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93화 (93/309)

93화. 솔직한 사람 (7)

“자, 오늘 일본은 아사노 아키사다를 선발 투수로 내보냅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28경기 등판, 15승 8패, 평균자책점 2.72, 168이닝 동안 볼넷 68개, 탈삼진은 189개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도쿄 올림픽을 보셨다면 기억하시겠죠. 한국전에서 등판했던 그 선수입니다.”

박한우 위원의 달리 아사노는 지난 도쿄 올림픽에 비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스플리터는 일본에서 프로라면 어느 투수나 기본적으로 던질 수 있는 구종, 하지만 많은 삼진만큼 많은 볼이 따라온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거기다 인위적으로 회전을 줄어야 떨어지는 폭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빠른 볼을 잘 던지는 아사노에겐 맞지 않는 구종, 차라리 슬라이더를 더 가다듬는 게 나았을 텐데 어설프게 구종을 추가하면서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건 저한테 안 맞는 거 같은데요.”

“그래도 계속 던져 봐라.”

아사노는 스플리터를 포기하고 슬라이더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코치는 계속 던져보라며 아사노를 설득, 후반기에 스플리터 영점이 잡히면서 성적을 대폭 끌어올렸다.

하지만 빠른 볼 구위가 하락했다는 게 문제, 평균 155km의 구속은 유지 됐지만 마지막까지 살아와 꽂히는 특유의 무브먼트가 죽어버렸다.

일본에서는 통하는 구위지만 세계에서는 어떨지, 아사노는 이번 WBC를 MLB 진출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섣불리 공격하진 마라.’

1회 초 한국의 공격, 전인규는 신명철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상대해 봤지만 아사노의 구위는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수준, 9이닝 당 볼넷이 3.6개가 넘는 선수라 제구력이 아주 좋다곤 할 수 없다.

차분하게 볼을 고르며 탐색전을 치르는 것도 필요, 일단 초구를 지켜봤다.

‘역시 빠르네.’

초구는 154km, 생각보다 낮게 들어오는 것도 까다롭다.

하지만 이건 의도적으로 낮게 제구 한 게 아니라 회전이 덜 걸려 약간 떨어지는 궤적을 그리는 것 뿐, 물론 아사노도 그걸 알고 있었다.

NPB에서는 먹혔던 전법, 한국 타자들이라고 다르겠는가.

거침없이 투구를 이어갔다.

딱~!

“아, 떨어지는 군요. 유격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공이 빠르고 낮게 날아오기 때문에 히팅 포인트가 뒤에서 형성되면 좋을 게 없거든요. 조금 더 앞에서 때려낸 필요가 있습니다.”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후속 타자 김환희는 낮은 공을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팔이 몸에서 떨어지면서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고, 한국의 테이블 세터진은 별 성과 없이 물러났다.

[レフト(좌익수), 李 ‧ 仁 ‧ 永]

“우우~ 우~ ”

다음 타자는 바로 그 녀석, 관중석을 가득 채운 팬들은 격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저 자식, 그때보다 실력이 떨어진 것 같은데’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본 월드 스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구속이라도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는 공은 더 앞에서 때려내야 된다. 그런데 이렇게 떨어지는 공이라면 조금 여유가 있는 편, 2구는 골라냈다.

“3구, 이번에도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스플리터인데, 144km가 나왔거든요. 어지간하면 배트가 따라 나왔을 텐데 여유가 있어요.”

공을 받아든 아사나노는 마른 침을 삼켰다.

NPB에선 이 정도 공을 보여주면 어지간한 타자들은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그런데 이걸 골라내다니,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재확인 했다.

따악~!!

4구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외야 파울지역에 처박혔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월드 스타는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했다.

국내에선 게스 히팅을 자주 했지만 최근 이게 좋은 접근법이 아니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인영은 인위적으로 타구를 띄우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런 선수가 장타를 때리려면 히팅 포인트의 전진, 그리고 빠른 카운트의 타격이 필요, 하지만 이인영의 타격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좌중간을 노리는 타격을 즐겨 했고 초구 공략 비율은 28%로 평균 수준, 실제로 밀어치는 타격이 제대로 안 되면서 홈런포가 죽은 적도 있다.

그래서 히팅 포인트를 조금 앞당겼더니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한 홈런 포, 포스트 시즌에서도 이 전략으로 효과를 봤다.

