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솔직한 사람 (14)
한국 대표팀은 1회에 3점을 내며 순조롭게 출발, 생각보다 강한 저항에 놀란 미국 대표 팀은 추격의 고삐를 바짝 쥐었다.
“자, 이제 미국 대표팀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웨인 맥카비, LA 소속으로 작년 시즌 타율 0.271, 홈런 12개, 5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이젠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됐죠.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보다는 팬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박한우 위원은 견제에 들어갔다.
오미스턴은 5년 전만 해도 공수를 겸비한 중견수로 이름이 높았던 선수,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기록한 UZR 수치는 약 42로 메이저리그 전체 외야수 중 무려 5위 안에 들었다.
여기에 2할 8푼 이상의 타율, 20개 정도의 홈런, 도루까지 할 수 있는 다재다능의 표본, 하지만 장기 계약을 하자마자 사람이 달라졌다.
수비 능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작년 시즌 UZR 마이너스 12.4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지명타자도 없는 내셔널리그에서 고액 연봉자가 이런 수비 능력을 보여준다는 건 재앙.
여기에 지난 월드시리즈에서는 18타수 2안타, 10삼진이라는 답 없는 공격력을 보여주면서 LA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그런 선수가 미국의 우승을 위해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있으니, 아직 면죄부를 받지 못한 맥카비는 홈에서도 환대를 받지 못했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좌익수가 그 자리에서 잡아냅니다!! 원 아웃!! 이인영 선수가 타구를 처리합니다.”
“유치원생에게 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고 싶네요. 목에 마이크라도 달아 줄 걸 그랬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다시 언론 플레이를 벌였다.
작년 시즌, 이인영이 4할 도전에 나섰을 때, 맥카비는 SNS에 KBO는 유치원이냐는 조롱을 남겼다.
현대야구에서 4할 타자가 등장하다니, 한국야구는 투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 건가.
하지만 본인은 월드시리즈에서 끔찍한 활약으로 팀을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이제는 유치원생이라 비웃던 한국야구에게 뒤지고 있는 중, 할 말 많은 박한우 위원은 맛이 어떠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뿜어냈다.
다음 타자는 스캇 오미스턴, 초구에 체크 스윙을 돌린 오미스턴은 주심과 눈싸움을 벌였다.
누가 봐도 배트가 안 돌았는데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건지, 일단 눈빛으로 주의를 줬다.
‘그래 볼 받아라.’
결승전 주심을 맡은 제임스 카드웰은 다음 공에 볼을 줬다.
주심도 사람이라 가끔 실수를 하는데, 이런 때 할 수 있는 건 모른 척 하거나 보상판정을 주는 것, 할 말은 많았지만 오건무 포수는 그러려니 넘어갔다.
‘이걸 안 잡아 줘?’
마운드 위의 김성현(ST 위너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경기는 1회, 양 팀 모두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명확히 잡혔다고 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쳐도 이 공을 안 잡아준다면 대략 난감, 일단 내 공을 던지는 것만 집중했다.
‘생각보다 지저분한데.’
3구를 때려낸(파울) 오미스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성현은 요즘 보기 힘든 언더핸드 폼, 메이저리그에서 언더핸드 투수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패스트볼 무브먼트를 강조하는 리그, 언더핸드가 던지는 공이 지저분하다고 해 봤자 타자들이 못 칠 정도는 아니다.
타자를 상대할 때 장점보다 단점이 뚜렷한 폼, 다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선수들이 가끔 나온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 실제로 163km 싱커를 던지는 언더핸드 투수가 지금 미국 불펜에 앉아 있다.
언더핸드 투수에게 싱커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구질, 김성현도 싱커를 던질 줄 알지만, 두 가지 커브를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기술이 뛰어나다.
김성현은 한때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던 선수, 부상으로 때를 놓쳤지만 한때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았던 구위는 건재했다.
“떠오르는 공!! 따라 나옵니다!! 삼진!! 김성현 선수의 전매특허가 여기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김성현 선수가 지금 몸을 크게 틀었거든요. 여기에서 타이밍을 뺏긴 것 같습니다.”
여기에 특유의 디셉션 동작을 추가, 좀 웃픈 얘기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디셉션은 투수가 공을 잘 숨기거나, 릴리스 포인트에 혼동을 줘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릴리스 포인트를 자주 바꾸다보면 제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당연히 김성현도 공을 최대한 숨기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야, 넌 안 되겠다.”
“왜요?”
“몸이 너무 말랐어. 공이 다 보인다고”
입단 당시, 김성현은 키 183cm에 몸무게는 77kg 밖에 안 됐다.
운동선수라기보다는 잘 빠진 일반인에 가까운 체형, 몸 뒤로 공을 숨기려는 동작을 추가해 보려 했는데 넌 왜 이렇게 말랐냐며 코치에게 핀잔만 들었다.
그래서 체중을 불려보려 했지만 살이 잘 찌지 않는 체형, 구종을 더 추가하고 디셉션은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는 쪽으로 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제구가 가끔 흔들린다는 평가를 받지만, 제대로 되는 날엔 공략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건 금방 들킬 잔재주에 불과, 다음 타자 케빈 레이를 상대로는 빠른 볼과 싱커를 주로 사용했다.
‘내게 다음 기회가 있을까.’
김성현은 불펜 투수처럼 전력을 다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설이 나왔을 때도, 날 선발로 평가하는 구단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불펜, 그래도 도전해 보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는데 인생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년에만 연봉 21억을 받는 KBO 스타가 됐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랄까.
KBO를 평정한 박혁도 잠시 쉬어가야 했던 메이저리그 도전기, 3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내게 재도전의 기회가 있을까.
