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99화 (99/309)

99화. 솔직한 사람 (13)

“아직 정하지 못했다.”

처벌을 앞두고 여론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 사무국은 애매모호한 답으로 시간을 끌었다.

사실 이인영의 플레이는 규정만 보면 어긋난 게 없다.

①그라운드에 몸이 닿은 상태에서 슬라이딩을 해야 한다.

②손이나 발이 베이스를 닿는 범위에서 슬라이딩을 한다.

③슬라이딩 후 베이스에서 몸이 이탈해선 안 된다.

④야수의 송구를 방해하려는 의도로 슬라이딩 방향을 바꿔선 안 된다.

MLB의 슬라이딩 규정을 요약하면 대략 이 정도, 당시 상황을 따져 보면 아무 것도 어긴 게 없다.

오웬 디커슨 주심도 인터뷰를 통해 이인영에게 퇴장을 명령한 이유는 슬라이딩이 아니라, 유격수와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신체적 접촉 그리고 벤클을 유도한 격한 후속 대처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당시 한국 대표팀의 2루 진루가 인정된 것, 다만 이인영 본인이 스즈키 세이무라를 저격한 걸 인정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논란이 가중된 것뿐이다.

“처벌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사무국은 침묵을 택했다.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WBC 흥행에 필요한 도구,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 애매한 상황이다.

일본 여론은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규정상 문제가 없는 행동, 그래서 논의 중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우야무야 넘어가는 건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오빠, 나중에 혼날 줄 아세요]

이인영이 인연을 맺은 보육원의 아이들도 문제의 그 장면을 봤다.

태클은 축구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야구에서도 있었다니, 남자 아이들은 저런 기술이 있는 줄 몰랐다며 환호했지만 여자 아이들은 달랐다.

특히 평소 이인영을 친 오빠처럼 따랐던 혜진이는 경악, 잘못을 했으면 혼이 나야 한다며 경고했다.

“오빠는 잘못한 거 없어. 친구가 당했는데 갚아줘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사람을 다치게 한 건 잘못한 거예요.]

계속 되는 질책에 월드 스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얘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세상의 때에 너무 물든 건가.

이런 태도가 아이들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애들 상대로 이겨서 뭐 할 건가. 그냥 미안하다고 끝내기로 했다.

[오빠 정말 반성하고 있는 거예요?]

“어 … 응, 맞아. 반성하고 있어.”

[그런데 목소리가 반성하는 사람처럼 안 들려요.]

오늘따라 촉이 좋은 녀석, 찔리는 게 있는 이인영은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만은 솔직하지 못했던 행동,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야, 나중에 술 한 잔 하자.”

“됐어요.”

“왜 빼고 그래 인마.”

이 사건 이후 김환희는 후배를 알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본인은 고마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팀 전체를 위해 벌인 일이었다. 우리 팀에 위해를 가하면 누구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딱히 한 선수를 위해 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세요.”

“이 자식은 솔직하지 못하네.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러건 말건 자기 멋대로 사건을 해석하는 김환희, 더 부정해 봤자 피곤해질 것 같고,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뒀다.

[한국 대표팀, 역대 최강의 ‘적’과 마주한다]

한편, WBC 결승전을 앞두고 한국 여론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근 관계가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한미 관계, 미국은 최근 한국을 자극하는 일을 몇 가지 주도했다.

일단 첫 번째가 일본의 평화헌법 폐지를 지지한 것, 중국이 최근 팽창 정책을 실시하면서 미국은 일본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인도 - 베트남 - 대만 - 일본 - 한국으로 이어지는 포위망을 형성해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 중국이 이번 WBC 예선을 대만에서 개최한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미국의 대외전략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을 봉쇄하는데 왜 일본을 무장시켜 줘?’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물론 한국은 미국 뜻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일본이 한국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미국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도 예전부터 일본과 한국의 화해를 주선했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미뤄진 것,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평화 헌법 폐지를 입에 담자 최근 한국에선 반미 시위까지 일어났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게 미국의 방위비 인상 압박, 악재가 연속으로 터져 나오면서 어느 기자는 기사에서 미국을 ‘적’으로 규정했다.

어째 이번 WBC 결승전을 한일전의 연장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 선수들은 애써 모른 척 했지만 현장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일본은 친구, 한국은 적]

[위대한 미국에 한국은 필요 없다]

한국 대표 팀이 훈련을 진행하던 중, 어느 팬이 사심이 적힌 표어를 흔들었다.

이곳은 훈련 시간 때도 팬들의 입장을 허용하는데, 좋아하는 선수를 가까이서 지켜보거나 응원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정책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눈살 찌푸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 법, 선수들이 무시하자 문제의 팬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발을 이어갔다.

“저거 그냥 놔둘 겁니까?”

