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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일인자-94화 (94/309)

94화. 솔직한 사람 (8)

[한국 대표팀 캘리포니아 입성]

3월 17일, 한국 선수단은 결선 무대가 열리는 캘리포니아 공항에 입성했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메이저리거급 대우, 선수들은 호텔을 거쳐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사용하는 클럽하우스에 입성했다.

“우와~ 죽인다.”

이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땀 냄새 폴폴 나는 라커룸은 이제 KBO도 옛말이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그의 시설을 따라가려면 갈 길이 멀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 될지 누가 아나. 흑곰은 놀이공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선배!! 선배!! 여기 농구대도 있어요!!”

“야, 그만 좀 해라. 어린애도 아니고”

박혁은 얼른 이리 좀 와보라는 후배의 질책에 얼굴을 붉혔다.

현지 직원들도 보고 있는데 스물한 살이나 먹은 녀석이 저러고 있으니, 솔직히 부끄러웠다.

“아, 이리 좀 와 보라니까요. 선배가 걷어찬 놈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보라고요.”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에 선수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곳은 박혁에게 포스팅을 신청했던 LA 머린스의 홈구장, 아마 옵션이 덕지덕지 붙은 계약을 받아들였다면 박혁은 이곳에서 시즌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눈길이 안 가는 클럽하우스 시설, 그래도 내심 신경 쓰였던 게 사실이라 못 이기는 척 후배의 뒤를 밟았다.

“와~ 이게 다 뭐냐?”

“봐요. 상상 이상이죠?”

박혁은 말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대로 된 계약만 맺었다면 나도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 텐데, 하지만 날 노예계약으로 끌고 가려 했던 LA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약이 오르는 클럽하우스 풍경, 역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빅 마켓이라고 시설도 최고급이라 이건가.

보다보니 괜히 신경질이 났다.

“어때요? 잘 사는 꼴 보니까 짜증나죠?”

후배의 자극에 박혁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날 철저하게 가지고 놀려 했던 머린스, 얼마나 잘 나가나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는데 나 같은 중생 한 명이 저주를 퍼붓는다고 이런 공룡 구단이 흔들릴 일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보란 듯이 출세해야겠지, 다음 시즌에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헬로우? 익스큐즈 미?”

박혁이 쓰린 속을 달래는 동안, 이인영은 구단 직원을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영어가 부족해서 손짓발짓 다 해가며 또 다른 시설이 있느냐고 묻는 중, 적극적인 태도에 구단 직원은 친절한 미소로 답했다.

“그럼요, 당신이 본 건 클럽하우스의 일부분에 불과하죠. 이곳에 관심 있나요?”

“당연하죠. 저는 언젠간 이곳에 오는 게 꿈이니까요. 괜찮다면 좀 더 많은 곳을 소개해 줄 수 있나요?”

통역의 말을 받아든 구단직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메이저리그 클럽하우스, 감독 실, 코칭스태프 실, 구단 스태프실(클러비, 배트보이), 선수 라커룸이 모두 따로 있고, 여기에 식당, 비디오 분석 실, 실내 훈련장, 트레이너 실, 웨이트 트레이닝 룸, 세탁실, 농구대, 간이 오락실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말 그대로 테마 파크, 한동안 클럽하우스를 들쑤시고 다니던 어린 곰은 감독의 부름을 받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

“구경 좀 하고 왔어요.”

신명철 감독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는 이인영을 빤히 쳐다봤다.

이쪽은 다음 경기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라는 고민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저 녀석은 긴장감이라는 게 없는 건가.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그만뒀다.

‘나도 신경 쓰입니다. 화가 난다고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이인영도 나름의 방식으로 화를 다스렸다.

일본에게 7대 0 대패를 당했는데 속이 안 쓰린 게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뚱~ 하고 있어봤자 다음 경기에 좋을 게 없다.

그래서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분위기 전환을 해 본 것, 진지한 얼굴로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자네들도 알겠지만, 지난 경기에서 타선이 전혀 이어지질 못했어. 그래서 타순을 조금 변경하려고 하는데, 본인이 그 자리에서 뭘 해야 할지 생각을 해 봐.”

