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95화 (95/309)

95화. 솔직한 사람 (9)

‘직접 보니 신기하네.’

할 거 다 한 이인영은 곁눈질로 옆에 있는 선수를 살폈다.

푸에르토리코의 3루수 호세 트리니다드, 휴스턴에서 8년 동안 풀타임 메이저리그로 뛰고 있다.

지난 2017년 WBC에선 미국 대표로 뛰었던 선수, 그런데 올해는 푸에르토리코 선수로 출전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푸에르토리코는 미국 영토지만 미국의 어느 주에도 편입되지 않은 애매한 입장에 놓여있다. 미국의 속령이지만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수반을 선출한다는 것도 특이한 점, 미국 대통령은 임명장만 줄 뿐 실질적으로 간섭은 안 하고 있다.

그래도 태어난 아이들은 미국 시민권이 부여되는데, 당연히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라도 미국 대표 팀으로 뛸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까진 모르는 이인영은 호세에게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그래도 명색이 메이저리거인데 영어는 할 줄 알겠지, 하지만 그걸 못하니 벙어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공부 좀 해야겠다. 사람이 무식하면 정 떨어지지.’

경기 중 잡담은 금물이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가끔 보인다.

그것도 영어를 할 줄 알아야 가능한 일, 그 다음으로 먹히는 언어는 스페인어다.

특히 푸에르토리코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마이애미나 뉴욕에서 스페인어가 조금 먹어주는데, 어찌됐든 한국어는 미국에서 통하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실력만 있다고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어 공부도 따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중에 또 봅시다. 공부 좀 더하고 올 테니까.’

마침 후속 타자 박혁이 2루 쪽으로 느린 땅볼을 굴렸고, 이인영은 그대로 홈으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2대 0, 예상 외의 전개에 현지 중계진들은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아직 초반이지만 2회 연속 WBC 준우승을 거둔 푸에르토리코의 고전, 하지만 신명철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 팀이 방심할 입장은 못 됐다.

공격력만큼은 미국 대표 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푸에르토리코, 일본에게 대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만난 일도 없었을 거다.

잘 생각하면 일본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 불펜에 앉은 투수들도 언제 불려갈지 모르는 입장이라 긴장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자, 이제 푸에르토리코의 1회 말 반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알렉스 디안드레아, 작년 시즌 애틀랜타 소속으로 타율 0.303, 홈런 27개, 78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미국 국경을 수비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넓은 수비 범위와 화려한 송구를 자랑하죠. 그렇다고 타격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이인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선수 설명을 이어갔다.

1번 타자가 홈런 27개라니, 지금 한국대표 5번을 치고 있는 도민호가 작년 시즌 21개를 때렸다.

그만큼 막강한 푸에르토리코의 화력, 대표 팀이 앞서고 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다.

따악~!!

“밀어 친 타구가 좌측으로!! 계속 뻗어갑니다!! 좌익수!! 좌익수가!! 파울 지역에서 잡아냅니다!! 원 아웃!! 이인영 선수가 끈질긴 추격으로 타구를 낚아챕니다!!”

“국경수비대는 한국에도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에만 있는 거 아니죠.”

박한우 위원은 바로 옆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중계석을 의식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미국 국경? 그래 넓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알렉스는 유격수에서 좋은 수비를 보여주고 있지만 수비 범위로 따지면 외야수가 내야수보다 더 넓다.

빠른 발을 이용해 넓은 수비범위를 보여주는 양아들, 우리도 꿀릴 거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오네?’

2번 타자 바레아가 잡아당긴 타구, 이인영은 거의 그 자리에서 공을 잡아냈다.

타구가 외야로 계속 날아온다는 건 좋지 않은 신호, 2아웃이 됐지만 집중력을 유지했다.

“자 이제, 호세 트리니다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82, 홈런 31개, 104타점, 아메리칸 리그 홈런 공동 13위, 타점 12위를 기록했습니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작년 시즌이었죠. 야구에만 집중하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는 선수에요.”

호세는 SNS를 통해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선수, 그런데 가끔 자신을 비난하는 팬들과 설전을 벌이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넌 미국인이 아니야. 미국인인 척 연기하지 말라고]

=그래, 나도 다음 대회는 미국 대표로 나갈 생각 없어. 그런데 넌 뭘 할 수 있지? 난 미국이든 푸에르토리코든 할 권리가 있어. 하지만 넌 닥치고 주정부에 세금이나 내는 떨거지에 불과하지. 네가 죽어도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거야. 너 같은 떨거지는 이 세상에 차고 넘칠 만큼 많으니까.

지난 2017 WBC에서 호세는 대형 사고를 쳤다.

지역예선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경기, 미국에게 리드를 안기는 2점 홈런을 칠 때까지는 좋았는데 평범한 땅볼 타구를 놓치더니, 무리한 악송구까지 하면서 미국이 6대 4로 패배하는데 일조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우승은 한 미국, 하지만 호세는 대회 기간 동안 타율 0.154라는 끔찍한 성적을 남겼다.

잔루만 7개를 남긴 처참한 성적, 일부 팬들이 너 따위는 미국에 필요 없으니 다음 대회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뛰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그걸 일일이 상대하며 평판을 깎아 먹은 호세, 실력은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욱하는 성격 때문에 좋은 평가는 못 받고 있다.

그리고 이번 WBC에서 진짜 푸에르토리코를 선택, 유행이 지난 푸에르토리코 독립을 주장하는 무리수를 던졌다.

‘독립? 까짓 거 하라면 하라지.’

