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솔직한 사람 (10)
“오늘 고생 많이 했다. 남은 경기도 잘 해보자.”
“예!! 위하여~!!”
푸에르토리코 전이 끝나고 한국 선수들은 준결승전 진출 기념 회식을 했다.
호텔에서 먹는 밥도 맛있지만 한국에서 공수한 김치와 삼겹살, 목살 등으로 거하게 판을 벌인 자리, 주미 한국대사관도 자리에 참석해 선수들을 위한 연회 품을 전달했다.
‘이거 맛이 왜 이래?’
누가 오든 말든 월드 스타는 식사 삼매경, 그런데 한 입 먹더니 눈치를 살피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거 맛있어요?”
“왜?”
“좀 질긴 것 같아서요.”
선수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냥 먹을 것이지 일일이 까다롭게 구는 녀석, 김환희는 저 자식은 꼭 시어머니처럼 군다며 핀잔을 줬다.
“제가 구울게요.”
“야 됐어. 내가 할 거야.”
“아~ 제가 한다니까요.”
이인영은 끝내 불판 위의 절대권력 집개를 손에 쥐었다.
별 것도 아닌데 사내들은 소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종족, 집개를 빼앗긴 김환희는 심드렁한 얼굴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야, 그거 덜 익은 거야.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먹어야 되는 거 몰라?”
“이때가 딱 좋은 거예요. 선배님은 뭘 모르시네.”
마지막까지 선배를 이겨 먹는 녀석, 그런데 이인영이 구운 고기를 먹어본 동료들은 이게 낫다며 맞장구를 쳐줬다.
“야, 넌 고기 잘 굽는다?”
“그럼요. 집에서 먹을 땐 제가 다 해요.”
“아빠가 안 굽니?”
“고기를 잘 못 구우세요. 엄마는 왜 이런 걸 집에서 먹느냐고 옆에서 뭐라고 하시고요.”
선수들은 재미있다며 킥킥 거렸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다 털어놓는 건지, 김환희는 그 옆에서 말없이 맥주 한잔을 들이켰다.
“어떠세요?”
“아직 안 먹었어.”
“에이~ 아까 드시는 거 봤는데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시네. 그냥 맛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다시 터진 동료들의 웃음, 김환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저 자식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되는데 매번 흔들리고 있다. 뭔가 반격할 카드가 없을까. 고민 끝에 뭔가를 떠올렸다.
“야, 너 만나는 여자 없지?”
“왜요?”
“얘 어떠냐?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후배인데”
휴대폰 속의 사진을 확인한 선수들은 물건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한 눈에 봐도 스타일 좋고 거기다 올해 24살, 나이가 이인영보다 3살 많긴 한데, 다들 만나보라며 타오르는 불판에 부채질을 했다.
“글쎄요. 딱히 별 느낌이 없는데… ”
하지만 월드 스타는 시큰둥한 표정, 이 정도 여자를 두고도 관심이 없는 건가. 김환희는 넌 무슨 꿈속의 선녀를 찾고 있는 거냐며 반격했다.
“아니요. 너무 따지는 게 아니라 지금은 야구 하는 게 재미있어요.”
“이 정도 여자도 눈에 안 들어온다고?”
“글쎄요. 딱히 야구보다 매력적이라는 느낌은 안 들어요.”
동료들은 이거 큰 일 났다며 혀를 내둘렀다.
여자랑 사랑에 빠질 나이에 야구와 사랑에 빠졌으니, 이러다 나중에 노총각으로 남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성공하면 여자는 알아서 따라 붙을 거라며 여유를 부렸다.
“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
“저 좋다고 전화하는 여자 있어요.”
“야, 너 아까 만나는 여자 없다며?”
“사귀는 건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한 마디도 안 지는 자식, 자존심이 상한 김환희는 앞으로 너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는 일은 없을 거라며 큰소리를 쳤다.
[오빠 파이팅]
[나중에 오면 같이 축구해요]
연회가 끝나고 이인영은 이불 속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응원 메시지를 확인했다. 별로 잘 해준 것 같지도 않은데 날 친형처럼 생각해주는 녀석들, 조만간 만나자는 답장을 주고 잠을 청했다.
‘잠이 안 온다.’
그런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따라 귀에 거슬리는 심장소리, 연회에서 술을 거하게 마신 동료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어서 방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보면 괜찮은 사람이었지?’
그렇게 얼마를 혼자 배회했을까, 문득 김환희 선배가 보여준 사진 속의 여성이 떠올랐다.
다만 나보다 나이가 3살이나 많다는 게 문제, 하지만 요즘은 그런 걸 따지는 시대는 아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에게 비밀이지만 이인영은 어린 시절 친척 누나 뒤를 졸졸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누나가 집에 가는 게 너무 싫어서 자고 가라고 매달렸던 어린 시절, 그리고 생각해보면 날 꼭 안아준 누나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해서 애 하나 낳고 잘 살고 있는 누나, 누나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이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자신의 취향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래, 누나 같은 사람도 좋지, 사람은 솔직해야 행복한 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소개시켜달라고 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일, 그리고 야구보다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연애인가 야구인가, 답은 쉽게 결정됐다.
따악~!!
다음 날 오후 1시, 신명철 감독은 대표 팀 훈련을 지도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일본, 전에 당한 7대 0 패배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국민 여러분들도 원하는 설욕전, 신명철 감독은 기자들 앞에서 필승을 다짐했다.
“지난 경기에서 대패를 당했는데, 어떻게 대비를 하실 겁니까?”