대대적인 타순 변경을 예고한 신명철 감독,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하고 박혁 선배 계속 중심 타자로 쓰실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린가?”

“테이블 세터를 잘 짜도 3, 4번에서 막히면 소용없잖아요.”

사실 일본전뿐만 아니라 지난 쿠바 전부터 한국 대표 팀은 타순의 연계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특히 심각한 건 박혁의 부진, 대만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5경기에서 18타수 2안타에 그치고 있다.

한국 여론도 언제까지 박혁을 4번에 둘 거냐며 난리를 치고 있는데 선수가 대놓고 문제를 제시한 것, 신명철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자네는 내 타순 배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제가 감독님이라면 절 2번으로 기용할 것 같습니다.”

작년 시즌, 이인영은 제법 많은 경기를 2번으로 출전했다.

거기다 포스트 시즌에서 홍현구가 부상을 당하자 임완수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타선을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성운 라이온즈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냥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이건 통계에서 증명된 일이다.

1) 2번 타자는 무사 주자 1루, 무사 주자 2루 기회를 다른 타자들보다 10% 정도 많이 맞이한다.

2) 병살을 칠 위험은 1번 타자에 비해 1.5배 정도 높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2번 타자는 의외로 찬스 상황에서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다만 병살 위험이 높은 게 단점, 그래서 많은 메이저리그 팀은 강한 타자를 2번에 배치한다.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2번에서 땅볼이 나오면 치명적, 한국은 선두 타자가 나가면 진루타에 집중하지만 통계를 봐도 장타를 치는 게 낫다.

작년 시즌 이인영의 순 장타율(IsoP)은 무려 0.267에 달했다.

한국이 초반에 기세를 잡겠다면 이인영을 2번에 기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나름 근거가 있는 주장에 신명철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자네 그런 자료는 어디서 구한 건가?”

“찾아봤죠. 전 언젠간 메이저리거가 될 선수니까 자기 위치는 알아서 파악해야죠.”

몇 몇 선수들은 웃음을 꾹 억눌렀다.

경기를 앞두고 다들 진지한 분위기로 임하고 있는데 저 녀석 때문에 다 엉망진창, 그래도 저런 자세가 부럽기도 했다.

상하관계가 뚜렷한 한국야구에서 선수가 감독에게 저런 말을 떳떳이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 아닌가. 거기다 그만한 말을 할 실력과 자격을 갖춘 녀석, 대놓고 비웃을 수가 없었다.

“자네 자리는 2번이다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 좋아, 한 번 믿어 보겠어.”

즉석에서 바뀐 타순, 이제 신명철 감독의 화살은 박혁에게 향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뭐가 말입니까?”

“자네 4번으로 기용하면 공격이 막힌다고 하잖아. 아무 생각 안 드나?”

그제야 박혁은 ‘아’라며 입을 뻐끔거렸다.

저 자식이 너무 당돌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굴욕, 자존심은 상하는데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한번만 더 믿어주시면 잘 할 자신 있습니다.”

“좋아, 이 녀석이 2번으로 갔으니까 3번은 자네가 쳐”

고심 끝에 재정비를 마친 타선, 훈련을 지휘하는 신명철 감독은 수비보다 죽어 버린 타격에 포커스를 맞췄다.

따악~!!

이인영은 예고대로 강한 타구를 날리는데 집중했다. 땅볼은 절대 안 될 일, 드라이브 타구에 집중했다.

“저 자식, 한국에서 55홈런 쳤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맞아”

“그런데 스윙이 왜 저래?”

먼저 훈련을 마친 푸에르토리코 대표 팀은 한국의 훈련을 관람했다.

듣자하니 스카우터들에게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스윙 스타일만 보면 거포와 거리가 멀었다.

“한국은 2루타도 홈런으로 쳐주는 거 아냐?”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구장이 작은 게 아닐까?”

