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97화 (97/309)

97화. 솔직한 사람 (11)

“자, 이제 일본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타석에는 미야모토 신지, 이번 대회에서 27타수 9안타, 홈런 없이 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가 작년에 홈런은 5개 밖에 없었지만 2루타와 3루타를 합친 게 37개였거든요. 갭 파워가 좋기 때문에 방심해선 안 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스윙이 터져 나왔다.

3루 베이스를 맞고 튀는 안타, 좌익수 이인영은 최대한 빨리 타구를 처리했지만 주자의 2루 진출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

순식간에 득점권, 2대 0으로 앞서고 있다고 약간 늘어져 있던 한국 벤치 분위기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다음 타자 이미오카 츠요시가 2루 쪽으로 느린 땅볼을 굴리면서 1사 주자 3루, 신명철 감독은 서범윤(ST 위너스) 포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서범윤은 작년 시즌 타율 0.267, 홈런을 15개나 기록할 정도로 공격력에서 두각을 드러낸 포수다. 문제는 수비, 그동안 포수 마스크를 썼던 오건무는 오늘 무릎 통증으로 경기에서 빠졌다.

주자가 3루에 있으니 블로킹에 집중해야 할 텐데 어쩌자고 엉덩이를 저렇게 높이 든 건지, 약간 불안했다.

“자, 스즈키 세이무라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대회에서 타율 0.357, 홈런 2개, 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터리는 분명 바깥쪽으로 던질 거란 말이죠. 타자도 이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제구가 필요합니다.”

예상대로 바깥쪽 깊은 볼,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주지 않았다.

너무 바깥쪽으로 빠져 앉은 포수, 뭐가 문제인지 알고 있던 서범윤은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2구는 슬라이더,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휘었지만 포수가 제대로 블로킹을 못하면서 옆으로 튀고 말았다.

그 사이 홈으로 파고드는 미야모토 신지, 이렇게 일본은 한 점을 따라붙었다.

‘기본을 모르네 기본을.’

신명철 감독은 인상을 구겼다.

포수는 저 자리에 앉는 순간,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감싸 안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공을 막는 게 아니라 내 몸으로 덮어버려야 하는데 신명철은 그게 아니다. 그냥 서 있는 벽과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온 몸으로 막아내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국가 대표 급 선수에게 이 자리에서 잔소리를 하는 것도 웃긴 일, 일단 지켜봤다.

다행히 일본의 1회 말 공격은 1득점으로 종료, 양 팀 모두 2회는 별 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자, 이제 한국의 3회 초 공격으로 넘어갑니다. 선두 타자는 전인규 선수, 오늘 첫 타석입니다.”

“여기서 출루가 되면 김환희 - 이인영 - 박혁 선수로 이어지거든요. 대량득점의 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인규는 평소보다 타격 위치를 뒤쪽으로 수정했다.

볼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보겠다는 뜻, 스윙 궤적이 큰 선수가 아니라 타격 도중 포수를 가격할 위험은 높지 않았다.

‘엇?’

그런데 여기서 배트와 포수 미트의 접촉이 일어났다.

빠른 볼이 떨어지기 전에 잡아내려고 했는데 포수가 팔을 뻗으면서 본의 아니게 타격 방해가 된 것, 전인규는 그렇게 1루로 걸어 나갔다.

배트 박스를 벗어난 게 아니라 뭐라고 할 순 없는 상황, 일본의 감독 텟페이 요시미치는 일단 항의는 하지 않았다.

신명철 감독은 보내기 번트 없이 강공을 지시, 김환희는 2구를 힘껏 밀어 쳤지만 2루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빈 틈 없이 이뤄지는 유격수의 2루 커버, 하지만 전력 질주한 김환희는 2루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다음 타자는 좌타 이인영, 신명철 감독은 김환희에게 뛸 수 있으면 뛰라는 사인을 보냈다.

좌타자가 타석에 섰으니 포수 입장에선 1주자를 볼 수가 없다. 사인도 벤치에서 줘야하고 송구를 하려면 옆으로 빠져 앉아야 하는 불리한 상황, 이인영도 타구를 좌중간으로 보낸다는 생각으로 자세를 잡았다.

“너는 홈런을 칠 것이다. 보인다~ 보여~ 내 눈에는 보인다~”

이때, 신명철 감독은 주문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안타는 잘 쳐주는데 최근 홈런포가 없는 녀석, 선수들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제 뭐 잘못 드신 건가, 하지만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고 그걸 받아줄 사람도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다시 바깥쪽!! 뛰었습니다!!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 김환희 선수가 도루에 송구합니다.”

“와~ 그래도 지금은 위험했어요. 역시 송구가 벼락같네요.”

박한우 위원은 숨을 크게 골랐다.

일본의 주전 포수 스즈키 덴지로의 송구 속도는 겨우 0.68초에 불과하다.

메이저리그 평균이 0.73초라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능력, 살긴 했지만 김환희는 2루 베이스를 끌어안으며 숨을 골랐다.

이 정도면 여유 있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랐던 송구, 이 짓도 다음엔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홈런을 칠 것이다. 보인다~ 보여~”

또 시작된 신명철 감독의 넋두리,

선수들은 저 사람 왜 저러나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러건 말건 신명철 감독은 월드스타를 향한 믿음을 드러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1루가 비어있지만 다음 타자가 박혁 선수거든요. 앞 선 타석에서 큰 타구를 날렸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선 여기서 거르는 것도 부담스러울 겁니다.”

마운드 위의 아사노는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킹 능력이 뛰어난 스즈키 포수가 벽을 쳐 주고 있는데, 내가 지금 바운드 볼을 두려워 할 때인가. 볼이 되도 무조건 낮게 던졌다.

‘이러면 진루 못하지.’