고민을 할 바엔 공 하나라도 제대로 던지는 게 이득, 이를 악물고 구속을 끌어올렸다.
딱~!!
“파울입니다. 오~ 지금은 95마일이 나왔습니다.”
“김성현 선수가 언더핸드 폼이지만 가끔 사이드 암에 가깝게 팔을 올리거든요. 투구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선수라 구위만 받쳐준다면 괜찮습니다.”
바깥쪽 싱커에 헛스윙을 돌린 케빈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도대체 누굴 상대한 건가? 공 3개를 봤는데 다 다른 궤적, 생각보다 귀찮은 상대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둘이 같이 손잡고 메이저리그 가세요.”
공수교대에서 이인영은 박혁과 김성현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ST 위너스의 투타를 상징하는 두 선수, 나란히 사라져 준다면 라이온즈의 대권 도전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
그 속마음을 알고 있는 김성현은 어림없다며 맞받아쳤다.
“그럼 평생 계세요. 우물 안의 개구리로”
“어휴~ 저걸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냐?!!”
위협을 가하자 킥킥 거리며 도망치는 악당, 제대로 농락당한 콤비는 올해는 반드시 복수하자며 의기투합했다.
작년 시즌 라이온즈에게 막힌 대권 도전, 메이저리그 도전도 도전이지만 저 자식의 콧대를 꺾어놓는 게 먼저였다.
2회는 양 팀 모두 소득 없이 종료, 3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이 시작됐다.
“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에서 2루타, 득점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한국 타선의 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미국도 이젠 경계를 할 겁니다.”
이인영은 바깥쪽 초구를 골라냈다.
어린 나이에 타격 접근법이 성립된 선수, 이런 볼배합은 통하지 않는 건가. 경험 많은 조시 캠벨 포수는 어설픈 유인구는 포기했다.
따악~!!
“젠장!!”
타구를 확인한 패트릭 존슨은 마운드 위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바깥쪽으로 붙였는데 제대로 밀어 친 타구, 더 황당한 건 중견수 웨인 맥카비의 후속 플레이였다.
유격수에게 전달해도 충분했을 텐데 주자를 잡겠다고 던진 2루 송구, 이게 빠지면서 이인영은 3루까지 들어갔다.
‘고마워~ ♡.’
악마는 웨인 맥카비를 향해 하트 세리머니를 날렸다.
유치원생이라고 놀리더니 하는 짓은 한국의 스파이, 경기가 이렇게 쉽게 풀려도 되는 건가. 마음 한구석에서 괜한 걱정이 피어났다.
[따악~!!]
“그렇죠!! 그렇죠!!”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가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4대 0!! 한국 대표 팀이 점수 차를 더 벌리고 있습니다!! 이변의 연속!! 우승에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이변이 아니죠!! 이건 실력입니다!!”
박한우 위원의 주도 하에 한국 쪽 여론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잘 싸워주는 우리 선수들, 선발 김성현은 4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펼치며 경기를 지배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길거리 응원, 그 기운을 받았는지 한국은 4회 말까지 4대 0 리드를 지켰다.
이제 경기는 5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 이인영은 1사 주자 1루에서 바뀐 투수 채드 브래드먼을 상대했다.
싱커가 163km가 나온다는 그 선수, 얼마나 빠른지 한 번 보자는 의욕을 드러냈다.
‘마술?’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빠른 볼, 이 정도면 눈이 아니라 반사 신경에 의존해야 했다.
딱~!!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음 … 역시 구위가 좋네요. 그래도 위축되면 안 됩니다. 지금 부담을 느끼는 건 투수 쪽이에요.”
다음 공도 빠른 볼, 조금 감이 잡혔는지 커트해 냈다.
브래드먼의 장점은 100마일이 넘는 고속 싱커와 슬라이더 그리고 최고 98마일까지 나오는 스플리터, 구위만 보면 탈삼진형 투수지만 의외로 땅볼이 많다.
싱커 비율을 높이면서(63%) 일어난 현상, 다만 싱커를 제외한 나머지 구질은 물음표가 붙었다.
그만큼 떨어지는 탈삼진율과 높아진 피안타율, 이런 약점 때문에 큰 경기에 약한 면이 있는데 지난 9월에는 3경기 연속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 가능성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타격이 되고 있다는 건 안 좋은 신호, 포수는 바깥쪽으로 하나 빼자는 사인을 보냈지만 브래드먼은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주장했다.
그걸 넙죽 받아준 캠벨 포수, 덜 떨어진 스플리터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말려 들어왔다.
‘안녕~ 마중은 못 간다.’
맞는 순간 이인영은 배트를 그 자리에 내려놨다.
타구를 향해 잘 가라는 손 인사는 덤, 좌중간을 훌쩍 넘어가는 대형 홈런에 미국 벤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에 반해 발칵 뒤집힌 한국 벤치, 스코어는 이제 6대 0, 승리를 확신한 선수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도대체 이 자식은 뭐야?’
그 사이, 캠벨 포수는 3루를 지나 홈으로 들어오는 악마에게 길을 열어줬다.
덜 떨어졌다고 해도 98마일짜리 스플리터, 동양인 타자가 이런 스윙을 하는 게 말이 되나?
충격을 받은 건 브래드먼도 마찬가지, 그러건 말건 홈에 입성한 이인영은 김환희와 격한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야, 키가 안 닿잖아.”
너무 높이 들어 올린 팔, 김환희는 조금 내리라고 눈치를 줬지만 이인영은 하늘같은 선배의 헬멧을 툭 치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메이저리그 강속구 투수도 공략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선배건 말 건 눈에 봬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