푸에르토리코는 한국을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반면, 일본은 정말 강한 나라, 지난 2013년 WBC에서 푸에르토리코는 일본을 상대로 7회까지 2대 2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겨우 역전승을 거뒀다.

그 일본에게 7대 0으로 맥없이 당했다는 한국, WBC에서 2회 연속 준우승을 거친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는 인식은 변함없다.

이 쪽은 현역 메이저리거만 무려 10명, 방심은 하지 않겠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자!! 1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으로 결선 무대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김환희 선수, 이번 WBC에서 23타수 8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인규 선수가 9번으로 내려갔거든요. 잘 생각해보면 나름 이해가 되는 기용입니다.”

박한우 위원은 바뀐 타순을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9번으로 내려간 전인규는 작년 시즌 타율 0.334를 기록한 특급 리드오프, 다만 1년 차와 달리 치고 나가려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출루율은 0.391를 기록했다.

반면 김환희는 볼넷을 64개나 얻어내며 출루율 0.411을 기록, 그렇다고 전인규에 비해 타율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0.322).

이인영을 2번으로 올렸으니 둘 중 하나는 하위 타선에 배치해야겠지, 설명이 끝나자마자 김환희는 초구를 골라냈다.

푸에르토리코는 타선은 강하지만 투수력은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다.

방망이만 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신명철 감독은 3회 안에 승기를 잡아야 희망이 있다고 판단했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선두 타자 출루!! 김환희 선수가 오늘은 첫 타석부터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지난 일본전에서는 3타수 무안타에 그쳤거든요. 그래도 선구안이 좋고 컨택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슬럼프가 길지 않아요.”

지난 경기의 씁쓸함을 씻어내는 깨끗한 안타,

후속타자 이인영의 등장에 LA 한인 팬들은 격한 환대를 보냈다.

박혁이 온다는 소식에 들떴는데 결국 무산된 계약, 거기다 박혁은 메이저리그에 재진출해도 LA와 계약을 맺을 일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제 희망은 이인영, 여기서 화끈하게 한 방 쳐내고 LA 구단의 눈도장을 받길 기원했다.

‘정말 55홈런을 쳤을까?’

푸에르토리코의 선발 엘드릭 로드리게스는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이인영은 분명 경계해야 할 타자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생각보다 마른 몸매, 프로필을 봐도 키는 190인데 몸무게는 93kg 밖에 안 된다.

야구 선수는 보통 비시즌 기간에 몸무게가 불고 시즌에 맞춰 몸무게를 줄인다. 작년 시즌 이인영의 몸무게는 95kg, 그런데 올해 2kg을 또 감량했다는 건가.

하지만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위험한 법, 이인영도 다 생각을 하고 오프 시즌 동안 몸을 만들었다.

“바깥 쪽 볼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작년과는 조금 달라졌죠. 몸도 탄탄해 졌지만 타격 폼도 약간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좁은 스탠스로 시작을 하는데, 타격을 할 때 스탠스를 넓게 잡거든요. 예전처럼 하체를 많이 움직이는 건 아닌데, 발을 조금 더 뻗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따악~!!!

“타격!!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내달립니다!! 타자 주자는 어디까지?!!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 3루타!! 대한민국이 선취점을 냅니다!!”

“지금도 보세요.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파워를 끌어내거든요. 예전보다 하체를 더 활용한 스윙을 하고 있어요.”

타구를 때리자마자 이인영은 총알처럼 1루로 튀어나갔다.

육상선수의 스타트를 보는 것 같은 탄력, 장타는 확실한 타구였지만 우익수의 어깨를 생각하면 3루타는 조금 버거웠다.

한 순간에 베이스를 휩쓰는 모습은 날쌘 표범 그 자체, 이젠 곰이라는 별명은 집어 던질 때가 됐다.

‘잘 좀 찍어주세요.’

이인영은 더그아웃 옆에 자리를 잡은 카메라를 향해 슈퍼맨 세리머니를 날렸다.

미국 본토에서 선보인 첫 존재감,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 보여줄 건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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