“그때는 공격의 흐름이 끊긴데다 투수진이 일찍 무너지면서 선수들이 투지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푸에르토리코 전에서 확인하셨겠지만, 타순을 조정하면서 대표 팀의 공격의 흐름이 매끄러워졌습니다. 초반에 기세를 잡는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키워드는 타선에 있다는 뜻, 기자들은 타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이인영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글쎄요. 승부에 100%는 없는 거죠.”
필승을 요구하는 기자들 앞에서 이인영은 솔직한 답을 늘어놨다.
매번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다만 프로라면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법, 최선은 다 하겠지만 필승을 장담하진 않았다.
“빈말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해주시죠.”
“지키지 못 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가 지면 팬 여러분들이 받을 상처만 더 커질 뿐이죠.”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솔직한 사람, 기자들은 월드 스타를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6시, 머린스 파크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의 준결승전이 시작됐다.
지난 경기에서 한국을 대패한 일본, 일본 여론은 이번에도 문제없다며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그 이면엔 패배의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푸에르토리코는 절대 약한 팀이 아니다.
그 팀을 무려 10대 3으로 대파했다니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 일본의 수장 텟페이 요시미츠는 특히 이인영을 경계했다.
푸에르토리코 전에서 3루타 2개 포함 4안타, 4타점을 기록한 선수, 거기다 2번으로 승격됐으니 상대팀 입장에선 더 많이 상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인영의 기세를 꺾으려면 1번 타자 김환희를 묶는 게 우선, 지난 경기에서 일본의 선발 아사노는 김환희를 완벽히 봉쇄했다.
출루가 안 된다면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나, 하지만 한국 대표 팀도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나왔다.
“자, 1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김환희 선수, 이번 대회에서 27타수 10안타, 홈런 없이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환희 선수가 지난 경기에서 아사노 선수에게 완벽히 막혔거든요. 이번 경기에선 어떻게 대응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김환희는 아사노와 눈빛을 마주하며 자세를 잡았다.
투수의 직구 무브먼트는 스핀 방향에 따라 결정 된다. 공 옆을 챈다면 커터처럼 옆으로 흘러나가고, 백스핀을 먹이면 똑바로 날아오지만 회전수에 따라 가라앉는 정도에 차이가 생긴다.
아사노의 빠른 볼 평균 회전수는 2100회 정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거기다 공이 약간 가라앉는 편, 구속은 빠르지만 구위가 좋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낮은 제구가 반드시 동반 돼야 한다.
지난 맞대결에서 아사노는 그게 잘 된 편, 조금 높게 들어온다면 못 칠 이유가 없었다.
“초구는 높게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아사노 선수는 높게 제구가 되면 위험합니다. 한국 대표 팀에겐 긍정적인 신호네요.”
2구는 너무 낮게 깔리면서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일본 벤치에서 보내는 사인은 복잡해졌다.
따악~!!
“됐어!!”
투 볼에서 과감하게 돌린 방망이, 154km나 되는 공이었지만 김환희는 좌익수 옆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다음 타석은 월드 스타,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목소리는 한껏 높아졌다.
‘그래, 칠만 하다니까.’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석에 들어섰다.
절대 못 칠 공이 아닌데 지난 경기는 낮게 깔리는 공에 너무 끌려 다닌 타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따악~!!
“낮은 공을 걷어 올립니다!! 계속 가는 타구!! 우익수 키를 넘어갑니다!! 김환희 선수는 2루를 지나 3루!! 아~ 여기서 멈추나요?!! 이인영 선수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무사 주자 2 - 3루!! 대한민국이 좋은 기회를 잡습니다!!”
“이인영 선수는 진짜 천적이네요.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아사노 선수에게 홈런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도 2안타, 이 정도면 천적 맞는 겁니다.”
“스윙이 레벨 스윙에 약간 어퍼를 가미한 궤적이거든요. 아사노 선수의 빠른 볼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라 걸리면 용서 없습니다.”
아사노는 로진 팩을 털어낸 손으로 캡을 바로잡았다.
지난 경기와는 너무 다른 흐름, 여기에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삼는 투구 패턴도 문제였다.
예전처럼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다면 빠른 볼에 사이드 스핀을 걸어주면서 공이 옆으로 휘는 움직임을 좀 더 살려줬을 거다.
하지만 일본 코치들은 그런 궤적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게 문제, 일본 야구에서 빠른 볼은 똑바로 가는 게 정석이다.
이렇게 공을 던져도 구위가 좋다면 높게 던져 카운트를 잡고 스플리터를 떨어뜨려 삼진을 잡으면 된다.
하지만 아사노는 빠른 볼이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는 게 문제, 이런 공을 높게 던진다고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낮게 제구가 되지 않으면 공략 당한다는 게 이번 경기에서도 드러났다.
따악~!!
“다시 한 번 멀리 가는 타구!! 좌익수!! 좌익수가!! 잡아냅니다. 3루 주자는 태그 업!! 김환희 선수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선취점!! 대한민국이 먼저 앞서 나갑니다!!”
“아웃은 됐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플라이 볼을 날린 박혁은 외야를 바라보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넘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잡혀버린 타구,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게 없다보니 아쉬움은 더 컸다.
후속 타선의 활약으로 한국은 한 점을 더 추가, 홈을 밟은 이인영은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칠 만 하죠?”
“응”
“그런데 왜 못 치셨을까? 이상하네.”
월드스타는 여기서 화끈한 불장난을 저질렀다.
칠만한 공이었는데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난 박혁, 잘 좀 해보라고 놀렸는데 발끈한 선배는 저리 가라는 수건 패대기를 날렸다.
‘어휴~ 저걸 그냥….’
그렇잖아도 올 시즌 홈런왕을 두고 대결을 치르게 될 사이, 이쯤 되면 일부러 도발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른이 어린애 상대로 욱해봤자 추해질 뿐, 어디 두고 보자는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