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솔직한 사람 (6)
“자!!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동점 홈런에 고무된 신명철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제 겨우 동점이 됐을 뿐, 한국 대표 팀은 내친 김에 역전까지 노렸지만 후속 타선의 불발로 동점에 만족했다.
8회는 양 팀 모두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종료. 멕시코의 9회 초 공격도 득점 없이 끝났다.
“자, 이제 한국 대표팀의 9회 말,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에 접어듭니다. 대타를 기용하는군요. 선화 이글스의 도민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멕시코도 투수를 바꿨네요. 자레스(Jareth) 라미레스 선수가 올라옵니다.”
“멕시코에서 가장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죠.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도민호는 작년 시즌 타율 0.257, 홈런 21개를 기록했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한 방은 있는 편, 자레스 라미레스도 제구보다는 힘으로 타자를 억누르는 편이다.
이 거친 맞대결은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현해탄 너머의 한국 팬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따악~!!
제대로 걸린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졌다.
도민호는 죽을힘을 다해 2루까지 진루, 거기다 이제부터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난 전인규 - 김환희가 타석에 들어선다.
끝내기 기회를 잡은 한국 대표 팀 벤치는 환호에 들썩거렸고, 관중석을 채운 팬들도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잔재주는 필요 없다.’
신명철 감독은 전인규에게 강공을 지시, 투수 앞 땅볼만 안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그 장면이 나와 버렸다.
“아~!! 투수가 잡아서 1루에!! 어?!!!! 공이 뒤로 빠졌습니다!! 빠졌습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끝내기 실책!! 한국이 극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아? 잠깐만요. 뭔가 이상한데요.”
한국 대표 팀이 승리의 환호를 부르짖는 그 순간, 주심은 전인규의 수비 방해 아웃을 선언했다.
전인규가 라인 안쪽으로 달려 수비를 방해했다는 것, 당연히 2루 주자 의 득점은 인정되지 않았고, 도민호는 2루 베이스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 내가 도대체 뭘 어쨌다고?’
전인규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 하지만 상대는 미국 심판이라 제대로 항의도 못했다.
“유어 아이 우롱(Wrong)?!!”
급한 대로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 당신이 잘못 본 거 아니냐고 따졌는데 돌아온 답은 퇴장,
마침 통역을 대동하고 심판 쪽으로 다가가던 신명철 감독의 발걸음은 다급해졌다.
아웃 된 걸 항의하러 나왔는데 이제는 퇴장을 두고 따져야 하는 상황, 전인규는 가볍게 항의 했을 뿐, 그렇게 큰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퇴장이라니, 신명철 감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했지만 주심은 저 선수가 날 모욕했다는 황당한 말을 쏟아냈다.
"XX!! 영어 못한다고 깔보는 거냐?!! 어?!!“
영어를 못하는 죄가 이렇게 클 줄이야,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전인규는 배팅 장갑을 집어던졌고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주심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다 코치의 저지를 받고 물러났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쪼잔해?’
이 장면을 지켜보던 이인영도 인상을 구겼다.
판정은 그렇다 쳐도 ‘유어 아이 우롱’이 그렇게 모욕적인 말이었던가.
마음속으로 불만을 삭였다.
‘이기자, 이기면 되는 거야.’
이 황당한 판정은 한국 선수들의 투지를 한껏 끌어올렸다.
다음 타자 김환희는 볼을 잘 골라내며 볼넷 출루, 7회 말의 영웅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바깥쪽… 아, 이걸 잡아주나요?”
“흥분할 필요 없어요. 결과로 보여주면 됩니다.”
다음 공은 바깥쪽 약간 높은 곳으로 들어왔다.
쳐봤자 좋은 타구 만들기 어려운 코스, 그런데 이인영은 이걸 툭 밀어 쳐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유어 아이 우롱!! 여기 봐!! 여기 보라고!! 유어 아이 우롱!!!!”
2루 주자 도민호가 홈 플레이트에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주심을 향해 괴성까지 내질렀다.
이제 와서 날 퇴장시킬 건가, 끝내기 안타에 흥분한 동료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지만 화가 난 흑곰은 주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는 주심, 그제야 슈퍼스타는 동료들과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고맙다.’
전인규는 친구의 어깨 위에 오른 팔을 올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날 위해 복수를 해준 녀석,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오늘의 주인공은 동점 홈런 포함 끝내기 안타까지 때려낸 이인영, 인터뷰 준비가 끝나자 리포터는 PD의 사인을 기다렸다.
“자, 오늘 3안타 4타점 맹활약을 펼친 이인영 선수와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인영 선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주심에게 큰 소리를 지르셨는데, 역시 전인규 선수가 퇴장당한 것에 대한 항의였나요?”
“알아 들으셨으면 그냥 넘어가세요. 남자들 사이에 그런 일은 말없이 넘어가는 겁니다.”
안 어울리게 멋있는 척까지 하는 곰돌이, 이때 중계박스에서 박한우 위원이 할 말이 있다는 사인을 보냈다.
PD는 바로 현장과 중계박스를 연결해 줬고, 이인영은 양아버지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이인영 선수, 마지막에 바깥쪽 높은 공을 밀어 쳤는데, 혹시 노리고 친 겁니까?]
“아니요. 칠 만 한 공이라 그냥 나갔습니다.”
요즘은 인 앤 아웃 스윙을 강조하는 시대, 그런데 요즘 이 이론을 잘못 이해하는 코치와 선수들이 있다.
