔다.
“오늘 미국 대표 팀을 상대로 좋은 활약을 펼치셨는데, 언제쯤 당신의 얼굴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건가요?”
“저 지금 여기에 있는데요?”
방심하고 있던 리포터는 빵 터졌다.
4차원을 넘어 5차원적 사고를 지닌 인간, 그래도 프로라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메이저리그의 수준급 투수들을 공략해 냈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까?”
“솔직히 수준급은 아니죠. 진짜 잘하는 선수들은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이인영은 팩트를 정확히 짚어냈다.
우리가 상대한 미국 대표 팀은 정말 최정예 전력이었나. 한국은 전력을 다해 여기까지 왔는데 미국의 슈퍼스타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폴 웹 - 네가 나가면 나도 나갈게]
[도날드 베이커 - 네가 먼저 나간다고 하던가]
실제로 WBC 출전을 두고 몇 몇 선수들은 신경전을 벌였다.
네가 나가야 나도 나간다는 건데,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서로 책임을 회피한 거 아닌가. 이인영은 진짜 실망스러운 건 미국의 경기력이 아니라는 소신을 밝혔다.
“WBC가 세계화가 되려면 선수들이 협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대회를 여는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네요.”
“그래도 우승 한 건 즐거우시죠?”
“네, 당연하죠. 솔직히 안 나와 줘서 고맙기도 합니다.”
리포터는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악마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 조만간 이 자리에서 또 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다만 메이저리그 구단의 눈도장을 받았다는 건 사실, 아직 포스팅 자격을 얻은 것도 아니지만 구단 관계자들은 계산기를 두들겼다.
■ 보장 금액이 2500만 달러 이하일 경우,
= 메이저리그 구단은 계약금의 20%를 원 소속팀에 지급한다.
■ 보장 금액이 5000만 달러 이하일 경우
= 메이저리그 구단은 계약금의 20% 그리고 2500만 달러 초과분의 17.5%를 원 소속팀에 지급한다.
■ 보장 금액이 5000만 달러 이상일 경우
= 초과분 조항 동일 적용
박혁이 지난 포스팅에서 LA 머린스가 제시한 계약서를 집어던진 전력이 있으니, 이제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KBO 선수들과의 계약에 신중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인영의 활약이 포스팅 신청 때까지 이어진다면 최소 5000만은 깔고 가야하는 계약, 도대체 얼마를 투자해야 하는 건가.
최소 5천 만 달러라고 가정하면 일단 MLB 구단은 2500만 달러의 20%인 500만 달러, 여기에 초과 금액인 2500만 달러의 17.5%에 해당하는 437만 5천 달러를 성운 라이온즈에 추가 지급해야 한다.
즉 5937만 5천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는 뜻, 계약총액이 5천만 달러를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보장금액이 6000만 달러라고 치면 2500만 달러의 20%, 초과 금액 2500만 달러의 17.5%, 그리고 2차 초과 금액인 1000만 달러의 15%를 합쳐 총 1087만 5000달러를 소속구단에 지급해야 한다.
총 7087만 5천 달러를 써야 이인영을 잡을 수 있다는 것, 판이 상당히 커진다.
이 도박에 뛰어들 구단은 과연 누구일지, 눈치게임은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