밀어치기를 포기한 건 아니지만, 국내 선수들보다 더 강하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국제대회에서 변화는 필수, 아직 적응하는 단계라 파울이 나왔다고 전략을 수정하진 않았다.

딱~!!

5구를 때렸지만 우중간으로 향하는 타구, 아웃은 됐지만 의도했던 결과라 고개를 끄덕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작년과 비교하면 어떠냐?”

“칠만 해. 너는 그렇게 안 느꼈냐?”

전인규는 친구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게 깔리는 154km 직구가 칠만 하다니, 이 녀석은 괜히 허풍을 떨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난 거짓말 안 한다며 저쪽으로 멀어졌다.

“야, 그렇게 매번 강한 척 하면 안 피곤하냐?”

“난 강한 척 하는 거 아니야. 진실을 얘기할 뿐이지.”

전인규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자존심이 있으니 못 치겠다는 말은 안 하겠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승부욕 하나는 대단했던 녀석 아닌가.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어쨌든 2회까지 양 팀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침묵, 첫 득점은 일본에서 나왔다.

3회 말, 미야모토 신지 - 이마오카 츠요시 - 스즈키 세이무라의 3연속 타자가 나오면서 2실점, 한국의 선발투수 이홍기는 다음 타자를 땅볼 처리하며 급한 불을 껐지만 다시 2루타를 내주며 와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4실점, 아직 안타 하나 못 때린 한국 대표 팀 벤치는 급격히 가라앉았다.

출루만 되면 어떻게든 될 텐데 그것도 안 되는 상황, 역시 지난 도쿄 올림픽 금메달은 허상이었나. 중계석에 앉은 박한우 위원은 머리를 긁적일 뿐, 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강하네요?”

“잘하네. 도쿄 올림픽 때보다 강해”

광고가 나가는 사이, 박한우 위원은 캐스터의 질문에 본심을 털어놨다.

올림픽에선 국내 프로 선수들로 붙었지만 이번 WBC는 다르다.

해외파가 대거 합류하면서 단단해진 일본의 전력, 스즈키 세이무라는 일본에서 7년 동안 183홈런을 기록하고 메이저리그 신시내티로 넘어갔다.

구장 효과를 어느 정도 봤겠지만 그래도 내야수가 18홈런을 쳐냈다는 건 펀치력이 있다는 증거, 이번 대회에서도 타율 0.385, 홈런 2개를 기록하며 일본 타선을 이끌고 있다.

거기다 수비력도 좋아 2회 초 한국의 공격에서 안타가 될 만한 타구를 걷어냈는데, 한국도 누군가가 분위기를 주도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질 뿐, 상위 타선에 기대를 걸어봤다.

“자, 이제 4회 초, 대한민국의 반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전인규 선수, 첫 타석에서는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정확히 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아사노 선수의 구위가 지금 워낙 좋거든요. 강하게 쳐야 됩니다.”

하지만 전인규는 박한우 위원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번에도 밀리면서 유격수 땅볼, 다음 타자 김환희는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한국은 무안타 늪에 허덕였다.

‘그래, 저 녀석이 있다.’

신명철 감독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어차피 확정된 본선 진출, 여기서 진다고 대세에 큰 영향은 없다. 문제는 이대로 기가 죽은 채 미국으로 향해선 안 된다는 것, 타자들 중 유일하게 외야로 타구를 보낸 이인영에게 기대를 걸었다.

‘나에겐 연습 무대일 뿐’

하지만 이인영은 자신을 위해 방망이를 곧추세웠다.

기자회견에서도 밝혔지만 이번 대회는 내 실력이 세계에서 얼마나 통하는지 깨닫는 절차일 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중견수 옆에 떨어집니다!! 대한민국 대표 팀의 첫 안타!! 이인영 선수가 막힌 혈을 뚫어냅니다!!”

“지금 이인영 선수가 한 명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라는 생각이 드네요. 왜 한 명만 낳으셨습니까?”

박한우 위원은 잠자코 있는 이인호를 저격했다.

저렇게 훌륭한 아들을 낳았는데 조금 힘써서 한 명 더 낳는 게 좋지 않았을까.

이인영이 두 명이라니, 한국 입장에선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 하지만 지금은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 이인호는 침묵을 지켰다.

‘상성이 안 맞네.’

이인호는 다음 타자 박혁의 스윙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국내에서도 낮은 공엔 약점이 있었던 선수, 하필이면 공이 낮게 제구 되는 아사노를 만나 고전하고 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스윙, 아니나 다를까 포수 플라이가 나오면서 4회 초 공격도 소득 없이 끝났다.