3구는 바운드 볼이 됐지만 주자는 움직이지 못했고, 신명철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구 할 때 몸이 앞으로 기우는 스즈키 포수, 이때 글러브로 다리 사이를 막으면서 머리도 같이 숙인다.

공이 뒤로 빠지는 공간을 완전히 차단한 것, 공이 바닥을 맞고 튀어도 머리를 숙였기 때문에 공이 머리 위로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 메이저리그는 투수들이 워낙 빠른 볼을 많이 던지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수비보다는 내야수처럼 옆으로 몸을 날리는 동작이 더 눈에 띈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 포수들이 스즈키처럼 기본적인 수비 동작을 못하는 걸까? 당연히 할 줄 안다.

그런데 우리나라 포수들은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 경기는 앞서고 있지만 신명철 감독은 전체적인 기본기는 역시 일본이 한 수 위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 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게임, 그래서 이인영이 여기서 한 방 날려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다음 기회를 이용해 주세요.’

쓰리 볼에서 공을 지켜본 이인영은 보호대를 풀면서 1루로 향했다.

다음 타자는 박혁, 일본 내야진은 적극적인 압박수비를 펼쳤다. 잘못 굴리면 병살, 그래도 박혁은 자기 스윙을 했다.

따악~!!

“아~!! 이게!!”

제대로 쳤지만 좌익수 정면으로 간 타구, 박혁은 하늘을 향해 짙은 아쉬움을 쏟아냈고 신명철 감독도 눈을 질끈 감았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아사노, 일본 배터리는 철저한 낮은 제구로 다음 타자 도민호를 잡아내며 3회를 마무리 했다.

스즈키 포수의 블로킹 능력 덕분에 가능했던 볼 배합, 위기를 넘긴 일본은 바로 반격에 나섰다.

따악~!!

“와아아~!!”

3회 말 일본의 공격, 선두 타자 츠고이 요시모토의 안타가 터졌다.

일장기를 휘두르고 응원 봉을 맞부딪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일본 팬들, 한국 내야진도 압박 수비를 펼쳤지만 후속타자까지 안타를 때려내며 무사 주자 1 - 3루 위기에 몰렸다.

“아~ 이게 뭔가요!! 공이 옆으로 튀었습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 들어오는 군요 … 일본이 2대 2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하아~ 이건 너무 아쉬운데요. 1회도 이랬는데 … 서범윤 선수의 수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네요.”

심지어 폭투가 나오면서 실점 헌납,

다행히 추가 실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신명철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서범윤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1회에도 블로킹을 못하면서 실점을 했는데 똑같은 장면을 반복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어?!! 쟤 하는 거 보면 느끼는 게 없어?!!”

신명철 감독은 대놓고 서범윤과 스즈키를 비교했다.

스즈키는 뛰어난 포구 능력으로 일본의 실점을 최소화 하고 있는데 우리 팀 선수는 오히려 실점을 헌납하고 있으니, 마지막 잔소리를 퍼부었다.

“기본이야!! 기본!! 다른 거 생각하지 말라고!!”

서범윤은 일단 알았다고 답하고 자기자리로 갔다.

대놓고 사람을 비교질 하는 건 뭔가.

하지만 스즈키가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건 사실, 프로세계에서도 자극과 발전은 중요하다.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평생 실력은 정체될 뿐, 스즈키 포수의 자세를 보고 고민을 거듭했다.

“야, 내가 저거보다 자세가 낮냐?”

“글쎄, 내가 보기엔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서범윤은 자존심을 버리고 동료 선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운 법, 이때 이인영이 불쑥 치고 들었다.

“저 선수 자세가 더 좋아요.”

“ …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선배는 수비할 때 이렇게 하잖아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 성형을 했는데 얼굴이 다 따로 노는 느낌?”

글러브를 다리 사이로 내리면서 머리도 같이 숙여야 하는데, 서범윤은 이 동작이 따로따로 논다.

거기다 스즈키는 공을 향해 달려들 정도로 적극적인 편이지만 서범윤은 공을 기다리는 느낌, 기본기도 공을 향한 적극성도 차이가 난다고 평가했다.

진짜 배려가 없는 자식, 기분은 나쁜데 사실이라 할 말은 없었다.

“야, 그거 아냐?”

“뭐가요?”

“아까부터 감독님이 너 홈런 칠거라고 계속 중얼거렸어.”

“정말요?”

“그래, 너는 홈런을 칠 것이다~ 보인다~ 보여~ 내 눈에는 보인다~ 이렇게”

이어지는 김환희의 증언에 이인영은 시선을 감독 쪽으로 돌렸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동료들이 그렇다고 하니 맞겠지, 그렇게도 내 홈런을 바라는 걸까. 하지만 볼을 쳐서 홈런을 만들어낼 순 없는 법, 가능하면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홈런을 의식하진 않았다.

어쨌든 5회까지 양 팀은 2대 2 팽팽한 접전을 벌였고, 6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이 시작됐다.

“주문 안 외우세요?”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감독에게 농담을 건넸다.

나도 노력은 하겠지만 누군가가 응원을 해주면 효과가 배가 되지 않을까, 씩 웃던 신명철 감독은 넌 홈런을 칠 거라며 기를 불어 넣어줬다.

“자!!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안타와 볼넷 하나, 전 타석 출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여기서 투수를 바꾸네요. 무라사메 선수가 올라옵니다.”

일본의 텟페이 감독은 아사노를 내리고 무라사메를 투입했다.

지난 경기에서 이인영을 힘으로 이겨낸 무라사메,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건 승부를 피하지 않겠다는 뜻, 이인영은 내가 원하던 바라는 미소를 드러냈다.

초구는 빠른 볼 사인, 투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인영도 풀었던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