인 앤 아웃 스윙은 간결한 스윙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팔은 몸에 붙인 채 바깥쪽으로 스윙을 밀어내는 개념이다.
스윙 거리가 짧아지면 타구에 실리는 파워도 같이 죽는 법, 당연히 간결한 스윙만 강조하다보면 바깥 쪽 공을 제대로 밀어내질 못한다.
하지만 이인영은 몸은 팔에 붙인 채 배트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며 스윙거리를 만들어냈다.
어설픈 실력의 선수였다면 그냥 지켜봤거나 땅볼이 나왔을 공인데, 그걸 결승안타로 만들어 내다니, 박한우 위원은 이 선수의 타격 레벨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모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 경기를 지켜 본 일본 대표 팀 관계자들은 잔뜩 긴장했다.
바깥쪽 제구 된 빠른 볼도 쳐버리는 타자, 이러면 투수가 던질 공이 없다.
어떻게 해야 이인영을 눌러버릴 수 있는 걸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렇다 할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 * *
[대한민국 대표팀, 쿠바까지 완파]
한국은 쿠바를 완파하고 본선무대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제 1, 2위를 가리는 일본과의 결전만 남았을 뿐, 사방에서 몰려온 일본 기자들은 이인영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일본에겐 불행한 소식이겠지만 최고조입니다.”
이쪽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선수, 이때 한 기자가 다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을 떠날 때 이런 말을 하셨더군요. 한국 야구위원회는 너무 국내 흥행에만 치중해 있다, 일본과 국제 친선 경기를 통해 실력을 더 쌓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기억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 한일 양국이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지난 대만 전에서 중국 기자들에게 황당한 질문을 받은 이인영은 인상을 구겼다.
“당신은 한국과 일본이 친해지길 바라나요?”
“예, 그편이 한국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유감이지만 일본이 싼 X이 너무 커서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노골적이고도 직설적인 화법에 기자는 흠칫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X을 쌌다는 건지, 하지만 이인영은 속마음을 다 드러냈다.
“과거 문제는 뭐 그렇다고 치고, 일본은 틈만 나면 한국을 도발하지 않습니까? 저는 무식해서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 타국을 겨냥한 도발과 혐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틈만 나면 주변 국가들을 도발하며 내부 여론을 다스리는 일본, 주변 국가에서 괜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인영은 대학도 못 갔지만 그런 시사 문제는 조금 관심이 있는 편, 정치인은 표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가?
선량한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인은 그런 게 아니다.
갈등을 중재하고 문제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정치인들의 역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은 표를 구걸하는 거지에 국론까지 이간질 시키는 간신 같은 놈들이 됐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도 다를 게 없는 상황, 주변 국가를 혐오하고 도발하는 게 일본 정치인들의 방식이라면 앞으로도 친해질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질문 저한테 하지 마세요. 이런 일에 답해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중국 기자가 싸지르고 간 X 냄새가 가실만한 타이밍에 또 어그로를 끄는 일본 기자들,
기자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쯤 해두라는 눈빛 경고에 입을 다물었다.
“다른 질문 없으십니까? 없으면 그만 하겠습니다.”
할 말 다하고 휙 돌아가 버리는 선수,
X 발언에 욱한 일본은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기사화 했고, 한국도 여기에 맞불을 놓으면서 한일전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야, 너는 국가 대표가 품위가 있어야지 X이 뭐냐 X이”
“왜요? 제가 못 할 말 한 거 아니잖아요.”
도민호가 한마디 했지만 이인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X을 X이라 부르지 못하다니, 이런 부당한 언론 통제가 어디에 있나.
일본이 냄새를 피울수록 주변 국가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사실, 그리고 이번 일로 지난 인터뷰에서 이인영에게 발끈했던 중국 여론도 살짝 가라앉았다.
마음에 안 들긴 한데, 자기 할 말은 하는 성격, 소신이 있어서 보기 좋다는 의견도 제법 늘었다.
하지만 그건 남의 나라 사정, 월드 스타는 눈앞에 있는 경기에만 집중했다.
* * *
‘왜 자꾸 우리한테 선물을 주지?’
이곳은 이인영이 후원을 하고 있는 보육원, 아이들은 계속되는 선물 공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곰돌이 오빠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알겠는데, 혜진이는 이런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아저씨”
“왜 그러니?”
“우리한테 다 주면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혜진이는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보육원에서 2달 정도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은 우리뿐만이 아닐 텐데, 다른 곳의 아이들도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는 걸까? 성운 라이온즈 관계자는 가슴을 파고드는 순수한 눈빛에 할 말을 잃었다.
“어~ 그건 말이지… ”
“다른 곳도 신경 써 주세요. 저희는 오빠가 잘 챙겨주니까요. 얘들아 그렇지?”
“응 괜찮아.”
다른 아이들도 동조하는 눈치, 보고를 받은 차명석 단장은 얼굴을 붉혔다.
우리 팀 선수가 후원하는 보육원이 여론의 관심을 받자, 차명석 단장은 마케팅 효과를 노리고 해당 보육원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런 따끔한 충고를 받을 줄이야, 어른으로서 부끄러웠다.
“와아아~!!”
“오빠 파이팅!!”
“볼 들어와도 다 쳐버려요!!”
한편, 어른들에게 한 수 가르쳐준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TV 앞에 모여들었다.
국가 간의 복잡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경기가 중요하다는 건 다들 이해하는 상황,
아이들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곰돌이가 이번 경기도 잘 풀어가길 기대했다.