안티 팬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푸에르토리코는 박살난 경제 때문에 국민들이 알아서 미국의 일부가 되겠다며 난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푸에르토리코 편입을 원치 않는 분위기, 안티 팬들은 네 주제를 알라며 조롱을 늘어놨다.

그걸 또 이겨먹겠다고 달려드는 호세,

호세 안티 팬들은 푸에르토리코의 패배에 기대를 걸었다.

딱~!!

“초구 타격!! 유격수가 잡아서 1루에 송구합니다!! 1회 종료!! 대한민국이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합니다.”

“정말 고맙네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까다로운 타자였는데 성급한 타격으로 아웃을 당해주다니, 박한우 위원은 호세를 향해 땡큐를 연발하며 한국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극했다.

‘생각보다 상대할 만 한데?’

2회에도 한국 대표 팀은 푸에르토리코를 밀어붙였다.

2013, 2017 WBC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팀이라 바짝 긴장했는데 막상 상대해보니 별 거 아니다.

일본보다 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 자신감을 얻은 타자들은 적극적인 스윙으로 공격의 활로를 열었다.

따악~!!

“자!! 여기서 다시 한 번 안타가 나옵니다!! 전인규 선수의 적시타!!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4대 0까지 벌어집니다!!”

“이러면 초반에 승패가 갈릴 수도 있겠는데요. 우리 선수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됩니다.”

2아웃 주자 1 - 2루에서 김환희가 타석에 들어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푸에르토리코는 에두아르도 리베라로 투수를 교체, 김환희는 느린 땅볼로 주자들을 득점권에 몰아넣고 자기도 살아남았다.

국경수비대로 불리는 알렉스 디안드에라의 실책, 1사 주자 만루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와아아~!!!!”

보란 듯이 받아친 타구는 우중간을 완전히 갈랐다.

2아웃이라 맞는 순간 주자들은 모두 스타트, 3루 주자 - 2루 주자 - 1루 주자까지 모두 들어오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그 사이 이인영은 3루까지 진출, 연타석 3루타에 한인 팬들의 함성을 더욱 높아졌다.

[맙소사!! 나 이 친구가 좋아질 것 같아!!]

[여기서 주먹으로 저 자식 얼굴 한 대 쳐주면 더 좋겠는데]

호세 안티 팬들은 이인영의 활약에 열광했다.

사사건건 덤비던 호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준 한 방, 한국은 이제 7대 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뒤집기 어려운 점수 차, 경기가 끝난 후 호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됐어!!”

한편, 신명철 감독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 4타점을 올린 이인영,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 해줄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야구를 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이라도 제 자리를 찾았다면 다행, 어쨌든 리드를 지키기 위한 수 싸움에 돌입했다.

‘뭔가 잘못 됐는데’

한편, 호세는 현실을 직시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미국과의 결전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국에게 발목을 잡힐 순 없는 거 아닌가, 일단 옆에 있는 녀석에게 큰 소리를 쳤다.

“Don't let it get to your head. the last laugh is mine”

= 너무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니까.

견제를 위한 멘트, 하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월드스타는 헤헤 거리며 웃어넘겼다.

“쏘리, 아님 낫 스피크 잉글리시 배리 웰.”

넉살좋은 미소는 호세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우리는 이런 바보에게 끌려가는 경기를 하고 있는 건가, 흥분한 호세는 팀에 전혀 도움이 못 되는 플레이를 했다.

따악~!!

반면 이인영은 5회 초 공격에서도 안타를 추가하는 활약을 이어갔다.

첫 번째 타석은 바깥쪽 가운데, 두 번째 타석은 몸 쪽 약간 낮은 코스, 그리고 이번에는 높은 공, 모두 다른 코스를 던졌는데 다 쳐내고 있다.

상대 팀 입장에선 답이 없는 타격, 푸에르토리코의 감독 펠릭스 베르데호는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적이지만 훌륭하군.’

겉보기엔 레벨 스윙이지만 어퍼 스윙을 살짝 접목시킨 스윙,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약간 가라앉는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저런 스윙을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많은 안타를 생산할 수 있다.

적극적인 타격을 하지만 안타를 때려낸다는 건 공을 선구안도 갖췄다는 뜻, 낮은 공에 끌려 다니는 푸에르토리코 타자들보다 타격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따악~!!

“자!! 이 타구도 중견수 옆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 4타수 4안타!!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네요. 아? 여기서 교체하나요?”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겠죠. 신명철 감독이 승리를 확신한 것 같습니다.”

7회 초, 신명철 감독은 이인영을 불러들이고 대주자를 투입했다.

현재 스코어는 9대 1, 설마 푸에르토리코를 상대로 이런 여유를 부릴 줄이야. 상대 팀 입장에선 치욕이지만 한국 입장에선 이인영을 무리 시킬 이유가 없었다.

“잘 했어!!”

“여~ 월드 스타!!”

동료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후배를 격하게 반겨줬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는지 월드스타는 입맛을 다시면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지금 타격감이라면 어떤 공이 들어와도 쳐낼 자신이 있다. 지금 기세라면 9회에 한 번 더 타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려니 하고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이날 경기는 한국의 10대 3 완승으로 종료, 충격의 대패를 당한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은 눈물까지 흘렸다.

절대 상대를 얕보고 경기를 하진 않았다.

이기겠다는 의지는 있었는데 따라주지 않은 결과, 그 심정을 알고 있는 이인영은 경기가 끝난 후 푸에르토리코 진영을 향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패배는 했지만 상대팀은 마지막까지 경기를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좋은 승부를 해준 적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호의는 이것 뿐, 그래도 필요 이상의 동정은 베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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