보다 못한 코치가 문제를 제기하자 안전 요원들은 남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스포츠에 정치적인 요소가 안 섞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씁쓸한 장면,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훈련에 집중했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2021 WBC 결승전이 열리는 LA 머린스 파크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이인호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이인호 위원님”

“예”

“한국 대표 팀이 세계 정상 도전을 앞두고 있는데, 오늘 경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글쎄요. 일단 객관적인 전력에서 저희가 앞선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죠.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근성을 발휘한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인호는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MLB 사무국 커미셔너를 맡고 있는 윌리엄 프레슬러는 야구 세계화를 위해 어느 때보나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세계 각지에 야구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이전까지 WBC 참가에 소극적이었던 스타 선수들을 설득해 실제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난 2017 WBC 우승, NBA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전까지는 올림픽에 스타 선수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었던 편, 그러다 슈퍼 스타급 선수들로 선수를 꾸린 드림팀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상업적 수익까지 이뤄내자 NBA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야구도 지금 그 전철을 밟고 있는 중, WBC가 세계화에 성공하고 수익까지 낸다면 사무국이 올림픽에 스타 선수들을 내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되면 야구 강국으로 소문난 다른 나라들도 메이저리그 급 선수들을 앞세우고 올림픽에 출전하겠지.

일본이 야구 대표 팀을 브랜드화 한 건 우연일까?

MLB 사무국도 큰 그림을 그리고 대회를 개최하는 중, 이번 대회에서도 거물급 선수들이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대회에 참가했다.

그만큼 강화된 미국 대표 팀의 전력, 이름 값만 따져 봤을 때 한국이 불리한 건 당연했다.

“박한우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 한국 대표 팀이 승리할 거라고 믿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한국의 승리를 공언했다.

WBC는 MLB 사무국이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 벌인 사업장, 이 무대에서 자국 팀이 우승하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세계적인 입지를 세우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그런데 한국 야구가 여기서 승리를 거둔다?

말 그대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겨가는 꼴,

미국이 하는 짓이 요즘 꼴 보기 싫은 것도 있고 여기서 선수들이 한방 먹여주길 바랐다.

“와아아~!!”

“대~ 한!! 민!! 국!!”

“필!! 승!! 불!! 패!!”

경기장을 찾은 한인 팬들도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고, 이런 저런 복잡한 이해관계가 엮인 결승전이 시작됐다.

“자!! 대한민국의 1회 초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김환희 선수!! 이번 WBC에서 32타수 11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모난 점 없이 꾸준하죠. 자신이 있다면 적극적인 타격도 필요합니다.”

미국은 이날 패트릭 존슨을 선발로 내세웠다.

애리조나 소속으로 작년 시즌 14승 12패,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한 수준급 선발, 하지만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진짜 실력자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상대가 한국이라면 괜찮겠지, 미국 대표 팀 감독 데이빗 토마스는 호투를 의심하지 않았다.

따악~!!

“응?”

그런데 초구를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 낸 김 뭐시기 하는 선수,

토마스 감독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음 타자가 그 유명한 악마라 등골이 살짝 서늘해 졌다.

“와아아아~!!”

“우우우~ 우~ ”

환호와 함성이 절묘하게 뒤섞인 반응, 하지만 악마는 표정 없는 얼굴로 초구를 기다렸다.

“초구는!!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패트릭 선수가 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 간간히 싱커를 구사하는데요. 삼진을 잡는 능력도 있지만, 땅볼 유도 능력이 좋습니다. 지금 던진 체인지업으로 땅볼을 유도하는데, 하나 지켜보는 건 괜찮습니다.”

미국 배터리는 바깥쪽 빠지는 볼로 스윙을 유도했다.

패트릭은 좌완에 공에 사이드 스핀을 걸어주는 투수, 좌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던진 공은 커터처럼 흘러나간다.

이 특유의 휘는 궤적도 땅볼을 유도하는데 일조, 하지만 연구를 충분히 한 이인영은 낚이지 않았다.

‘우연인가?’

미국 대표팀의 포수 조시 캠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하지 않은 좌완 선발, 특히 좌타자라면 패트릭의 공에 선구안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침착하게 볼을 고르는 타자, 다시 한 번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따악~!!

‘엇?!!.’

1루 쪽 강습 타구, 깜짝 놀란 김환희는 폴짝 뛰며 타구를 피했다.

내야를 빠져 나간 타구는 펜스까지 굴러갔고 그 사이 김환희는 3루까지 진출, 이인영도 불이 붙은 엔진을 2루 앞에서 식혔다.

작년 시즌 땅볼 유도율이 52%나 됐던 패트릭의 체인지업을 이렇게 통타하다니, 미국 벤치는 물론 관중석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안타 하나면 2대 0,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 대표 팀은 압박수비를 펼쳤지만 후속타자 박혁은 보란 듯이 타구를 걷어 올렸다.

따악~!!

“다시 한 번!! 낮은 공을 걷어 올립니다!!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박혁 선수의 적시타!! 대한민국이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우리 선수들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한인 팬들이 들어찬 좌측 외야석은 승리를 외치는 환호로 들썩였다.

정말 이러다 우승까지 하는 거 아닐까, 다들 이런 저런 꿈에 사로잡힌 동안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생각보다 칠만 했어.’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수라고 해서 살짝 긴장했는데 의외로 칠만한 수준,

다른 투수들의 변화구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공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