‘내 수준이 원래 이 정도였나?’

기회를 살리지 못한 박혁은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국내에선 타율은 낮아도 낮은 공을 들어 올려 제법 많은 장타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아사노를 상대로는 그것도 안 되는 상황, 안타를 때린 이인영과 비교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왜 못 치지? 나는 칠만 한데’

답답하기는 월드 스타도 마찬가지,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 팀은 아사노를 일찍 끌어내렸다.

지금 무안타에 허덕이는 전인규도 깜짝 홈런을 쳐낼 만큼 잘 풀렸던 경기, 아사노의 구위가 좋아졌다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럼 우리의 실력이 떨어진 건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6회까지 한국 대표 팀을 무득점으로 봉쇄한 일본 대표 팀은 무라사메 켄이치를 올렸다.

역시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상대했던 선수, 최고 159km를 던지는 구위에 한국 타자들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오랜만이다.’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성큼성큼 타석으로 향했다.

앞선 타자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봤는데 구위는 아사노보다 훨씬 좋은 투수, 도쿄 올림픽에서 홈런을 때린 상대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따악~!!

“초구!! 아 ··· 이 타구가 중견수 글러브로 들어가는 군요. 이인영 선수의 3번 째 타석이 이렇게 끝납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나갔는데 방향이 좋지 않았네요. 이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믿었던 카드마저 무산되자 신명철 감독은 주전들을 대거 교체했다.

이미 본선 진출은 확정됐는데 가망 없는 경기에 주전들을 놔두는 게 의미가 있을까.

도민호와 교체된 이인영은 7회부터 더그아웃을 지켰다.

[이인영을 물리쳤다!!]

[일본 대표팀, 올림픽 치욕을 만회]

이날 경기는 결국 일본의 7대 0 완승으로 끝났다.

올림픽에서 대패를 당한 일본의 숙원을 풀어준 경기, 기자들은 보란 듯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한국을 자극했다.

속은 쓰리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경기가 끝난 후 대표 팀은 도망치듯 호텔로 향했다.

[속상하냐?]

“네, 우리 야구 너무 못하는 것 같아요.”

그날 밤, 이인영은 아버지의 위문전화에 속마음을 털어놨다.

무라사메에게 막힌 건 이해를 하겠는데, 아사노를 공략하지 못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작년 시즌 4할에 55홈런을 쳤지만 그 기록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한국 선수들의 경기력, 그래도 동료들이라 면전에서 욕은 못하겠고 아버지 앞에서 불만을 쏟아냈다.

[너 어디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따돌림 당한다]

“아버지 앞이니까 이런 소릴 하는 거죠. 후우~ 우리 야구 너무 못하는 것 같아요. 진짜 창피해 죽겠어요.”

계속되는 아들의 푸념에 이인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렸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녀석, 그 정도로 충격이 심했던 걸까. 하지만 좌절보다는 분노가 더 나은 법, 그런 정신 상태라면 다음 경기에선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며 위로 했다.

‘졌네.’

‘뭔가 잘못 된 거 아니야?’

한편, 보육원의 아이들도 대표 팀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매번 한국 대표 팀이 이기는 경기만 봤으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곰돌이 형이 일찍 돌아와 주길 바랐지만 이건 아니라고 뜻을 모았다.

“선생님, 형한테 문자 보낼 수 있어요?”

“문자? 왜?”

“지면 안 돼요. 형이 지고 오면 저희가 속상하잖아요.”

“그래요. 조금 늦게 와도 괜찮으니까 이기라고 해요. 얼른요!!”

빗발치는 요구에 선생님은 대략 난감한 표정, 마침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 아이들 뜻대로 해줬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저기 ··· 저 누군지 아시죠?]

“그럼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이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하거든요? 바꿔드릴게요.]

월드스타는 쏟아지는 아이들의 격려에 얼굴을 붉혔다.

얼마나 내가 못나고 약해 보였으면 절대 지면 안 된다며 꺅꺅 거릴까. 고맙기도 한데 창피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안하다. 오빠가 다음에는 이길게”

[정말이죠? 약속 지켜야 돼요.]

혜진이는 약속 지키라며 위로를 가장한 협박을 넣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했으니 물릴 수도 없는 상황, 이인영은 치욕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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